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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어렵다. (5/5)

(5) 네 잘못이 아니야.

영어는 어려워요. 어려워서 어렵고(링크), 권력 언어라서 어렵고(링크), 잘나서 어렵고(링크),

시험영어에서 실패와 트라우마를 배웠기에(링크) 어려워요.


자, 그럼 누가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 놓았을까요?



- 초, 중, 고등학교와 수능


우리가 가장 많은 시간을 영어 공부에 쓴 곳은 아무래도 학교입니다. 아, "나는 공부 열심히 안 했는데?"라고 생각하는 분 분명 계실 거예요. 영어 수업 시간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연간 100여 시간, 고등학교의 경우 수백 시간에 육박합니다. 초, 중 고, 12년간 천 시간이 넘어요. 그냥 멍하게 앉아만 있어도 무언가 배우고 깨달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라면을 천 시간 동안 끓였다고 생각해 보세요. 못해도 전문점 하나 냈겠지요. 이 긴 시간 동안 "이러면 틀려요!"를 배우고, 시험을 치고, 안 좋은 점수를 계속 받아 왔어요. 강제로.


사교육 업체들, 특히 영어학원들이 자주 마케팅하는 것처럼 "학교가 잘못했다!"라고 해버리면 편할 것 같아요. 그런데, 학교는 또 학교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요.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영어 교사들과 학생들이 영어로 말하기, 듣기가 불가능했어요. 시대적 한계상 영어교육과 영어공부는 문법과 단어 암기의 테두리 안에서만 가능했었고 시험의 목적은 성취도 평가보다는 변별력이었기에 지필시험의 난이도만 높아졌지요. 시대가 지나 교사와 학생의 영어능력도 많이 향상되고 교재도 다양해졌지만, 이전부터 내려오던 시스템을 한 번에 혁명적으로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수능이나 대입 제도가 조금만 바뀌어도 몇 달간 미디어가 떠들썩하잖아요. 결국 문법과 단어 평가 기반에 듣기가 조금 들어간 영어평가제도가 계속 유지되고 있지요. 차라리 pass / fail제도로 가면 좋겠지만, 입시 때문에 그것도 요원합니다.


그렇다면 "대학 입시가 문제야!"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입시가 무슨 죄가 있나요. 다들 좋은 점수 받아서 좋은 대학 가고 싶어 하는 경쟁 자체가 문제이지요. 즉, 시험영어를 통해 트라우마를 가르친 건 학교 영어가 맞지만, 학교는 학교 나름대로 그럴 수밖에 없는 입장이에요.



- 영어학원 마케팅


영어가 얼마나 대단한지, 영어를 잘하면 얼마나 좋은지를 우리에게 가장 자극적으로 알려주는 곳은 영어학원들이에요. 그 메시지 아래에 '그래서 지금 당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교묘하게 끼워 넣었죠. 영어의 고급지고 지적인 이미지, 강사의 대단한 스펙과 경력에 더불어 학원들은 학부모와 학습자에게 공포 마케팅을 펼쳐요. 흔하디 흔한 '아직도 안 하고 뭐하세요?', '너 그러다 큰일 난다' 등의 메시지를 최선을 다해 퍼뜨립니다. 최근에는 트렌드가 조금 바뀌어서 온라인 강의들이 친근한 메시지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고 있지만 역시나 "남들은 다 하는데, 너는?" 같은 메시지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최근에는 많이 줄어든 추세지만, 영어학원들 중에서는 '스파르타식'을 표방하는 학원들이 많이 있었어요. '열혈', '끝장', '벼랑 끝' 등 여러 가지 바리에이션이 있었지요. 수강생 당신은 의지박약에 지금 그 영어 상태로는 큰일이니 이리 와서 '빡세게' 배우고 훈련하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이런 학원들에 가면, 아마 다른 학원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레벨테스트라는 걸 쳐요. 그리고 그 레벨테스트에서 대부분의 학생은 최하위, 또는 최하위보다 한 등급 위 반을 배정받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이 배운 건 다 쓸모없어."를 체험시켜주는 마케팅이에요.


대단한 영어와 그에 비해 너무도 부족하고 초라한 '당신'을 비교하는 메시지가 오랫동안 업계의 트렌드였다는 겁니다. 수많은 업체들이 수십 년간 막대한 광고비를 써서 뿌려댄 메시지는 사회에 스며들 수밖에 없지요. 성인들, 특히 대학생들과 사회초년생들이 느끼는 '나만 영어 못해'라는 자괴감은 이 학원 마케팅의 영향이 커요. 단, 영어학원들을 누가 그렇게 만들었나 생각해볼 필요는 있어요. 학원을 포함한 사교육에서는 매출이 전부입니다. 공포 마케팅을 수십 년간 한 이유는 소비자들에게 공포 마케팅이 제일 잘 먹혔기 때문이에요. 스파르타식 학원이 잘 된 이유는 많은 학생들이 스파르타식 학원에 등록했기 때문이구요. 학원이 못돼서 공포를 뿌려댄 것이 아니에요. 소비자들이 학원을 그렇게 만든 거예요.



- 교육상품 소비자, 수강생, 학생, 학습자


아무 잘못 없어요. 다시 한번 말할게요. 아무 잘못 없어요.

재미도 없는 학교 영어 수업에 강제로 앉아서 천 시간 넘게 '이렇게 하면 틀린다'를 교육받고, 마음에 안 드는 점수와 성적을 받아오며 꾸준히 상처 받은 사람들이에요. 우리나라 학교와 학원에서는 1% 이하의 우등생들만 올바르고, 99% 이상의 보통 사람들은 부족한 사람들이 돼요. 조금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시험은 원래 다 맞아야 잘한 거고 하나라도 틀리면 잘못한 거죠. 12년 동안 원하지 않는 시험을 치고, 원하지 않는 점수와 등급을 받아서 아쉬운 대학 진학을 해요. 인구 많은 나라 특징이에요. 한국, 중국, 일본만 그런 줄 알았는데 인도나 파키스탄도 그렇더라구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 세상을 둘러보니, 다들 영어 잘하는 것 같아요. 요즘 "개나 소나" 토익 900 넘는대요. 중고생들도 토익 고득점을 받고, 영어 프레젠테이션은 쉽게 한대요. 나만 뒤쳐진 것 같고, 이러다 큰일 날 것 같아요. 취업에는 영어가 필수래요. 대리나 과장급 정도 되었을 때 영어 못하면 땅을 치고 후회한대요. 그때 영어학원들의 공포 마케팅이 또 솔깃하게 들려와요. 용기를 내 학원에 갔더니 최하위 레벨이래요. 학원을 몇 달을 다녀도 잘 안 늘어요. 다 내 노력 부족인 것 같아요. 그렇게 여러 번 학원들과 공부방법을 도전해 보지만, 영어실력은 항상 제자리고, 역시 또 노력 부족이라 믿게 됩니다. 나중에 누가 물어보면 "공부 별로 열심히 안 했어요."라고 웃어넘기죠. 다들 그렇게 웃어넘기니까요.



- 영어를 잘하고 싶은 당신


우리나라 성인들 중에 영어 잘하는 사람 비율이 얼마나 될까요? 과연 "개나 소나" 토익 900에 영어로 쉽게 대화가 될까요? 절대 아니에요. 15년간 공교육과 사교육 두루 경험했고, 중학생부터 외국계 기업 임원까지 가르쳐 본 제 말을 믿으세요. 잘하는 사람 0.1%도 안되고, 외국계 회사에서 영어 잘한다고 소문난 사람들도 자기 영어 부족하다고 끙끙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영어 잘하냐는 질문에 "어 나 영어 되게 잘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외국 오래 살다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친구가 많이 없거나 아주 강한 자아를 가진 특이한 경우예요.


스포츠 팀에서 선수 한 명의 퍼포먼스가 저조하면 그 선수를 교체해요. 그런데, 팀 전체가 못하면 감독을 교체해야죠. 학교와 학원에서 오랜 시간과 많은 돈과 정성을 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 영어에 자신감이 없는데, 학습자 개개인이 다들 본인 기량과 노력 탓을 하고 있어요. 정말 최악인 건 학교와 학원은 "다들 잘 되는데 너만 안된 거야. 네 노력이 부족했나 봐."라는 암시를 한다는 거예요. 그들은 절대 다들 안된다는 말을 할 수 없겠지요. 스스로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꼴이 될 테니까요. 그들은 이 결과에 대해 학생 탓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이미지: 영화 "Good Will Huning" 중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이 부족한 게 아니에요. 당신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고, 당신이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그런 것도 아니에요. 영어가 어려워서, 권력자의 언어라서, 너무 잘나서, 시험영어에서 트라우마를 배워서 들인 노력에 비해 입에서 잘 안 나올 뿐이에요.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대화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갑자기 어른이 되고 직장인이 되어서 영어로 대화 못하면 부족한 사람이 되어버린 거예요. 천 시간 동안 우리가 배운 것은 난이도만 과도하게 올려놓은 문법, 독해, 단어 시험에서 오답 거르는 방법밖에 없어요. 자동차 구조와 부품을 12년간 외운다고 운전을 잘하게 되는 건 아닌데, 세상이 갑자기 왜 운전 못하냐고 갑자기 타박하는 거예요. 가해자는 없는데 피해자는 수천만이에요. 학교도, 학원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결과가 이래요.



영어학습 관련 글이라면서 재미있는 영어 표현이나 단어 암기 비법, 쉬운 문법 규칙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고 왜 계속 답답한 얘기만 하고 있나 하셨던 독자분들 많으실 거예요. 잘못된 시스템 안에서 잘하는 방법을 배워 봐야 그 시스템 안에서 맴돌 뿐이에요. 흔히들 말하는 "영어 잘하는 팁"은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학교 영어, 학원 영어 안에서 더 나은 점수를 받는 방법이거나 지식유희에 가까운 것들이 더 많아요.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시작점이에요. 내 노력이 부족해서 내가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하면 쉽고 편하겠죠. 하지만 사실과 달라요.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도 계속 같은 맴돌이를 하게 될 거예요. 내 입에서 영어가 잘 안 나오게 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영어로 된 텍스트나 소리를 들을 때 내가 왜 긴장하는지를 이해하고 극복해야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 방향이 제대로 서요. 무엇을 해야 할지 보여요. 머리가 하얘지는 것을 극복하고 조금씩 나아질 수 있어요.


"영어는 어렵다." 1, 2, 3, 4 편 안 읽으신 분들은 꼭 읽어 보시구요. 다음 글에서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해 보도록 할게요.


이미지: 김민승의 말하기 특강을 들은 익명의 학생 수강평, 아마도 2013년 겨울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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