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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Jan 11. 2021

바다가 들리곤 했다

하지만 너에게 길을 묻지는 않았네*

2015년, 수능을 앞둔 11월에 찍은 사진.


    어릴적 종종 방문하곤 했던 이모의 집은 차로 30분 거리. 마치 한반도 끄트머리에 붙은 조그만 반도마냥 시에서 외따로 떨어진 독특한 동네에 있었다. 현대 전 회장의 돈으로 깔아 그의 호를 따 이름 지었다는 진입로 초입에는 회장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담은 안내문이 전광판처럼 커다랗게 붙어있었고, 바다를 향해 트인 도로 한 면으로는 현대중공업이니 현대자동차니 하는 대기업 공장단지와 어지간한 아파트보다 높은 거대한 선박이 들어 차 있곤 했다. 그 옆으로, 햇볕 강한 날 교장선생님 훈화말씀을 들으러 모인 초등학생처럼 반듯하게 한 줄로 늘어선 조그만 자동차들.


    그곳은 바다와 맞닿은 까닭으로 늘 바람이 강하게 불어, 열어놓은 현관문은 매번 혼자 큰 소리를 내며 닫히곤 했다. 공기 중에는 언제나 희미하게 짠내 섞인 바람이 맴돌았다. 가끔 그 집에서 자고 가는 날이면 창문 너머로 보라색 밤하늘을 볼 수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아가는 공장단지의 불빛이 바다에서 피어오른 안개에 갇혀 뿌옇게 반사된 것이었을 텐데, 초현실적인 광경에 내가 창밖을 손가락질해도 태어나 그곳에서만 자란 사촌언니는 하늘이 왜? 하는 눈으로 돌아볼 뿐이었다.


    이모는 자주 이사를 다녔다. 입주 후 한 달을 꼬박 채우기 전에 새 집으로 옮겨가는 일도 다반사. 놀러갈 때마다 집의 위치와 구조가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오타쿠인 사촌언니는 당시만 해도 손그림이나 인쇄한 아기자기하고 눈 큰 그림들을 코팅지로 감싸 오린 것일 뿐인 부산코믹월드 굿즈들이나 아크릴 키링 같은 것을 잔뜩 가지고 있었고, 이모부와 사촌오빠는 무협지 같은 걸 대여점에서 빌려다 쌓아두곤 했다. 나도 당시엔 용돈을 모조리 대여점에서 장르소설 빌리는 데에 쏟아붓던 초등학생이었지만 이모부의 재력에는 비할 바 못 되었다. 하지만 나는 세월의 돌과 겨울성의 열쇠, 드래곤 라자부터 시작해 양산형으로 이어진 판타지와 가벼운 무협물, 초기 게임판타지물을 좋아했던 데 반해 그들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하렘물만을 좋아해서 대화는 언제나 방향이 조금씩 어긋나 있곤 했다.


    언젠가 이모가 이사하기 직전 놀러갔던 기억이 난다. 한낮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이었고, 나보다 한 살이 많은 사촌오빠도 고작 초등학교 4-5학년쯤 되었으려나. 그러고보니 너 현지한테는 이사간다고 말했어? 하는 이모의 물음에 사촌오빠는 덤덤하게 응, 이제 말해야지, 하고 얌전히 간식을 먹더니 방으로 들어가 전화를 걸었다. 저 태식인데요, 현지 집에 있나요? 네, 감사합니다. 응 현지야, 나 태식인데 우리집이 이제 이사를 가거든. 학교도 전학을 가야 한대. 응, 그럴 것 같아. 응, 너도 잘 지내고.


    대화가 끝나고 나서야 아, 지금 통화한 현지가 오빠 여친인 거구나, 깨달았다.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애인과 저렇게 끝내도 되는 건지, 그럴 수 있는 관계란 무엇인지,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저런 게 어른의 세계인가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2015년, 차를 타고 지나치던 중에


    그 동네는 조금만 높은 지대로 올라서도 수평선이 보이는, 바다로 둘러싸인 동네였지만 정식 해수욕장이라곤 하나밖에 없었다. 모래사장이 반달모양으로 움푹 패여선 오른편으로는 브로콜리 머리 같이 녹색으로 부풀어오른 근린공원이, 왼편으로는 멀리 공장단지가 보이는 곳. 우리가 버석버석한 모래 알갱이를 밟고 다니며 모래성을 쌓고 구덩이를 파고 물장난을 치는 동안 어른들은 그 앞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앉아있곤 했다. 바닥에는 거친 자갈이 깔려 있고, 안이 들여다보이는 유리탁자 안은 조그만 소라고동 같은 것들로 채워진 데다가, 파는 메뉴라고 해봐야 커피나 레모네이드 같은 것들이 전부인 소박한 옛날 카페. 이름도 바다가 들린다였던가, 감상적인 문장이었다. 날이 흐려져 젖은 몸이 으슬으슬할 때면 그 안에서 전기난로로 몸을 데우곤 했는데.



    유년기의 그 동네는 이모의 동네, 바람이 세게 불고 밤하늘 빛깔조차 다른 남의 동네.

    아빠가 돌아가시고 꼬박 1년이 다 되어갈 무렵, 우리 가족은 그 동네로 이사를 갔다.





2014년, 토요자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중학교 막바지의 기억은 그리 좋게 남아 있지 않다. 아빠가 돌아가신 것도 그랬지만, 언니와 엄마가 서로를 죽일 듯이 싸우고 때리고 욕하고 붙들고 울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힘겨웠고, 엄마는 일을 제대로 나가지 않았고, 그 안에서 내가 이제야 중학교에 입학하는 미운 동생 하나를 데리고 일상을 지속해야 한다는 게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위태로웠고, 그런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 버거웠다. 점심 땐 배가 고파도 일부러 밥을 먹지 않았는데, 그건 새로 친구를 사귀기 어려웠던 것도 있지만 그냥, 먹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다. 내게 문제가 있다는 걸, 내가 힘들다는 걸 겉으로 드러내고 싶은 마음과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공존했다. 눈에 띄지 않게 눈에 띄고 싶었고, 점심을 거르는 건 그에 부합하는 아주 사소한 반항이었다. 그런 식의 자기학대를 통해 조금이나마 일상을 견뎌낼 수 있기도 했다. 모기에 물린 게 가려울 때 그 자리를 꼬집으면 더이상 가렵진 않은 것처럼.


    아빠가 죽었다는 게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데, 현실감 없는 채로 그런 현실에 적응해 살아간다는 게 이상한 일처럼 느껴졌다. 계속 아빠를 생각했고 그럼으로써 내가 불행한 이유와 불행해야만 하는 이유를 끊임없이 되새김질했다. 깨어있는 동안 종일 음악을 틀어놓는 습관이 든 것도 그즈음이었다. 흰색 구식 이어폰을 분홍색 롤리팝2에 꽂고 꽂고 휴대폰에 잔뜩 넣어둔 mp3를 재생하며 집으로 걷는 길에,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으로 넘어가는 그 잠깐의 공백을 견디는 게 버거웠다. 그러니까, 자꾸만 이게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일을 유예한 결과로, 나는 내 의식의 통제를 조금이라도 놓는 순간, 나의 의식과 단둘이 남겨지는 순간 내가 무너져버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아주 잠깐이라도 나를 혼자 남겨두면 내가 그런 생각들에 잡아먹혀 버릴 것 같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철저하게 감상적으로 아빠의 죽음을 애도하고 싶었고 그런 나를 전시하고 싶었고 동시에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안전한 때가 오면 그때는 마음놓고 슬퍼할 수 있겠지, 그런 기분으로.




 


2016년 초, 대학교 입학을 앞두곤 종종 겨울바다에 산책을 나갔다.


    이사를 가며 처음으로 살아 본 아파트인 신축 휴먼시아는 13층이었던가. 거실 창문 너머로 멀리 바다가 보였다. 정오가 되면 해수면이 하얗게 반짝거려 눈이 부시다 못해 자꾸만 감기는 곳. 어릴 적 놀던 해수욕장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 오래 전 이모네 집에서 경험한 것처럼 거센 바람에 현관문이 덜컹거렸고 여름에 문을 열어두면 화분이며 가구가 멋대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지곤 했다. 소금기와 습기 어린 바람에 모든 것이 일찍 녹슬었다. 지독한 해무도 자주 끼어서 사방이 온통 하얘질 때면 꼭 방역차를 쫓아다니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5m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은 두터운 안개 위로 석양이 내려앉으면 온 세상이 보랏빛이며 핑크빛으로 화사하게 물들었다.


     중학교 생활도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새벽이면 늘 밤을 지새웠다. 엄마가 잠들었을 즈음 몰래 거실로 나와 컴퓨터를 하거나 음악을 들었다. 층고가 꽤 높았지만 모든 것이 조용해지는 시각에 귀를 기울이면 아파트를 휘감은 도로 위의 차 소리가 들렸고, 휘이잉, 하고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Blue Christmas라고, 그 해에 김연수 작가와 푸른새벽이 함께 낸 단편소설집 겸 앨범이 있는데, 그 수록곡을 자주 들었다.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새벽이 끝나기 전까지만,

        거기 깊숙히 담아뒀던 것들 날숨과 한숨에 실어 보내.**


    새벽 네 시, 아파트 단지의 창문들마다 불이 꺼져도 밤하늘은 어릴 적 보았던 것처럼 짙은 보라색이었다. 찬 기운이 스민 창틀에 걸터앉아 멍하게 한희정의 목소리를 듣고 짧은 소설을 적어내리곤 했다. 하나같이 결말을 비워두거나 체념하면서 끝나는 내용이었다.


(...) 그러고 나자 조그만 소리도 빈 방에서 크게 울렸기 때문에, 여자는 매번 그것들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불현듯 냉장고가 토해놓는 웅웅거리는 소리, 시곗바늘 돌아가는 소리, 이따금 희미하게 들리는, 툭, 하고 무언가 느리게 무너져가는 소리─ 한참을 듣다 보면 그 의미 없는 소음들은 여자의 내부에서 서서히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가… 그녀가 그것들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뼈저리도록 비참해지곤 했다. 어느 날은 초침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자는 그 날도 울었다. 시계에 약이 떨어질 때가 되었지만 갈아주지 않았고, 어느 날 아침에 보니 초침이 멎어 있었다. 여자는 박제된 짐승 같은 그것을 방치하기로 했다. 멈춘 시각은 날이 갈수록 부패해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여자는 참다못해 그것을 떼어 부엌 싱크대 아래에 넣어버렸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 물이 흘러내려가는 소리를 듣다가, 여자는 고무장갑을 벗고 다이어리에 글을 적었다.

겨울. 쓰지 않을 시간이 썩어가는.
 

(...)


그녀의 말들은 모두 그녀가 버린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녀 또한 그녀의 말들에게 외면받은 것이기도 했다. 외로울 때면 다이어리를 꺼내 다시는 읽어보지 않을 일기를 썼다. 두 번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나날들이었다.


    그런 시간은 내게 어떤 양분으로 남아 있는 걸까.





한여름날 저녁, 쇠락한 항구 옆을 지나다가.


    고등학교, 야자가 끝나는 10시가 되면 혼자 텅 빈 밤거리를 걸어 귀가했다. 2차선 차로 옆으로 좁은 도보는 오래된 아파트단지를 지나 자주 꺾이거나 언덕배기를 휘감거나 사람이 찾지 않는 늙은 항구로 내려앉곤 했다. 사부작대고 속닥대는 소리 가운데서 입 꾹 다물고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 야자시간도, 돌아가 가족들을 마주하다 같은 방에서 잠들어야 하는 집도 끔찍하게 숨막히는 가운데 그 시간만이 유일하게 내가 혼자가 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좋아하는 노래를 크게 틀고서 오래 걸었다.


    그 길에선 가끔 내 엉덩이며 가슴을 태연하게 움켜쥐었다가 휘적휘적 갈 길을 마저 걸어가는 중년 남성들과 술 취해 아무데나 욕설을 내뱉는 청년들을 마주하곤 했다. 그래서


    그 길도 온전히 나의 것은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항구에서 수평선 너머를 바라볼 때는 그 어느 때보다 갇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침, 등교하는 버스 창문 너머론 건물들 사이로 수평선 위 어드메에 올라선 태양이 보였다. 모의고사가 끝나고 일찍 마치는 날이면 학교 옆 손바닥만한 모래사장에 앉아 파도 치는 걸 한참 바라보곤 했다. 늦은 오후, 저무는 햇살에 황금빛으로 넘실거리는 파도, 바다. 푹 젖은 모래 위로 내 발자국과 알지 못하는 타인의 발자국들이 겹쳐졌다가 파도에 쓸려 지워졌다.


    견디지 못하는 것들이 많아질 때, 모래사장 위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볼 때 내 속에서

    폭발할 데 없던 울분들. 쓸려나가는 파도를 따라서 무언가 (어쩌면 내가) 

    함께 사라지길 바랐던 마음.


    내가 그 자리에 버리고 싶었던 것들은 나를 외면하기는커녕, 재차 밀려오는 파도에 다시 쓸려오곤 했다.

    버릴 수 없었다.



    아직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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