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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사자클럽 Jul 05. 2021

사진 프로젝트 <목욕하는 여자들> 2

뮤지션 S

<목욕하는 여자들> 1편 보기 https://brunch.co.kr/@jinjungsung/28



마지아의 프로젝트 <목욕하는 여자들>

도시를 살아가는 여성의 하루를 추적한다면, 대부분 그 마지막은 욕실일 것이다. 목욕(샤워와 목욕을 편의상 모두 ‘목욕’으로 통칭한다)으로 하루를 마감한다면 말이다. 어떤 여성에게 목욕은 특별하다. 그는 한 평 남짓 폐쇄된 공간에 알몸으로 선다. 그리고 가장 개인적인 모습으로 자신만의 시간을 보낸다. 온전한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몸을 씻는 동안은 모두가 평등하다. 비슷한 표정으로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긴장이 이어진 하루를 씻어낸다. 마지아는 도시의 여성들, 그중에서도 목욕에 각별한 의미를 두는 여성들을 찾아 이들의 씻는 과정을 사진으로 담는다. 씻는 행위 그 자체로, 어떤 여자는 도시에서 살아남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내일을 살아갈 약속을 한다. <목욕하는 여자들>은 몸에 새겨진 일상의 기록이다.


목욕하는 여자들 02_ "I'm in the right place, wrong time. " 뮤지션 S와의 인터뷰

Trigger Warning : 인터뷰와 사진에는 자살과 자해에 관한 직, 간접적 묘사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은 감상을 자제해주시길 바랍니다.

 

샤워는 언제 하나.
요즘 배달 일을 하는데, 아침 열 시에 나갔다가 밤 9~10시쯤에 들어와서 11~12시쯤 씻는다. 얼마 전 사고가 나서 당분간은 일을 쉬고 있다.
  

본업을 소개한다면.


아직도 자신을 뮤지션이라고 말하긴 쑥스럽지만, 평생 음악을 해왔다. 현재 포크와 팝, 록 한 곡씩 총 세 곡을 만들어 각각 앨범을 낼 예정이다. 작곡을 주로 하지만 공연 기획도 한다. 유튜브를 통해 인디씬에 없는 새로운 걸 만들어나가고 싶어서 이런저런 시도를 하는 중이다.


촬영을 하고 싶다고 먼저 연락해온 이유가 있을까.


아무래도 사회생활 중 사람들이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일이 잦다. ‘그거(트랜스젠더*) 맞죠? 아닌가?’ 라며 떠보는 이들과 눈치 싸움하는 과정이 불필요하다고 느껴졌다. 차라리 당당하게 공개하고 싶었다. 내가 ‘그거’여도 상관없는 사람들만 주변에 남고, 아니면 떠나는 게 낫다.

*트랜스젠더(transgender): 젠더와 지정성별이 일치하지 않는 성소수자(출처 MOGAI Pride-flag위키)
  

기대하지 않은 반응이 나올 수 있다.


지금보다 더 나빠질 일도 없다. 내 인생이 그랬다. ‘아, 여기가 밑바닥이구나.’ 싶으면 더 낮은 바닥이 있었다. 내려가고 싶지 않아 발버둥을 쳐도 기가 막힌 방법으로 그 아래 바닥을 치게 되더라. 이번에 사고 난 것도 그렇고. 포기했다 그래서(웃음).



어떤 바닥을 어떻게 쳤길래.


20대 중후반에는 주로 ‘진실한 사랑’을 고민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받아주지 못한 뒤로, 내가 너무 이기적이고 나쁜 사람 같았다. 그런 자신을 용서하기 힘들어 삶을 끝내자 결심했다가, 어차피 끝낼 거면 그 전에 내 정체성대로 한번 살아보자 생각했다. 호르몬 치료를 시작하려면 정식 진단서를 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정신과에서 상담을 진행해야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 생각을 그냥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얘기해버렸다. 당연히 진단서를 안 떼어주지(웃음).


상담받을 돈이 다 떨어지자 약국에서 피임약을 샀다. 피임약에 여성호르몬이 들어있잖나. 그걸 두 판씩 사서 하루에 네 알씩 먹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밥을 먹는데도 땀이 나더라. 한참 후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의사에게 잘못 얘기한 것 같았다. 다시 가서 ‘트랜지션*을 통해 행복한 미래를 기대하고 있다’라는 식으로 말했더니 그제야 정식 진단서가 나왔다.


이후 호르몬 치료를 병행하며 돈을 모아 성전환 수술을 했다. 2년 전, 코로나가 오기 직전이다.


*트랜지션(transition): 성 정체성의 내부 감각을 젠더 외형표현 혹은 성별 특성과 일치하도록 바꾸는 과정(출처 MOGAI Pride-flag 위키). 의료적, 사회적 트랜지션으로 나눈다. ‘의료적’은 신체적 치료를 받는 것이고 ‘사회적’은 주민등록번호를 정정하는 것이다. S는 두 가지를 모두 완료했다.


얼마 안 됐다. 트랜지션 이후의 삶은 어떤가.


이미 늦었지, 너무.


무엇이?


취직하기에도 늦고, 안정된 직장 들어가기도 힘들고.
트랜지션 전에 이력서 낸 곳은 무조건 다 잘렸다. 잘리지 않고 면접을 보러 가면 보건증을 요청하고, (성별이 표시된) 보건증을 들고 갔더니 내쫓는 경우도 있었다.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알기 전과 후의 반응이 너무 달랐다. 그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니 제대로 된 커리어를 쌓을 수 없었다. 음식점이나 주유소 등지에서 짧게 일했다. 그래도 열심히 하고 잘하니까 꽤 오래 일하게 두는 곳도 있었다. 스페인 음식점에서 2년 동안 일한 게 가장 긴 경력이다.


수술 후에는 와인바를 차렸다. 직접 페인트칠하고 타일 붙여가며 준비해서 작년 12월에 오픈했는데 직후에 코로나가 왔다. 근근이 버티느니 그냥 빨리 정리하고 음악을 다시 하지 싶어서 여기까지 오게 됐다. 이래저래 빚이 많아졌다(웃음).



부모님이 모두 목사시고, 본인도 신학과를 졸업했다. 지금 삶에 관해선 어떻게 얘기했을까.


트랜지션 자체가 그분들에겐 별 충격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그냥 사라져버릴 것 같은 자식이라 어떻게든 붙잡아야겠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아들이라고 부르신다.



핸드폰 바탕화면 사진은 누구인가.


왼쪽 여자애가 유치원 시절 제일 친했던 애고 오른쪽은 나다. 이사를 안 갔다면 계속 이 친구들과 놀았을 거다. 그러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

이후 삶은 어땠길래.


초등학교 때 어떤 애가 나에게 “너 같은 애랑 누가 결혼해!”라고 말했는데, 그게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바디 디스포리아*를 가중시켰다. 그렇게 십 대를 자존감이 바닥인 상태로 보냈다. 나는 다른 트랜스젠더보다 바디 디스포리아가 심한 편이다. 트랜지션이 끝난 지금도 거울을 볼 때마다 너무 괴롭다. 스스로가 여기저기 꿰맨 봉제 인형 같다.


고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친구들에게 커밍아웃했지만 극단적인 혐오 반응이 많았다. 어차피 주변에 사람이 없다. 고등학교, 대학교 때 친구들을 다시 만날 일도 없다. 그 사람들이 나를 여자로 받아줄 리도 없고, 내가 굳이 그 사람들을 찾아가서 설득할 것도 아니고.


*바디 디스포리아(body dysphoria): 신체 불쾌감. 자신의 신체에 불쾌감을 느끼는 경우 (출처 페미위키)



트랜지션을 하지 않는 선택지를 골랐다면 어땠을까.


트랜스젠더 안에서도 다양한 성향이 존재한다. 나는 내가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고민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어릴 때 웬 남자 아기가 어떤 공간에 빨려들어가더니 여자가 돼서 나오는 만화를 봤다. 그때 처음 ‘남자와 여자란 성별이 다른 거구나’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이후 쭉 내가 여자라고 생각했다. 남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물론 나 같은 사람도 있지만, 정체성에 대해 계속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게 생활하는지도 갈린다. 상대적으로 드물지만 사회의 안전망 안에서 잘 지내는 트랜스젠더도 있다. 반대로 가장 밑바닥에서 전전긍긍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이 우리를 정규직으로 받아주지 않으니까. 특히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고충은... 할 말이 없다.



본인은 어디쯤 있는 것 같나.


나는 내가 애매한 존재이자 부적응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친 세상에선 오히려 그게 정상 아닐까? 다 무슨 상관이겠나. 내가 좋은 사람이면 다른 좋은 사람들과 관계를 이을 수 있겠지.




이미 SNS에서 커밍아웃*했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


뭐, 힘내라는 사람도 있고,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에요’라는 사람도 있고, 머리 아프다고 회피하는 사람도 있었다.


*커밍아웃(coming out): 자신의 성 지향성 또는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자발적 폭로에 대한 은유(출처 MOGAI Pride-flag 위키)


누구나 머리 아픈 문제는 피하려 하지 않나.


나는 아니다. 나는 이 사회에서 ‘트랜스젠더’로밖에 살 수 없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지금까지 생존한 것도 그 전 시대 트랜스젠더들의 무수한 시도와 경험의 결과다. 확실히 세상이 옛날보다 조금씩 좋아지긴 한다.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하고 늦지 않게 호르몬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 것도 비교적 최근에야 가능해진 거고.



머리 아픈 문제에 정면으로 맞섰던 사람들 덕분에 지금의 당신이 존재한다.


선대 사람들의 경험이 축적되어 현재 나의 경험에 영향을 끼친다. 과거와 현재 사람들이 만드는 이 시간선 위에서, 나는 지금, ‘이 기간’에 점을 찍고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점이 다음 세대에 선으로 이어지겠지.


한번은 아주 옛날, 그러니까 1세대 트랜스젠더 할머니들을 소개받았던 적이 있다. 6.25와 일제강점기를 겪은 분들이다. 할머니들과 위스키를 마시면서 얘기하는데 감정이 묘했다. 그분들은 그런 시대 속에서, 그런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며 나름의 트랜지션을 해냈다. 제대로 된 수술이 아니었기에, 거의 실험 대상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수술대에 오르셨다. 그 만남에서 나는 그분들이 살아온 시간과 내가 살아온 시간이 겹치는 순간을 보았다.


누가 6.25 전쟁통 속에 퀴어가 있다고 생각할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 축복받은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분들을 보며, 내가 ‘아프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엄살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아프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로 또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신할 수 있다.


그래서 ‘아프다’는 걸 인식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시대에 잘못 껴있는 사람일 뿐이다. ‘I'm in the right place, wrong time’이라는 말이 있다. 제대로 된 장소에 있으나 잘못된 시간대에 있다는 뜻이다.



그 잘못된 시간대 안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아무 생각 안 하기로 했다. 수십만 가지 경우의 수를 대비해봤자 미래는 언제나 기가 막히게 뒤통수를 쳤으니까. 어차피 맞을 뒤통수, 노력 안 하고 그냥 맞으련다.



다른 하고 싶은 건 없나.


사랑, 그냥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랑. 나는 내 세계를 살아가고 당신은 당신의 세계를 살아가는. 나는 당신의 세계를 궁금해하고 당신은 나의 세계를 궁금해하는. 그러다 하나가 되어가는. 서로의 세계를 알아가는 과정 자체를 공유하고 싶다.



‘사랑’이 늘 중요한 화두다.


딱 한 사람만 내 편이 되어주면 된다. 그 사람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도록. 그럼 복잡한 머릿속이 조금 안정된다. 머릿속이 늘 복잡해서 더욱 삶을 끝내고 싶다. 방법도 이미 안다. 그런데 한편으론 또 다른 내가 이런 나 자신을 객관화해서 지켜보고 있고. 나도 모르겠다, 내가 왜 이렇게 생겨먹었는지(웃음).



화이트보드의 문구가 인상적이다. ‘미개한 것들, 하등한 생명체들’은 무슨 뜻인가.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그렇게 썼다. 다른 이에게 공감을 잘하고 기대도 실망도 과해, 인연을 맺고 끊는 게 힘들다. 관계의 끝에서 남는 상처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컸다. 상대에게 화낼 일도 나 자신에게 화풀이하며 해소하고. 그래서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상황이 커진 적도 많다. 저 문구는 일종의 발악이다. 사람들과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려면 일부러 이렇게라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문구가 바뀌었다. 본인이 직접 찍어 보낸 사진을 본문 맨 마지막에 첨부한다.)

그런 감정들이 우울감에 영향을 미치겠다.
씻지 않으면 우울증이 배가 된다. 우울증 치료 방법 중에 뜨거운 물과 찬물에 번갈아 들어가는 게 있다기에 참고했다. 원체 물을 좋아하기도 한다. 원시시대에 태어났다면 온천 옆에서 살지 않았을까?


꿈의 욕실이 있는가. 돈이 많다면 욕실을 이렇게까지 꾸며보고 싶다거나.
뭔가를 누린다는 것 자체로 인류에 죄책감을 느낀다. 내가 하나를 가지면 지구 어딘가엔 하나를 뺏기는 생명이 있으니까. 뺏고 뺏기며 사는 거다. 그래서 화려한 걸 꿈꿀 수 없다. 가져도 된다면 세면대랑 욕조 정도만 있으면 좋겠다.

"이 끝없는 고통에서 나를 해방시켜줄

단 하나의 방법.

37년간 누구보다도 살기 위해

삶의 의미에 대해

내 삶을 버리기까지 결론지어지기까지

남들보다 수만배 수천배 노력해보았지만

결국은 이 자리에

내가 돌아갈 곳은 없다.

이제 됐다.

37년 고생 많았다, 아가. 언제가 될 지 모르겠지만

38년, 39년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고생 많았다.

편히 쉬자.

기막힌 우연이 있다면

남은 시간 기대해볼게.

하지만 잘했어, 잘 살았고 누구보다.

훌륭하고 멋있고 예쁘고 사랑스런 아이였다 너는^_^ 사랑해"


(글, 사진_마지아 / 교열_김송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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