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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사 Jul 04. 2020

넘버 원과 뜻밖의 치즈케이크

잊지 못할 금요일 밤의 생일 파티

침대에 누워 몽블랑과 크로아상을 뜯어먹으니 좀 살 것 같았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에, 엄마는 빵을 배우러 근처 도시에 나갔다. 점심때가 지나자 손님이 드문드문해져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고, 에어컨을 꺼도 서늘한 공기에 오한을 느꼈다. 고개를 좌우로 살짝 흔들면 머리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추가 반 박자씩 늦게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마지막 손님이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구석의 검은 가죽 소파에 길게 누웠다. 잔잔히 흘러나오던 드뷔시의 어린이의 세계가 멈추었지만, 음악을 새로 틀기 위해 몸을 일으킬 기운이 없었다. 툭, 투둑. 옆의 유리창과 블라인드를 뚫고 빗소리가 들렸다.


'배고파.' 축 늘어져 넋을 놓고 있다가 자동문이 덜컹이는 소리에 후다닥 신발을 신고 일어났다. 손님도, 엄마도 아닌 아빠였다. 계속 누워 있었어도 되었을 텐데. 김이 샜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빠는 엄마가 거의 도착했다는 말을 전하고 씻으러 올라갔다. 아빠가 샤워를 마치고 보송하게 마른 머리로 나타날 때까지도 엄마의 기척은 없었다.


부엌 쪽 초록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발걸음 소리, 비닐봉투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몸을 반쯤 일으켜 유리창 너머로 부엌을 엿보았다. 어디 한 군데 튀어나오거나 움푹 패인 곳 없는 완벽한 구 모양의 두상, 드디어 엄마가 도착했고, 그는 곧 내가 배고픔과 추움, 피곤함에서 해방될 것임을 뜻했다! 비척비척 걸어 나가 엄마를 맞이했다.


"오늘은 레몬 시럽을 만드는 법을 배웠어." 엄마가 몽블랑에 적셔 먹는 레몬 시럽, 사각형의 오븐, 반죽의 유통기간 등에 대해 말하는 동안 나는 조리대 위를 뒤적거렸다. 아, 찾았다. 갓 구운 빵이 담긴 봉지를 보니 한 덩어리를 크게 떼어 입에 넣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 올라가서 이거 먹는다?"
통보에 가까운 허락을 구하는 말을 던지고 집으로 향하려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발길을 멈추었다. 확인할 것이 있었다.

"치즈케이크 사 왔어?"

엄마의 손끝이 케이크 상자를 가리켰다. 엄마가 케이크를 잊지 않았음에 안도하며 태블릿 자판을 두드렸다. 1950-80년대의 로맨틱한 팝과 재즈로 구성된 플레이리스트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카페를 채운 활발한 음률을 듣고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쯤이면 생일 분위기를 만끽하기 충분하겠지. 하루의 임무를 마쳤다는 홀가분함 대신, 일 초라도 빨리 계단을 올라 빵을 먹어야겠다는 배고픔에 사로잡힌 채 나의 하루는 마무리되는 듯했다.




오늘은 '넘버 원'의 친구 분의 생일이었다. 넘버 원은 카페의 단골 커플을 일컫는 이름으로, 뜻 그대로 카페를 가장 자주 찾는 손님이다―하루에 두 번 뵙는 날도 꽤 있으며, 어떤 날은 세 번도 오셨다.― 엄마의 전화번호부에 '넘버 원'이 저장된 사연은 이렇다.


몇 달 전, 국회의원 후보 인터뷰를 촬영할 장소를 물색하던 관계자들의 눈에 띄어 카페를 대여한 날이 있었다. 한데 며칠 후, 아직 넘버 원이라고 불리기 전의 넘버 원이 와서는 그 날 카페를 닫은 이유를 물었다. 여수에 다녀오는 길에 우리 카페의 아이스커피가 마시고 싶어 기껏 걸음했는데 현장 출입이 통제되었던 탓에 소득 없이 차 머리를 돌려야 했던 것이었다. 연락처를 몰라 무슨 일인지 묻지도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안타까운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엄마의 명함을 드렸다.


나는 둘을 '그 여자분, 그 남자분'이라 지칭하고 있었는데, 사이를 잘못 넘겨짚는 결례를 범하지 않으려다 나온 호칭이었다. 하루는 커피를 가져다 드리니 '여자분'이 물었다.


"그런데, 우리를 뭐라고 불러요? 가족끼리 우리를 부르는 말이 있을 것 아니에요."

나를 당황시키려는 의도가 전혀 담기지 않은 질문이었고 답을 알고 있었음에도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남자분, 여자분이라니. 그 얼마나 정 없고 무뚝뚝한 호칭인가!


"어떻게 부르면 좋을지 생각해서 다음번에 알려드릴게요."


과테말라산 원두를 좋아하고, 우리 카페에 자주 오며, 에스프레소와 뜨거운 물을 다른 잔에 각각 담아 드리면 에스프레소 양을 직접 조절해 가며 머그에 부어 마시고, 스포티하면서 세련된 옷을 입는, 친절하고 발랄한, 그런 사람에게 어울리는 이름은 무엇일까? 도통 이렇다 할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엄마와 아빠가 함께 둘러앉은 밤의 식탁에서 이야기를 꺼냈다.


"넘버 원이라고 불러."

아빠가 우물우물 땅콩을 씹었다. 한 알을 입에 넣기가 바쁘게 두 손가락 끝을 비틀어 다른 땅콩의 껍질을 깠다.


넘버 원은 아빠의 이메일 아이디의 일부였다. 사나이 넘버 원. 직관적이어서 조금 부끄럽기까지 한 단어에, 무릎을 모아 잡고 있던 양 발을 구르며 웃었다. 그런데 웃음이 진정되고 나니 꽤 괜찮은 호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실상부 최고의 단골이니까 넘버 원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카페를 찾은 '넘버 원' 두 분께 새로운 호칭과 그렇게 정한 이유를 알려드렸더니 다행히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색다른 하루는, 카페에서 빵을 판매하기 위해 준비 중임을 알고 있던 넘버 원이 엄마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에서 시작되었다. 함께 운동하는 일행의 생일을 축하해주려 하는데 혹시 치즈케이크를 만들기도 하는지 묻는 문자였다. 엄마는 '케이크를 만들지는 못하지만, 마침 빵을 배우러 가는 날이니 저녁 일곱 시 이후라도 괜찮으시다면 치즈케이크를 사 올 수 있다'라고 답했다고 했다.


나 혼자 카페를 보고 있을 때 넘버 원이 등장했다. 전에 뵌 적이 있는 친구 분도 함께였는데, 다른 곳에서 케이크를 사서 갖고 온 것 같진 않아 아무래도 생일은 다른 장소에서 축하하기로 하신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커피를 내렸다. 마지막 음료를 쟁반 위에 막 올린 찰나에 넘버 원 중 '여자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치즈케이크는 준비가 안 되나요?"

포스기 스크린을 보니 사십 분 전에 나간 엄마가 빵집에 도착했을 법한 시간이었다.

"엄마가 일곱 시 넘어서 카페에 돌아올 것 같은데, 늦은 시각도 상관없으시면 엄마한테 그 빵집에 치즈케이크 있냐고 확인해볼까요?"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요? 큰 거 말고, 작은 케이크면 되는데. 엄마한테 준비 가능한지 확인 문자 한 번만 보내주시라고 전해줘요."

말을 마친 넘버 원은, 커피와 생강차가 담긴 쟁반을 들고 늘 앉는 방 안으로 사라졌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빵집에 치즈케이크가 있는지 물었다. 큰 거 말고, 작은 거.

'응, 여기 치즈케이크 있다. 요만한 것도 있고, 그것보다 좀 더 큰 것도 있고……' '엄마가 봐서 적당한 걸로 골라. 넘버 원께 케이크 사갈 수 있다고 문자 한 통 보내드려. 저 케이크 엄마가 사겠다고 카운터에 말해두는 거 잊지 말고. 지금 바로. 알았지? 문자도 꼭 보내고.'


사이에서 전달을 마치고 카운터 뒤 빨간 의자에 털썩 앉았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본 스크린에는, 결제가 완료되고 사라졌어야 할 에스프레소와 생강차가 그대로 표시되어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정작 카드를 투입구에 꽂는 것을 깜빡하고 그대로 쟁반 위에 올려두었던 것이다.

다시 가서 카드를 달라고 하기 겸연쩍었기에 서비스로 드린 셈 치거나 이따 엄마가 오면 치즈케이크 값과 함께 계산하라고 말하거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 후로 네 시간을 기다린 끝에 녹초가 된 나는 침대 위에서 빵을 먹어치우는 중이었다.

빵 부스러기가 조각조각 떨어졌지만 다 먹은 후에 한꺼번에 치울 요량으로 무시했다. 두루마리 휴지 정도 부피의 몽블랑을 해치우고, 반만 먹으려 남겨 두었던 크로아상의 나머지 절반까지 사라져 빈 봉지만 남을 때쯤 되니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생겨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치즈케이크가 넘버 원에게 무사히 전달되었는지 궁금했다.


"넘버 원 도착했어. 너도 빨리 내려오래. 생일 노래 부르자고."

"응? 나도?"

뜻밖의 대답에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응, 너도. 확인받은 후에도 다시 한번 물었다.

"진짜?"

"진짜."

영문을 모른 채 일단 침대에서 내려와, 헝클어진 머리를 빗었다.


6인용 탁자에 다섯 명이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책장과 가까운 쪽에는 넘버 원, 넘버 원의 친구 분이 주르륵 앉아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예상외로 엄마와 아빠가 앉아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미처 판단을 끝내기 전에 엄마가 나를 잡아끌었다. "어서 와." 넘버 원이 높게 지저귀는 새 같은 목소리로 반겼다. "딸이 가운데에 앉아." 다른 넘버 원의 말에 얼떨떨해하며, 세 손님을 마주 보고 엄마와 아빠 사이에 앉았다.


"오늘 생일이시래."

엄마가 말한 생일의 주인공은 넘버원 중 '남자분'이었다! 함께 운동하는 일행이라고 했으니 아주 분명한 힌트가 주어진 셈이었는데도, 왜인지 나는 다른 친구일 것이라고 짐작한 것이다. 파티 주인공은 따로 있는데 어째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등장해서 놀라는 역할을 맡았다. 미리 알았더라면 뭐라도 준비했을 텐데, 집에 올라가서 폴라로이드 사진기라도 가져와야 하나, 등의 아쉬움은 이내 시작된 생일 축하 노래에 묻혔다. 박자에 맞춰 박수를 치면서 단골손님이자 단골손님의 친구의 생일 축하 노래를 입 모아 열심히 불렀다.


옆 도시에서 공수해온 치즈케이크를 한 조각씩 먹으며, 조금 전 틀어두었던 냇 킹 콜과 로버타 플랙을  배경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페 손님의 생일 파티, 그것도 우리 카페에서 열리는 생일 파티에 초대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넘버 원의 초록색 스카프와 덩굴처럼 구불거리며 말려 올라간 머리, 잔잔히 미소짓는 친구의 표정이 사진처럼 기억에 남았다.


마법 같았던 순간이 끝나고, 카페 문을 나선  사람의 그림자도 사라졌을  나도 뒤돌아섰다. 마감까지  시간  카페를 지켜야 하는 엄마를 지나쳐 집으로 올라갔다. 아까 흘린  부스러기를 재빨리 치워내고, 기분 좋은 여운을 그대로 간직한  여름 이불에 누웠다. 공중에서 아주 천천히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아까 결제하지 않길 잘했다.' 생각했고, 그대로 이른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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