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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Apr 05. 2021

얼레벌레 취뽀한 후기

예? 제가 왜 붙었어요?

    약 2주 전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는 밝은 당근색 후드를 뒤집어쓰고 답십리까지 가서 당근마켓 직거래를 마치고 어깨에 7000원짜리 거대한 커피메이커가 든 종이가방을 짊어지고 있었고 (걸어다니는 당근이세요 였다고 자부함), 언니와 전화로 어떤 원두를 살지 의논하던 중이었다. 스타벅스 앱을 켜서 원두 목록을 훑어보는 중에 화면 위로 새 메일이 왔음을 알리는 배너가 떴다.


안녕하세요? (JUNE) 님.
(어쩌구저쩌구) 인사팀입니다.

좋은 분과 좋은 인연으로 함께 일을 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앞으로… (더보기)


    예?







    그렇다. 나한테 직장이 생겼다.


    기쁨보다 황당함이 앞섰던 이유는 최종면접을 개 말아먹었기 때문인데, 어쨌거나 처음부터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 보자면 일단 나는 취준이라는 걸 할 마음가짐부터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졸업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휴학을 했는데 반 년 동안 아무것도 안 하다가 두 달 전에야 갑자기 위기감이 들어서 자격증을 땄고(심지어 컴활 1급은 필기만 따고 실기는 시작도 안 했음) 인턴 지원을 넣어봤고, 다섯 군데 넣었을 때 갑자기 한 곳에서 서류합격이 났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의 이야기에 구구절절 적은 내용)


    서류가 붙은 곳은 대기업 계열사였고, 전환형 인턴이었다. 변변찮은 인턴 경험이나 직무 교육 이력조차 없는 내 스펙으론 기적적인 일이었는데, 아마도 어문학과를 다닌다는 사실이 디메리트가 되지 않는 몇 안 되는 산업+직무이어서였거나 포트폴리오에 들인 노력을 갸륵히 여기셨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1차 면접 준비한다고 난리를 치고 다니다가 (새 파데와 두 개의 새 아이섀도우 팔레트와 헤어 스프레이 등을 샀고 면접을 진행할 장소까지 모든 화장도구와 스탠드 램프와 고데기와 멀티탭, 노트북, 기타등등을 짊어지고 다님) 눈 안쪽에 염증이 생겨서 한쪽 눈으로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면접을 봤다. 다행히 화상면접이라 눈물콧물은 덜 보였을 것이라고 믿는다.


    다행히 1차 면접에 합격했고 (이때는 슬쩍 합격을 기대하긴 했다. 다대다 면접이었는데 그 조의 면접자들 중에선 내가 제일 나았다고 생각했고, 내가 답변하는 동안엔 면접관 분들이 유난히 고개를 자주 끄덕이고 리액션을 보여주셨으므로) 면접이 있는 주부터 최종면접 준비에 돌입했다. 사실 뭘 준비해야 할지는 잘 몰랐다. 어차피 1차 때 준비할 건 다 했으니까. 그래도 자소서와 포폴을 해부해 가며 예상질문과 답변을 더 짜냈고, 자기소개 및 미리 예고된 질문 답변을 외웠다.


    그리고 최종면접 (역시나 화상면접) 당일. 면접은 자율복장이라지만 셔츠에 정장 재킷을 걸치고 머리도 사이드뱅까지  뒤로 넘겨서 묶었는데, 더울까봐 히트텍을 벗었다가 오한이 들어서 면접 시작 전부터 덜덜 떨어야 했다. 면접 기분을 내겠다고 평소엔 입지도 않고 화면에도  보일 짧은 H 스커트에 얇은 스타킹을 신어서 더욱 추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면접이 시작되었고, 나는 자기소개를 하는 순간부터 노선을 잘못 잡았다는  깨달았다. 1 면접에서처럼 지원동기나 관심수준을 강조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괜히 업무랑 연관성도 적은  자랑을 해서 "그런 능력을 한동안은 써먹을  없을 텐데?" 하는 질문을 받았다. (그래도 답변은  능력 자체보다  능력을 키운 성장 과정을 강조하고 싶었던 거라고 대답했다.)


    첫번째 질답이 진행되었고, 내가 답변을 마치자 면접관으로부터 "많이 긴장하셨나 봐요" 라는 말이 돌아왔다. 사실 그 전까지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 갑작스럽게 내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의식되기 시작했다. 물컵을 잡는 손이 떨리는 게 보였으며, 머리가 고장난 것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계속해서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으나 예상한 질문이라곤 하나도 나오지 않았고, 전반적인 삶의 태도와 특정 상황에서의 대처를 물을 뿐이었다. 그나마 준비해 간 답변을 응용할 수 있는 질문에는 긴장해서 엉뚱한 답을 했다가 구체적인 경험 예시를 들어달라는 말에 침몰했다. 그 와중에 함께 면접을 본 지원자 (이번에도 다대다 면접이었음)의 답안은 모범 그 자체였다. 듣고 있다 보면 다음 답변을 준비하기는 커녕 머릿속을 휘몰아치는 잡생각을 주워담기에 바빴다.


    '어 나도 저 이야기를… 해야 했는데… 지금 하시고 계시네……?' '아 이 질문엔 딱 저런 이야기를 하면 됐었지… 나도 저거 준비했었는데 방금은 왜 그런 대답을 했던 거지……' '와 이 분 나랑 캐릭터도 겹치는데 심지어 말 엄청 잘하시네……'


    개망했다.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도저히 착잡해진 얼굴을 숨길 수 없었다. 아무리 망했어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수습해야 하는데, 그걸 알면서도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서 허탈한 마음만 들었다. 대답은 계속해서 버벅거렸고 경험을 떠올리는 데 실패했으며 답변에 사족을 덧붙여서 안 그래도 망한 답을 더 말아먹었고, 아무리 해도 적절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질문과 포인트가 어긋난 답만을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꺼내놓게 되었다 (답변을 하면서도 이게 면접관들이 원하는 답변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 처참한 기분이었다).


    심지어는 일부분 미리 예고된 질문(업무 관련 질문으로, 자료 분석 및 처리 방안에 관련된 질문)에 답할 때도 앞선 면접자의 완벽하고 참신한 대답을 들으면서 내가 대충 생각만 해둔 처리방안은 얼마나 나이브하고 하나마나한 소리였는지 깨달아버렸고, 결국 즉석에서 아무말이나 지어내 덧붙였는데, 정말로 아무말이라 내가 횡설수설하는 동안 면접관분들 얼굴이 싸늘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준비성 부족한 것도 모자라 대처능력 제로인 것까지 티를 내다니? 면접이 진행되는 내내, 1차 면접을 함께 진행했고 당시엔 리액션을 잘 주셨던 면접관님이 내 답변을 들으며 '납득불가' 표정을 짓거나 고개를 내리고 무표정을 유지하는 걸 보면서 확신했다. 망했다. 이건 구제할 수가 없다.


    압박면접도 아니었다. 오히려 면접관들은 긴장을 풀어주려고 최대한 노력하셨는데, 그런 편한 분위기에서 나는 혼자만 삐걱거렸고 다른 면접자에 비해 준비도 부족했다. 즉각적인 상황 대처도 엉망이었고 면접 중에 절망한 티를 팍팍 내기도 했으니… 붙는다면 그게 기적이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어설프게 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너무, 너무너무 쪽팔렸다.


    면접이 끝나고 나는 터덜터덜 아르바이트 근무지로 돌아가 편의를 봐주신 담당자분께 면접을 말아먹었음을 고지했고, 스탠드등과 화장품 따위로 무거운 가방을 다시 짊어지고 집으로 향했다. 맛있는 거 먹고 술 마시며 기분 풀라는 조언에 집 가는 길에 마트에서 샹그리아를 사고, 배달로 캘리포니아 롤을 주문했지만 도저히 입에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았다. 먹을 수 없었다. 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맛없어도 술이라면 일단 마시고 보는 편인데, 숙취가 심한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술이 안 들어간 날도 처음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면접이 끝나는 바로 그 시점에 생리가 시작되었고, 생리통이 너무 심해서 다음날은 물론이고 주말 내내 허리를 부여잡고 드러누워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개망한 면접의 기억과 싸워야 했다. 내가 한 답변 하나하나, 보인 태도 하나하나가 너무도 수치스러웠다. 괴로웠다. 어딜 가나 이런 초라한 나 자신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건 올라오는 인턴 공고의 수도 슬슬 줄어드는 시점에, 다른 기업 지원을 포기해가며 이 기업에 이미 3주를 넘는 시간을 쏟아부은 상황이었다. 내가 여기서 최종면접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도 어디까지나 산업 특수였던 것 같은데 여기 아니면 날 받아주는 데가 어디에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리고 어디든 또 최종까지 가봤자 이따위로 긴장해서 망쳐버릴 것이 뻔한데 내가 과연 어디에 갈 수는 있으려나 싶었고, 스스로 너무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미래가 무섭고 불안했다.


    하기야 나는 취준 생활을 거의 안 해보긴 했다. 어떤 어떤 직무가 있는지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고, 커리어를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도, 어떻게 회사의 가치와 미래 안정성을 알아보는지도 몰라 막연히 대기업이면 좋겠거니 생각할 뿐이다. 지원도 몇 군데 안 해봤다. 직장생활 같은 건 전혀 모르고 사회가, 산업이, 직장이 돌아가는 생리도 모른다. 심지어는 취준용 증명사진조차 없어서 2년 전에 그런 대로 잘 찍어서 가끔 증명사진용으로 쓰는 여권사진만 돌려쓸 뿐. 그런데도 합격을 바란다면 그건 정말 양심없는 짓 같다고 생각했다. 좋은 결과를 바라기에는 내가 한 고생의 총량이 너무 부족했다. 그러니까… 나는 떨어질 것이며, 그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미 떨어졌다고 생각하면서 조금씩 마음을 추슬렀다. 면접이 끝나고 다음 주 월요일, 정말 가고 싶었던 스타트업이 대규모 신입 채용 공고를 내고 있었으므로, 늦기 전에 자소서와 이력서를 준비하기로 했다. 미래가 불확실한 산업이었고 이후 커리어를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몰랐지만 정말 해보고 싶은 일이긴 했으므로 도전해볼 생각이었다. 그날 하루를 꼬박 바쳐 자소서 초안을 작성했고 화요일을 꼬박 바쳐 이력서를 꾸렸다. (힙한 걸 좋아하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스타트업이라 컨셉 잡아서 포폴 준비하듯 만들었다) 친구한테 과제 성격의 특정 문항을 한번 읽어봐달라고 부탁을 넣은 후, 저녁이 되어 나는 입고 있던 밝은 당근색 후드티와 함께 답십리로 나섰는데…


    그렇다. 최종 합격 소식을 들은 건 바로 그 시점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날 저녁 나의 머릿속이란 '와... 나 취직했다......' '아니 근데 왜 나를?' '와... 붙었네....' '근데 왜?' '어쨌거나 붙은 건 붙은 거 아닌가 좋아해야.... 아니 근데 왜?' 를 오가는, 즉 합격한 기쁨이 차지하는 비중이라곤 20%뿐이고 그보다는 '아니근데왜'가 80% 정도인 기묘한 상태에 놓였는데… 어쨌거나 아르바이트 근무지와 엄마한테는 뒤늦게나마 합격 소식을 전달했다. (엄마한테는 취준한다, 어디에 지원서 넣는다는 소리도 안 했기 때문에 난데없이 회사원이 되었단 소식에 어리둥절해 하셨다.)


그래서 축배를 들었다

    가장 먼저 축하해준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아니 근데" 가 튀어나오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합격 소식. 다음 날, 여전히 알바는 가야 하지만 어쨌거나 언니와 새벽까지 축하주를 마시고 (크엑걸 틀어놓고 내내 싱얼롱했음), 붙은 직장이 거리가 멀길래 근처 고시텔도 한번 찾아보고, 최종면접 말아먹었다고 징징거렸던 사람들한테 소식을 전하고 축하를 잔뜩 들었다. 정말 민망하고 쪽팔리지만… 너무 기만자가 된 기분이지만… 어쨌거나 업보 청산은 셀프니까.


하지만 걸리는 점이 세 가지 정도 있는데…




1. 근데 나는 진짜 왜 뽑힌 거야?


    또다시 기만하는 것 같지만, 그렇다. 나는 학점이 매우 좋다. 포폴은 내가 봐도 미친 퀄리티였고, 자소서는 분량을 꽉꽉 채워 진심을 눌러담았으며, 산업 이해도를 강하게 어필했다. 눈의 염증 때문에 얼굴 반쪽에서는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도 1차 면접은 그럭저럭 괜찮게 끝냈다. 하지만… 최종면접을 그렇게 말아먹었는데? 따뜻한 분위기와 긴장을 풀어주려 노력하는 상냥한 면접관분들 사이에서 혼자 덜더럳러덜덜 떨면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었는데? 답변도 제대로 못했는데? 같이 들어온 면접자가 완벽한 답변을 내는 걸 보면서 혼자 와시발망했다내가면접관이어도절대저분뽑는다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그정도 망한 사람이 구제될 만한 이유엔 대체 무엇이 있는 걸까?

    "보니까 애가 최종면접에서 실수도 많고 미숙해 보였지만 그래도…" 뒤에는 무엇이 붙을 수 있을까?


    학점이 좋았기 때문일까? 1차 면접에선 나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흥미와 열정과 절실함을 제대로 어필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쩌면, 그렇게 내가 성취하고 적극적으로 어필한 부분이 아니라 전혀 다른 요인, 나한테 이득이 되는 스테레오 타입이 끼어들었기 때문에 붙은 건 아닐까? 그러니까 단순히 '성적이 좋아서' 가 아니라 '그래도 ㅇ대에 다니면서 성적이 좋을 정도면 어지간히 성실하겠지' '지금은 별로여도 ㅇ대생이니까 그래도 기본 이상은 하겠지' '자율복장인데도 빡세게 차려입은 걸 보면 기본이 잡혀있구만' 같은 마음이 작용했던 건 아닐까?


    아마 최종면접까지 올라온 사람 중에 서연고에 재학 중인/졸업한 사람이 나 하나는 아니었을 것이다. 경쟁률이 치열했다고 하니 더욱 그렇겠지. 하지만, 혹시라도 나보다 괜찮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혹시라도 학벌이 밀려서, 혹은 장애가 있어서, (자율복장이라고 고지받은) 면접에서 머리를 묶지 않고 화장을 하지 않아서, 그런 수많은 사소한 이유 중 하나로 밀려나가지는 않았을지, 나는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존나 아무것도 아닌 학벌 가지고 과민반응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모든 것이 순전히 내 능력일 뿐이라고 착각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그래서 그런 고민을… 합격통보를 받고 일주일 쯤 혼자 하고 있었다.


    한참을 생각하고 나니 아마 고작 그런 이유는 아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의심을 굳이 의식에서 몰아내진 않으려 한다.



2. (짧은 시간이었지만) 취준은 정말 사람을 미치게 하는구나


    이 기업에 지원서를 넣을 때쯤 나는 굉장히 절박한 상태였다. 아침에 일어나 알바 출근 준비를 하면서 나는 왜 항상 이 모양일까 생각하곤 했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엉망인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번아웃이 온 18년도를 거쳐 독일에서의 무기력한 교환학생 시절이 지나며 나태가 너무 몸에 깊숙이 배어버렸다. 습관적인 게으름과 미약한 의지 탓으로 운동이든 공부든 인턴 지원이든 무엇이든 제대로 마음을 먹지도, 해내지도 못했고, 모든 성취감이 있는 종류의 일을 다음 번 언젠가로 매번 미뤄버린 까닭으로, 내가 무언가 하나라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나 자신에게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게 나아가는 노선에서 벗어날 용기는 없지만 적극적으로 그 길을 따르는 것 역시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2월 중순이 지나갈 무렵부터 그렇게 언젠가의 내가 해결해줄 거라 믿으며 어영부영 미뤄둔 일들의 마감기한이 다가오는 게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당장 해내지 못한다고 내가 "실패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그런 식의 꼬이고 어긋나고 유예되고 고착화된 미래를 완전히 남일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옆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모든 게 너무 늦은 것 같았고 나만 너무 대책 없었던 것 같았고 그랬는데… 붙고 나서 생각해보니…

    여자 신입 26도 이르다고 하는데 나 아직 스물 다섯이잖아?


    그렇게 생각이 들고 나니 뭐가 씌여 있던 것처럼 내가 돌아있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나는 아직 인턴이고 휴학중이면서 한 학기나 더 남아있기 때문에 전환 안 될 가능성이 높지만… 어쨌든 간에 그래도 문대 출신 스물 다섯 신입은 개오바 아님? 코시국이라 취직 잘 안 되는 거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걍 좀 더 놀아도 되지 않았을까… 나는 아직 스물 다섯. 이렇게 어리고 젊고 아무것도 모르며 심지어는 아직 마트에서 카트 하나 안정적으로 끌지도 못하는 인간인데… 맨날 카트 밀며 커브 돌다가 어디에 박는데… 어떻게 이 나이가 늦은 나이라고 생각될 수가 있었을까?


    취준 생활이 확실히 사람을 초조하게 만들고 돌아버리게 만드는구나 싶다. 절박하니까 사람이 너무 근시안적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나는 아직 뭣도 아니어도 되는 나이라는 것, 까먹지 않게 주의해야지.


    

3. 나 이제 예민하고 불안정한 10대의 기억 어쩌구로 뇌절 못 쳐?


    (방금이랑 정반대 얘기인 것 같지만) 이번 학기 개강이 가까울 무렵 나는 불현듯 내 나이가 벌써 스물다섯임을 깨닫고 식은땀을 흘렸는데……. 이제 어디 가서 아직도 청소년기에 겪은 억울한 일, 유년기의 상처 같은 것들 얘기하고 있으면 망한 어른의 길로 한 발짝 들어서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전까지 겪은 사회 구조적 문제 같은 것들을 아예 없었던 것처럼, 사회인으로 표백된 것처럼 싹 모르는 척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이제는 정말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한 발짝 더 가면 으이? 나 때는 말이야? 어? 세상이 불공평하구어쩌구? 하는 라떼형 꼰대가 되기 십상이니까.


    아직 내겐 못 다한 이야기가 많고, 아직까지도 마음속에 응어리진 일들이 많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때의 일을 상담 대신에 그냥 쭉 풀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그래도 뇌절은 적당히 쳐야지. 좀있으면 나도 피해자 세대보다는 그걸 개선해야 할 세대에 가까워지는데, 대학 졸업 전이라면 모를까 졸업하고도 그러고 있으면… 정말 망한 것임. 그러니까 할 이야기가 있다면 되도록 졸업 전에 호로록 다 풀어두고, 그 이후에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상담센터에나 가야 한다.


    지금까지 봐 온 수많은 뇌절 치는 어른들을 반면교사 삼아서, 나는 최선을 다해 내 모든 10대 시절 어쩌구저쩌구들을 빠르게 털어내버리고 싶다. 그 후에는 내 어린 시절 어려움을 토로하기보다는 지금 이 세대 청소년들의 어려움을 입 다물고 듣는 사람이 되어야겠지. 말처럼 쉬운 얘기는 아니고 나도 회사 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 급격히 꼰대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그리고 이렇게 써놓고도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고* mind is a prison that I wish I could escape**이고 어떻게 하면 멀쩡한 보통 인간이 될 수 있는지 도통 모르겠고*** 가난해서 너무 힘들었고 가난하니 사람이 어디까지 구질구질해졌고… 이런 얘기나 브런치에 주절거리는 인간으로 남을 수도 있지만, 최소한… 최소한 남들 면전에서 저런 구시렁 늘어놓는 사람은 되지 않았으면…….


    그런 바람이 있다.





    어쨌거나 입사하게 되었다. 이렇게 난데없이 고생도 안 하고 얼레벌레 일부터 시작하게 되었다는 게 웃기긴 한데 (명색이 '진로는 아직 고민 중' 카테고리인데 세 번째 글이 대뜸 취뽀글이란 것도…) 어쨌거나 전보다는 조금 더 어른의 삶에 가까워질 예정. 그런 만큼 조금 더 체면도 차려 가며 덜 징징거리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아직은 완벽한 어른도 아니니 내 자신에게 부담을 너무 주지 않으면서 적당히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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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촌장, 가시나무

**Alec Benjamin, Mind is a Prison

***Crazy Ex Girl-friend cast, Tell Me I'm Okay (Patr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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