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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Oct 12. 2020

할슈타트 가보라던 사람 누구야

안개 낀 할슈타트는 처량하다. 무료한 관광객만 거리를 가득 메운다

할슈타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지나치는 호수 하나하나가 아름다워 여기서 그냥 내릴까 서른 번쯤 고민했다.


    유럽에 오기 전 여행서적을 하나 샀다. JUST GO 동유럽편. 무게도 상당한데다 이걸 굳이 들고다니며 여행하는 건 뭐랄까 너무 구시대적이지 않나 싶었지만, 같은 학교에서 밤베르크로 출발하는 친구들이 하나씩 산다기에 나도 얼결에 사게 됐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동유럽, 특히 오스트리아가 내 취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으니 하필 다른 친구들 것과 겹치지 않게 하느라고 동유럽편을 고른 건 내가 불운한 탓이라고 할 수밖에. 할슈타트는 그렇게 산 여행서적에서 잘츠부르크 옆에 부록처럼 붙어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관광객들도 이 둘을 세트처럼 묶어서 다닌다고. 마침 이틀밖에 시간이 없어 가까운 곳만 돌아야 하기도 하고. 호수가 예쁘다고도 하니 한번 가봐야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을 잘츠부르크 다음 목적지로 정했다.


    뮌헨에서 헤어지기 전 여행계획을 이야기하자 Eva는 할슈타트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있다고, 본래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는데 동양인 관광객들이 몰려들며 주민들이 몸살을 앓는 곳이라는 뉴스를 봤던 것 같다고 이야기했었지. (사실 여부와 별개로 그 기사는 상당히 인종차별적이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멍청하고 오만한 백인 관광객들이 전세계에 끼친 해악은 얼마~?) 그 말대로, 중간 도시에서 환승해 할슈타트를 지나는 지역열차를 타자마자 주위에는 온통 동양인뿐. 객실 안 여기저기서 한국어가 들렸다. 유랑에서 만난 듯한 30대 남녀가 누나동생 부르며 각자의 신상정보를 비듬 털듯 털어내고 있었고, 내 뒷좌석엔 친구로 보이는 20대 초반의 한국인 여성 둘이 탔다.


    2시간쯤 걸려 도착한 할슈타트역. 플랫폼도 하나뿐인 단촐한 역사에 내려서자 다들 어딘가로 우르르 내려가기 시작했다. 따라가니 나오는 조그만 선착장. 마찬가지로 하나밖에 없는 배편은 기차 시간에 맞추어 운행하는 듯했다. 왕복 티켓 가격인 6유로를 내자 손가락 한 마디만한 두꺼운 빈티지민트색 종이티켓을 두 개 주곤 하나는 바로 반으로 살짝 찢었다. 잠시 기다렸다가 우르르 배에 올랐는데 자리가 부족해서 선실을 꽉 채우고도 몇몇은 일어서서 가야 했다. 그 대부분이 역시 중국인 아니면 한국인.


왼쪽이 구글맵에 나오는 유명한 포토스팟에서, 오른쪽이 마을 끄트머리 작은 항구에서 찍은 사진.


    안개를 헤치고 도착한 곳은 아름답지만 어둑하고 흐려 음침해 보이기까지 하는 할슈타트. 나무로 지은 귀여운 집이 여러 채 있었고 마을이라 할 만한 것은 손바닥만큼 작았다. 대부분의 가게가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아기자기한 기념품샵이고, 보통 산 위의 소금광산에서 채굴한 소금으로 만든 비누와 조각들, 목공예품들을 판다. 거기에 절반은 문을 닫은 카페 및 레스토랑이 여러 개. 한 바퀴 휘 돌고 나니 더이상 볼 게 없었다. 자연경관을 감상하려 해도 날이 흐려서 보이는 게 없고. 마을 끄트머리의 조그만 마트에 들러 남은 유로화를 털어 2.5유로짜리(겁나 비싸) 할슈타트 병맥주를 샀다. (나중에 기숙사에 돌아가서 마셔봤는데 맛없었다.)


    Eva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좁은 거리에 관광객만 배편을 따라 주기적으로 미어터지는데 보이는 주민이라곤 죄 상점 주인뿐. 현지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좀 꼴보기 싫을 만도 하겠다. 나도 이런 마을에 굳이 들러서 마을의 경치를 소비하고 떠나는 꼴보기 싫은 관광객1이 되어버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오른쪽, 가게를 지키는 아저씨(모형). 순간 시체를 박제해놓은 줄 알고 매우 놀랐다.


    다시 멍하게 걷고 있으려니 저기요, 하고 옆에서 한국어가 들렸다. 3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분이 한국분이시죠? 하고 물으며 와서는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혼자 와서 사진 찍어줄 사람이 없다고. 나도 찍어주시겠다고는 하셨지만 별로 내키지 않아서 사진만 찍어드리고 헤어졌다. 다음 배편이 뜨기까지 아직도 2시간이 남았다. 그동안 대체 뭘 하지... 고민하면서 북쪽으로 더 걷다 보니 작은 예배당을 가리키는 안내판이 보였다. 말 그대로 손바닥만한 크기의 묘지가 옆에 있었고, 내려와서 더 걷다 보니 할베르크Halberg라는 이름의, 야트막한 언덕길이 이어졌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 넝쿨에 휘감긴 뾰족입이 악어 다음으로 제일 내 취향이다. 왠지 꿈에 나와 저주를 걸 것 같아.


    관광객은 잘 다니지 않는지 희미하게 난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니 거대 악어가 입을 벌리고 누워있었다. 놀라서 다시 보니 목조상이었다. 아무래도 근방에 사는 예술가의 작품인지 거대한 나무를 깎아 만든 조각이 여럿 널려 있었고, 한국의 장승과 닮은 나무패들이 길을 따라 이끼 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오싹하지만 여행 중 본 광경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보이는 길을 따라 한참 오르고 내리다 보니 어느덧 마을의 끝. 아스팔트 깔린 도로가 나와 다시 돌아가야 했다. 가엾은 여행객 마을에 갇혔네... 여전히 남은 시간은 한 시간.


오른쪽 접시는 집 외벽 장식. 참신하고 아름답다.
탐방 중 발견한 스팟들.


    슬렁슬렁 마을을 걷다가 전재산을 털어 3유로짜리 핫도그를 사먹자 어느덧 현금도 고작 86센트밖에 안 남았다. 한화로 환전해봐도 천 원을 겨우 넘는 누구 코에도 못 붙일 돈. 이 쌀쌀하고 흐린 날에 글뤼바인 한 잔 사먹을 돈도 안 나온다. 너무 추워서 30분쯤 일찍 선착장으로 가니 벌써 몇 명이 줄을 서 있었는데, 그날의 마지막 배편이라선지 금세 내 뒤로 사람들이 빼곡하게 섰다. 결국 배가 들어오자 사람들은 꾸역꾸역 배 안으로 밀려 들어와서 숨 쉴 틈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야 했다. 비가 내렸던 탓에 사람들의 옷이며 우산이 다 젖어있어 짓눌린 채 15분을 떠가는 건 그닥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이쯤되면 정말... 뭐하러 할슈타트까지 갔던 건지 의아할 지경.


    한나절 할슈타트 여행은 그렇게 흐지부지 한 것도 안 한 것도 없이 끝났다. 햇빛이 쨍쨍하고 따뜻할 때 갔더라면 그래도 좋았을 텐데. 아니면 조금 더 일찍 알아보고 평이 좋던 소금광산에라도 들르든지, 느긋하게 머물면서 해가 떠 찬란한 경관을 바라보든지 했더라면 그것 역시 좋았겠지만, 나는 시간도 계획도 돈도 없고 카드도 잃어버린 전재산(현금) 86센트의 교환학생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 내가 한 여행 중 제일 처음이자 가장 어설프고 가장 허무한 여행은 그렇게 설렁설렁 지나갔다.


    물론 여기에도 멍청이 같은 후일담이 하나 따라 붙는데, 이렇게까지 제대로 밥도 못 먹고 짠내 나는 여행을 한 건 N26 카드를 잃어버려 현금을 인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만...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보니 N26으로는 카카오뱅크처럼 카드 없이 앱만으로도 현금 인출이 가능했다. 오스트리아도 독일어권이라선지 N26 시스템이 잘 돌아가는 곳이었는데... 그냥... 돈 뽑아 쓰면 됐는데... 결국 모든 것은 그저... 멍청한 내가 벌인 한 편의 헛짓거리.........

   




몇 년째 공사 중인 밤베르크 대성당. 상단부 네온사인은 밤마다 차례로 Good God을 보여준다. 나는 처음 보고 미친 센스에 기겁했지만 정작 기독교인인 내 옆방 친구는 좋아했다.


    밤베르크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 20분. 아직 운행하는 버스가 하나 있지만, 노선이 애매한 탓에 중간부터 또 캐리어를 덜덜 끌면서 기숙사까지 걸었다. 내 방이 가까워져 지치고 허무하고 안심되는 와중에 밤거리 저편에서 누가 나를 부른다. "헤이! 오랜만이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사람 얼굴을 원체 기억 못 하는 나이므로 어느 파티에선가 봤던 사람이겠지 싶어 대충 응수한다. "어, 안녕. 너는 어떻게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집 갔다가 이제 온 거야?" 집? 웬 집... 하다가 얘가 아예 모르는 사람이란 걸 그제야 깨달았다. 얘는 대체 날 누구로 착각한 걸까? 우선은 그냥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나중에 보자는 인사만 남기고 걸음을 옮겼다. 하하, 밤베르크 내 새로운 고향. 모르는 사람조차 날 반겨주는 따뜻한 도시...


    싸늘한 방에 돌아와 캐리어를 내려놓으니 뭔가 맛있는 게 먹고 싶어졌다. 할슈타트에서 글뤼바인을 눈앞에 두고서 돈이 없어 사 마시지 못한 게 생각났다. 하지만 여행을 막 마치고 온 사람 집에 과일 따위가 있을 리가. 아쉬운 대로 방에 있던 와인에 설탕과 애플티 티백을 넣고 뭉근하게 끓여 글뤼바인을 만들었다. 방학 중 독일어 수업을 들을 때 담당 강사인 노버트가 글뤼바인은 11월 6일인가 그 후에 마시는 거라고 강조했었는데, 그 말은 어겼지만 어차피 이 정도는 글뤼바인으로 쳐주지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주도 해먹으려 냉장고를 여니 여행 전 사둔 스낵당근 한 다스가 고스란히 썩어 있다. 아까운 마음에 애써 멀쩡한 부분을 도려내니 손가락 두세 마디 정도가 겨우 나온다. 결국 저녁 겸 안주는 파프리카와 브로콜리, 세 마디어치 당근을 올리브유에 볶아 소금과 후추로 간한 야채볶음. 이번 여행은 끝까지 알차게 빈곤하구나, 생각하다가, 새삼 이번 여행이 정말 끝났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젠 여기, 밤베르크의 Judenstrasse의 기숙사 3층, 내 방이 내 새로운 집이구나. 돌아오면 (비록 쌍방착각이었지만) 누군가 나를 반겨주는 곳. 짐을 내려놓고 이제 여행에서 돌아왔구나, 생각할 수 있는, 내 여정의 종착지. 그렇게 생각하니 초라한 식탁도 나쁘지 않았다.


밤베르크 최고 경관을 자랑하는 내 방. 창밖으로 보이는 불빛이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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