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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다 Dec 06. 2022

내 아이가 손목을 그었다 7

제가 부족한게 뭐가 있어서

남편은 평범하고 성실한 남자다.


평범하고 성실하게 살아왔고 모든 것이 다 잘 되어가고 있다고 믿고 있던 남편에게 아내의 암 진단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방암은 발병률이 높아 주변에서 자주 보이고 5년 생존율도 높아서 쉬운 암이다, 착한 암이다 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남편은 아이들 관리와 소소한 집안일들, 거기다 아내의 간병까지 어깨 위에 올려놔야만 했다. 장모님이 매일 와주셨지만 부모의 몫은 늘 따로 남아있으니 말이다. 남편은 생전 안 하던 역할들을 해내야만 했다.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생활비를 벌어주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80년대 산업전사 같은 남편은 이 일로 많이 달라졌다. 생전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던 사람이 연애와 결혼 통틀어 처음으로 사랑과 걱정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건강해지면 내가 원하는 곳으로 여행을 자주 다니자고도 했다. 일 중심이던 자신의 삶의 무게를 가정 중심으로 옮겨온 것이다.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술과 항암,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수시로 입원과 퇴원이 반복됐다. 무뚝뚝한 아빠와 사춘기 아이들 사이에서 완충제 역할을 하던 사람이 사라졌으니 집이 어땠을지는 뻔히 보이는 상황이었다.

힘든 기간이 지나고 치료가 끝 내가 집으로 돌아자 집안 분위기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아이들은 다시 학교나 학원을 마치고 오면 큰방으로 들어와 밖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거렸다. 재미있었던 일, 화났던 일, 친구들 이야기, 새로 시작한 게임 이야기, 요즘 유행하는 밈들을 엄마에게 떠들어댔다.

모든 것이 다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자해를 시작했다.


TV나 인터넷에서만 봤던 일이 내 아이에게 일어났다. 내의 암 보다 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자신을 스스로 해치다니. 내 자식이 정신과를 다니다니. 남편에게 정신과는 어딘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상상 속의 이야기처럼 현실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장소였다.

나는 매일 밤 아이의 상태를 이야기하면서 남편이 묵묵히 들어주는 것에 감사했으나, 사실 남편은 너무 큰 충격으로 가만히 있는 것 외에는 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이건 문제가 커, 정신과를 예약했어, 이건 좋은 징조야, 하고 속삭이면 응, 응,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어쩔 줄 몰라하던 남편은 아이가 힘들어하던 어느 밤에 아이를 꼭 끌어안고 방으로 가서 잠을 재워줬다. 평소와 달리 아이에게 화를 내지도 큰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그러나 시기가 나빴다. 아이는 계속 나빠지기만 했다.

그 주말에 남편은 아이를 달래서 케이블카를 타러 갔다. 마침 가을이라 이쁘게 든 단풍을 보고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까 싶었던 거 같다. 그러나 단풍을 보러 몰린 인파들 사이에서 기가 빨린 아이는 손톱으로 팔의 피부를 피가 나도록 쥐어뜯기 시작했다. 남편의 노력과는 달리 아이는 그날 밤도 심하게 자해를 했다.


약을 먹어도 당장 눈에 띄는 호전이 없고 아이의 자해가 반복되자 남편은 화를 냈다.

제가 부족한 게 뭐가 있어서! 고생을 안 해봐서 그렇지. 공부가 하기 싫은 거야. 나가서 공장 가서 돈이나 벌어오라 그래.

정신과라는 몹쓸 곳에 드나들어야 하는 상황도, 개선 의지가 없이 무기력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도,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도 다 마음에 들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아이는 매일 약을 먹었고, 일주일에 한 번은 엄마와 함께 20분을 걸어서 병원을 다녔고, 학교에서 조퇴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엄마인 내가 보기에는 아이는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의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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