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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삶 Aug 25. 2021

오래전 동전의 추억


  늘 이어지는 평범한 아침, 아내의 잔소리에 맞춰 출근길을 나섰다. 그날따라 유독 아내의 잔소리가 심했고 출근길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멀리 출근할 것을 생각하면 그리 좋지 않은 터에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그런데 평소에 아빠가 출근 때 잘 일어나지 않고 어린이집 갈 때까지 집 안에서 놀기만 하던 아이가 그날따라 아빠를 따라왔다.


  "아빠 잘 다녀오세요~!"


 아이는 아빠가 문을 닫고 나가니 집안에서 인터폰을 켜고 스피커로 인사를 한다. 갑자기 아이가 안 하던 짓을 하니 불안해진다. 혹 오늘 내가 빼먹은 것이 있을까? 아이의 생일이나 기념일인데 선물을 놓친 건 아닌가? 짧은 순간 많은 경우의 수가 스쳐 간다. '그래, 아빠의 좋지 않은 기분을 달래주려고 했던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내려앉았던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어리지만 날 닮아서 속이 꽉 찬 아이로구나.'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안정되면서 은근히 흐뭇해졌다.


 내가 어릴 때 형은 늘 무거운 전공 서적을 들고 다녔다. 고시를 준비하던 형은 가방에 다 들어가지 않는 책을 상자에 넣어서는 동생들이 있는 시골집에 오곤 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형으로서는 그때가 무척 어려운 시간이었고 그 상자에 담긴 무게는 젊은 나이에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시골집은 아직 학교 다니는 어린 동생들이 있어서 비좁았다. 그 좁은 곳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가 사 온 수박을 나눠 먹고 선풍기 바람에 더운 여름철을 보냈다.


 여름을 보내고 형은 다시 서울로 간다고 길을 나섰다. 구멍 난 나이키 짝퉁 운동화를 신고 나이 든 복학생처럼 빛바랜 복장으로 집을 나선다. 그날따라 나는 버스정류장까지 짧은 길을 따라나섰다. 한 다섯 걸음 갔을까. 형이 뒤를 돌아보더니 살짝 웃는다.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닌 난처할 때 억지로 웃는 느낌이었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500원짜리 동전을 꺼내 들었다. 학교에서 점심에 300원짜리 도시락 라면을 사 먹을 수 있는 시절이었다. 그걸 내 손에 쥐여 주었고 어색한 웃음은 여전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는 형을 끝까지 배웅하고 싶었고, 버스를 타는 형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싶었다. 서너 걸음 다시 옮겼을까 형이 다시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멋쩍고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100원짜리 동전 서너 개를 꺼내서 내게 쥐여 주었다. 그걸 받아 들고 또 형을 따라나섰다. 버스정류장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형은 "이제 정말 없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저 멀리 서울 가는 형한테 손 한번 흔들어주고 싶었고, 어쩌다 서울에서 먼 길 내려온 형이 그저 반가웠고 이제 떠나는 형이 아쉬웠을 뿐인데. 아직 나는 어려서 형이 주는 동전들을 거부하지 못했고 그래서 형은 어린 동생이 계속 용돈을 받으려고 따라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더 없다."라는 말이 머릿속에 울렸다. 결국, 버스정류장까지 따라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은 동전을 받겠다고 따라간 것이 아닌데. 형이 가는 뒷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조금은 알아주었을까?


 다행히 몇 년의 시간이 지나 무거운 전공 서적을 들고 다니던 형은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연수원생이 되었다. 코팅한 신분증을 꺼내 들고 아직은 어색하기만 한 양복을 걸치고 집에 왔다. 이제 중학교에 다니는 어린 동생한테 책을 사주겠다며 예전에 같이 가지 못했던 버스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함께 타고 시내 서점으로 갔다.


 모처럼 아이의 배웅을 받고 출근길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어릴 때 그 일이 생각났다. 그때 서울 가는 형한테 나는 그저 용돈 달라고 조르는 철없는 동생이었을까? 내가 훗날 처음 아빠를 배웅한 아들을 대견하게 생각한 것처럼 형도 그때 동생이 기특해 보였다면 참 좋았을 텐데. 어린 마음에 당시에는 억울했지만, 동전 한 푼이 아쉬웠을 그때의 형을 생각하면서 나만의 기억으로 남겨두어야겠다. 그리고 이제 한 아이의 아빠가 된 나는, 내 아이가 모처럼 배웅한 날을 오래도록 기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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