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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Nov 02. 2020

파리를 떠나며

파리에서 밤베르크까지 12시간 55분이 걸린 여정

탑승 기회를 모두 소진한 시점의 유레일 패스

    5일 간의 여행이 끝나고 파리 동역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이용하는 건 유레일 패스. 이쯤에서 유레일 패스에 대해 설명하자면, 간단히 말해 한국의 내일로 같은 이용권이다. 다만 훨씬 스케일이 커서 유럽의 거의 전역을 이 패스 하나로 돌아다닐 수 있다고 보면 된다. 종류에도 여러 개가 있는데, 특정 국가 내에서만 이용 가능한 원컨트리 패스, 유럽 내 지역 거주자만 구매할 수 있는 인터레일 패스, 유럽 외 지역 거주자용인 글로벌 패스. 그 안에서도 또 유스와 일반권이 나뉘며 당연히도 만 27세까지만 구입 가능한 유스가 훨씬 더 저렴하다. 또 연속권과 셀렉트(플렉스)권이 나뉘는데, 연속은 말 그대로 개시일부터 n일을 이용 가능한 패스, 셀렉트는 개시일로부터 n개월 내 최대 n일 간 원하는 날짜에 이용 가능한 패스. 후자가 살짝 더 비싸다.


    내가 고른 건 글로벌패스 1개월 내 5일권 유스였다. 당시 진행하던 10%할인에 프리미엄 배송까지 해서 총 220유로를 살짝 웃도는 가격(배송비 제외했을 경우 194유로). 당연히 일찍 구매한다면 일일히 각국의 철도 사이트에 접속해 시간과, 때로 좌석까지 지정된 티켓을 구매하는 게 훨씬 저렴하지만, 나처럼 여행이 1주일 앞으로 닥쳐왔는데 아무 계획도 없던 사람에게는 출발일이 임박해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른 티켓을 하나하나 사모으느니 유레일 패스로 한번에 해결하는 편이 낫다.


    더군다나 유럽 열차는 틈만 나면 지연되는 만큼, 환승 시 열차를 놓치는 경우에 계획을 수정할 때에도 유레일패스 사용자는 그냥 아무 다른 열차에나 올라타면 되니 편하다. (유럽에서 연착으로 환승편을 놓치는 경우엔 역 사무실에서 새 경로를 지정해 무료로(혹은 약간의 가격을 얹어) 이용하게 해주는데, 번거롭기도 하고 역무원으로부터 한소리 들을 가능성도 높다. 내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떠났던 네덜란드에서 돌아오는 길이 그랬다. 출발은 오후인데 연착 및 경로 변경으로 도착은 다음 날 새벽.) 이동 경로는 EURAIL 앱을 깔아서 출발지와 목적지를 입력하면 확인할 수 있으며, 때로 열차 내 좌석 지정이 필요한 경우 추가금액 결제 사이트까지 안내해준다.


    나는 지나치게 여행 계획을 늦게 세운 죄로 독일로 직행하는 떼제베TGV는 매진, 유레일패스를 이용하지 않고 직접 예매한다면 편도가는 16만원에 육박하니 어쩔 수 없이 12시간이 넘도록 돌아돌아돌아가는 경로를 택했다. 유럽에서 기차여행 한번 찐하게 해본다는 생각으로.



    

파리 동역 근처에서 산 몽블랑과 까늘레

    동역에 도착해서 보니 열차 출발까지 시간이 50분쯤 남아있다. 마침 점심거리도 사야겠다, 파리의 디저트를 조금 더 맛보고 싶겠다 캐리어를 질질 끌고 오줌냄새 풍기는 거리를 지나 동역에서 조금 떨어진 동네 제과점으로 향했다. 몽블랑과 까늘레를 사들고 동역으로 돌아오니 어라. 화면에 뜨는 플랫폼 넘버가 보이지 않는다. 당황해서 다시 경로를 보니 어...... 동역이 아니라 북역 출발이다. 황급히 캐리어를 끌고 한 손에는 디저트가 든 상자를 들고 북역까지 달렸다. 왜 굳이 이렇게 만든 건진 모르겠지만 두 역이 바짝 붙어있던 덕에 한 10분 뛰니 북역이 눈앞에 보였다. 출발까지 남은 시간은 12분. 플랫폼에도 무사히 도착했다. 그날의 멍청지수 갱신.



겨우 잡아탄 기차 안에서

    벨기에행 지역열차를 타고 보니, 객실 안에 사람도 얼마 없다. 마지막 칸에 올라탄 덕에 기차 뒷꽁무니에 달린 창문으로 쭉 뻗은 길을 한참 볼 수 있었다. 나를 포함해도 고작 서너 사람이 내려선 프랑스 외곽의 조그만 동네 Aulnoye-Aymeries에서 환승하니, 이번엔 사람이 없다 못해 아예 객차 안에 승객이 나밖에 없다. 내 앞뒤에 딸린 객차도 사정은 마찬가지지 싶다. 승무원이 와서 유레일 패스를 체크하고 가자마자 사둔 디저트를 갉아먹었다. 살 때 포크를 달라는 걸 깜박해서 (애초에 가게에 일회용 포크가 있긴 했으려나?) 추잡하게 상자 째로 들고 갉갉 하는 수밖에 없었다.


    1시가 넘어 도착한 두 번째 환승지는 벨기에의 작은 도시 몽스Mons. 환승 대기 시간은 1시간 반. 역사 내에 코인락커도 따로 없는 것 같길래 캐리어를 질질 끌고 도로를 건너, 위로 뻗은 언덕길을 올랐다. 길 끝에 대성당이 하나 있다. 앞에 꼭 소녀상처럼 보이는 거대한 동상이 있는데다가, 성당에 들어서니 EU기와 오스트리아, 벨기에, 프랑스 국기가 차례로 걸려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도시에 얽힌 역사가 꽤 깊은가 싶다.


Saint Waltrude Collegiate Church 라는 이름이라고 한다.


    성당은 조용하고 아름답다. 캐리어를 계속 끌고다니기 눈치 보여 입구 근처에 세워두고 둘러보았다. 긴 회랑 끝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종교화가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난다. 몇 없는 관광객은 서로 조용히 속닥거린다. 잠시 성당 안에 앉아있다가 종탑처럼 생긴 기념비 옆을 지나 언덕 아래로 내려가면 시청 앞으로 그랑 플라세(Grand Place. 정확히 어떤 언어로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불어로 읽어야 하나? 아님 독일어?)라는 이름의, 이름답지 않게 조그만 광장이 나온다. 광장을 둘러싼 가게마다 파라솔 테이블을 내놓고 관광객 유치에 바쁘다. 사람들이 날 빤히 쳐다보는 것, 주민인 것 같은 남자가 옆에서 따라오며 말을 거는 것 (톤이 부드러웠으므로 아마 플러팅이었거나 언덕길이니 캐리어를 들어주겠다고 제안했던 것 같은데 불어라 알아들을 수 없었다)을 보면 동양인 거주자가 전무하다시피 한 건 물론이고, 동양인 방문객도 거의 없는 모양이다.



    온갖 국적의 깃발이 만발한 시청 건물을 통과하자 숨겨진 뜰이 나온다. 하늘엔 양털 모양의 구름이 떠다니고 바람에 나뭇잎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시원하다. 시간이 아슬아슬하게 남을 때까지 벤치에 주저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몇몇 사람들이 누가봐도 이 도시에서 마주친 동양인이 신기해서 말 걸어보고 싶은 눈치였다) 열차 시간이 20분쯤 남았을 때 다시 캐리어를 끌고 뛰었다. 이럴 거면 그냥 적당히만 쉬고 천천히 걸어가면 좋았을 텐데 나는 항상 바보짓을 한다. 지나치는 곳마다 깨끗한 골목이나 반듯한 벽돌집을 보면 건실한 중산층 '정상가족'들이 많이 살 것 같은 모양새의 동네다.


    탑승시간까지 간발의 차를 두고 환승 플랫폼에 도착했지만 늘 그렇듯 유럽의 기차는 연착을 반복하고. 20분이 지나서야 열차가 왔다. 2시간을 더 달려 도착한 세 번째 환승지는 벨기에 동쪽 끝에 붙은 리에주Liege의 Liège-Guillemins역. 역 건물부터 크고 새로 지은 티가 팍팍 나는데, 둘러 보니 도시 전체가 현대적인 느낌을 물씬 풍긴다. 강변에 거대한 함선처럼 생긴 높은 통유리 건물(검색해보니 세무서라고 한다)이 보이는 것도 한몫 한다. 서유럽의 도시들은 하나같이 낡은 줄로만 알았는데 예상 외다. 캐리어를 끌고 강변으로 나가 잘 정비된 산책로를 걷는다. 역시나 보기 드문 동양인 여자에게 주민들의 시선이 몰려들지만 여행지에서라면 이 정도는 별 생각 없이 넘길 수 있다. 강물은 폭이 넓고 햇살 아래 짙은 푸른색으로 넘실거린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가족이 여럿 보인다. 평화롭다.


리에주의 뫼즈 강변


    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터키음식점에 들러 3.5유로짜리 피쉬버거를 테이크아웃 했다. 왜 되너를 포함한 수많은 맛있는 음식을 두고 하필 그걸 골랐는지 나도 이해가 안 가지만 그때는 흰 생선살이 땡겼다. 동네 맛집인지 손님들이 여럿 있다. 프랑크푸르트행 열차를 또다시 아슬아슬하게 잡아 타니 열차 안은 만원. 연결칸과 화장실 앞까지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나도 어쩔 수 없이 출입문 앞에 주저앉아서 피쉬버거나 먹는다. 먹으면서는 역시 되너를 고를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하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뷔르츠부르크로, 뷔르츠부르크에서 다시 밤베르크로 환승에 환승을 거듭해 도착한 밤베르크는 밤 10시 40분. 피로한 마음으로 캐리어를 끌고 기숙사까지 걸었다. 지친 상태이지만, 덜컹거리는 벽돌로 포장된 중세풍 길이 반갑기도 하다. 캐리어 바퀴가 울퉁불퉁한 벽돌 틈에 걸려 덜덜거리는 소리를 내내 내는 건 어그로지만 (여담인데 적당한 높이의 힐을 유럽에 두어 개 가져갔지만 도보 사정이 안 좋아 한번도 신어보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가 한 주 전 할슈타트에서 사 온 맥주를 먹었다. 맛없었다.


밤베르크, 루이트폴 다리

    다음 날은 밤베르크 대학의 정식 개강일. 수강정정을 위해서는 원하는 강의마다 출석해 OT를 들어야 했지만 내 생각과 달리 몸이 많이 피로했는지 늦잠을 자 점심 때가 되어서야 일어나 그날의 청강은 모조리 포기했다. 그 여파로 한 학기 내내 고작 (환산 시) 12학점이 조금 넘는 정도의 수업밖에 건질 수 없었지만 어쩌겠어. 파리에서 돌아오는 루트가 당시엔 그것밖에 없었고 돌아오니 피곤했는데. 어쨌든 나는 나의 선택의 결과에 불평하거나 지나치게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는 나의 멍청함에 익숙해졌다.







    나는 내 멍청함과 더불어 오랫동안 잘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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