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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Dec 09. 2021

순서를 외웠다고 그 곡을 안다고 말할 수 없어요



훌라 수업 가는 길에 운전하며 오디오북 듣는 걸 즐긴다. 일주일에 한 번, 왕복 2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읽고 싶던 책을 들으며 좋아하는 것을 배우러 가는 일은 큰 행복이다. 


그날도 나는 혼자 있는 고요한 방처럼 편안한 파란 싼타페 운전석에 앉아 류시화의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를 듣고 있었다. 잠실 대교 남단을 막 지날 즈음 카오디오에서는 고대 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유디슈티라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막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야기는 장차 왕권을 물려받을 그가 학교에 수업 진도를 점검하러 온 구루(영적 스승)에게 초급 읽기 책을 펼치며 이렇게 말했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저는 글자를 익혔고, 이제 첫 문장을 배웠습니다.” 


그동안 배운 게 고작 한 문장이라는 말을 당당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말하는 소년의 뻔뻔함과 게으름에 몹시 화가 난 구루는 사정없이 회초리질을 했다. 그런데 구루가 아무리 세게 매질을 해도 소년의 모습에는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평온하고, 밝고, 행복한 표정이었다. 소년의 얼굴에는 분노나 두려움, 억울함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혼자 열을 내는 것에 스스로 지친 구루가 마음을 진정하고 문득 소년이 배웠다는 첫 문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화내지 말라. 결코 흥분하지 말라. 이성을 잃지 말라.’ 구루는 그제야 진정으로 학문과 지혜를 배운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소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깊이 부끄러워하며 소년에게 사과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소년에게 있어서 배운다는 것은 기계적으로 외워서 알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깨닫고 느끼고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을 뜻했다. 이것이 소년에게는 진정한 배움의 의미였다.


솔직히 이 에피소드를 들으며 처음 한 생각은 ‘인간이 저게 가능한가?’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과장이 좀 심하다고 느꼈다. 오늘 우연히 인도의 옛날이야기 하나 들었네, 정도로 대강 흘려버리곤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그런데 글의 마지막 문단에서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 이상하게 마음에 계속 남았다. 그 질문은 이것이다.


내가 배운 한 문장은 무엇인가? 머리로 암기한 지식이 아니라 어떤 살아 있는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가?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진정한 앎은 무엇인가?


내가 그동안 배운 것들 중에 진정한 한 문장이 있었나. 내가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깨달음이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날 훌라 수업이 끝날 무렵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닌가.


“순서를 외웠다고 그 곡을 안다고 말할 수 없어요.” 


허를 찔린 기분이 들었다. 그날은 몇 주간 배운 곡의 안무를 모두 익힌 날이라 마음속으로 ‘오예 드디어 이 곡 끝냈다!’하고 기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콕 집어 저 말을 하셨다. 너는 이제 고작 순서를 외운 것뿐이라고. 곡에 담긴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끊임없이 새롭게 다시 추라고. 그래서 내 몸에 그 곡을 나만의 방식으로 새겨 넣는 그날이, 네가 ‘곡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될 거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것 같다.


문득 고개를 드니 인간 알로하가 그곳에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그가 알로하 정신에서 벗어나는 행동과 말을 하는 걸 보지 못했다. 단 한 번도 미간을 찌푸리거나 언성을 높이는 걸 보지 못했을뿐더러, 저 사람의 포용력은 어디까지일까 궁금할 정도로 많은 것들을 품어내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었다. 언젠가 선생님을 이런 말씀도 하셨다. 


“아는 대로 살려고 노력하다 보니 삶이 삶다워지더라고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전하고 나누면서 정작 나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나는 남들에게는 착하게 살라고 하면서 정작 본인은 숨 쉬듯 죄를 짓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떠올리며, 내 눈앞에 있는 그와 유디슈티라가 얼마나 희귀한 존재들인지 생각했다. 그래서 얼마나 귀한 지도. 그들은 살아있는 깨달음을 삶 속에서 실천하여 세상과 자신, 그리고 타인까지 연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깜빡이도 켜지 않고 갑자기 끼어들기를 하더니 브레이크까지 밟고 느닷없이 시속 10km로 달리는 운전자를 만났다.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고 경적에 손이 올라갔지만 알로하의 첫 번째 덕목인 온화함과 너그러움을 떠올리며 참았다. 옆 차선으로 옮겨 슬쩍 보니 그 운전자는 한 손으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또다시 튀어나오는 욕을 알로하의 마지막 덕목인 인내를 생각하며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언젠가는 나도 훌라와 알로하 정신을 진정으로 배웠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길 꿈꾸며. 내 삶이 삶답다고 말할 수 있게 될 날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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