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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Sep 03. 2020

그 시절, 내가 사랑하던 것들

좋아한 기억들은 너무도 금방 흐려진다.

    좋아한 기억들은 너무도 금방 흐려진다. 고작 스물 네 해밖에 안 되는 삶을 반추해보면 종종 아연해지곤 한다. 아니, 내가 이런 사람을 좋아했었어? 좋아할 때면 내 온 일상이 그 사람을 추 삼아 넹글 돌아버리는데, 나중에 보면 이름을 듣고서도 아 그런 사람이 있었지, 하는 생각을 뒤늦게야 떠올리는 지경으로 싹 잊어버리고 만다.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까지 매정한 사람은 아니고. 그냥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있고, 나는 종종 나를 불연속적인 존재로 인식할 따름이다. 이 사람을 아주 좋아하던 때가 있고 저 사람을 아주 좋아하던 때가 있는데 그 사이사이의 이음매가 어쩐지 덜컹거린다.


    중학교에 막 들어갔을 무렵에는 온다 리쿠의 으시시한 이야기들을 좋아했다. 어쩐지 생리적인 불쾌함을 일으키기도 하는, 이야기 자체에 관한 이야기들. 그 뒤에는 미야베 미유키의 모든 소설을 좋아했고, 중학교 3학년 때에는 폴 오스터와 김연수였다. 어쩌다 넘어간 건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달의 궁전" 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읽다가 오스터에게 푹 빠져버린 것 같다. 중학교 3학년 1년 동안은 학교 도서관과 내가 사는 구, 그리고 옆 동네까지 넘어가서 다른 구립 도서관까지 도서관 3개를 종일 돌며 책을 긁어모아 읽기만 하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이 두 사람의 책은 좋아했는데, 대학교에 들어오고 얼마 안 되어 나는 내가 더이상 이 두 사람을, 특히나 오스터를 좋아하지 않으리란 것을 깨달았다. 별 계기는 없고 그냥 자연스러운 순서로 더이상 이런 남자의 소설을 읽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다 늙은 남자가 청년의 시점에서 쓰는 뭐랄까, 오줌 지린내 풀풀 풍기는 이야기. 그때는 인생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더이상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 너무도 남자의 이야기.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건 이런 것이었다: 그의 자서전 격인 책도 몇 권 읽었는데, 그 어딘가에 (유부남인) 그가 성병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 묘사가 몇 년이 지나도 기억에 남을 만큼 징그러웠다. 너무 가려워서 들여다봤더니 그의 성기 주위에 난 음모 사이사이로 벌레가 돌아다니고 있었다나.


    물론 오스터의 말로는 성병 사건 및 가족을 태우고 차 사고를 낸 사건 이후로 술을 끊고 가족들에게 속죄하며 살았다고 하지만... 애초에 아내와 아이를 두고 성병에 걸렸다는 것부터 이해가지 않는데, 그 벌레들이 알을 깔 때까지 이 사람은 대체 무엇을 했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서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그럼... 이 사람은 성기를 안 씻는 거야? 안... 씻어? 손도 안 씻겠지...? (사실 네덜란드에서 카우치서핑으로 유쾌한 중년 남성의 집에서 며칠 머무를 때에도 내내 그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사람이 화장실에 들어가고 나서 물기 없는 손으로 나왔는데... 우리 악수를 여러 번 하지 않았나...? 내 저녁도 술도 이 손으로 만들어 준 거...잖아?)


    거기에 아름다운-하지만 약간의 흠이 있는-신비로운 여인과의 로맨스. 매번 나오는 창녀와의 믿지 못할 한 때. 내가 고등학생 때 번역되어 나온 그의 신작에서는 한 청년과 미성년자 소녀와의 사랑 이야기를 마치 법이 그 둘을 가로막는다는 듯 쓰지 않았던가? (그건 어느 정도 메타하게 청년의 지질함을 까는 내용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기에는 오스터가 너무도 주인공에게 이입한 듯 읽혔다) 그걸 생각하고 나니 더이상 좋아할 수 없었다. 그때는 잘 모르기에 견뎌냈던 "으른의 세계"에서 풀풀 풍기는 수컷 냄새가 이제는 너무도 역겹다.


    3학년이 된 첫 학기에 휴학을 했을 때, 지루하던 나머지 집에서 가져온 폴 오스터의 "환상의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한두 챕터도 채 읽지 않아서 나는 내가 이전에는 그토록 좋아했던 이 소설을 더이상은 전과 같이 읽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시 읽고 나면 이 책에 가지고 있던 일말의 애정마저 잃어버리게 되리란 것도. 같은 이유에서 김연수의 소설도 읽지 않는다. 그의 이야기를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더이상은 젠체하는 운동권 출신 남자의 말장난하는 듯 비꼬는 듯 지적으로 유희하는 이야기를 읽고 싶지 않으므로.


    나는 내가 원하는 만큼 극렬 페미니스트는 아니고 오히려 "빻았다"고 요약할 만한 남자들과도 그럭저럭 잘 지내며 그들의 좋은 면을 발굴하려 애쓰는 편이다. 남자를 "버릴" 수 있을 만큼의 양심도 능력도 없고 유니콘남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홀린 듯이 예쁘고 !비쩍 마르고! 조용한 유니콘남 후보들을 보곤 한다. 하지만 그냥, 이제는 그들을 좋아하는 게 불가능해진 내가 있다. 수컷의 세계를 이해해보고 싶던 청소년기의 내가 있고, 쏜애플을 들으며 위안을 얻던 수험생인 내가 있고, 샤오잔의 얼굴을 보며 힐링하던 교환학생 시절의 내가 있는데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닐 뿐이다. 언젠가 다시 뒤돌아 보며 그 사이 사이의 '이음매-나'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볼 일도 있겠지만... 글쎄, 적어도 당분간은 그러지 않을 듯싶다.


    마음은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조차 쉽게 가지 않다가 덜컥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붙들려 버리곤 한다. 그리고, 김연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렇게 "빠졌던" 사랑에서 기어나오는 사이에 나는 내가 가진 것 중 몇 개를 잃어버리고, 조금 더 지친 채로 사람들을 보게 된다. 나는 그렇게 계속 변하고, 변해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건 쏜애플 보컬을 "벼리"라 부르던 창피한 내 자신과 폴 오스터가 쓰는 창녀와의 하룻밤 씬을 인간적인 대작가의 훌륭한 글로 읽으려 애쓰던 안쓰러운 나와, 샤오잔을... 솔직히 샤오잔은 철저하게 얼굴 보고 좋아한 거니까 뭐라 할 수가 없네. 하여튼 그렇게 철저하게 얼빠이고 말던 한숨만 나오는 나이기도 하니까, 그 시절 내가 사랑하던 것들이 나를 배반하는 순간들을 견뎌내고 기억하고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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