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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레인 Nov 07. 2021

락다운 이후의 생활

얼마 전에 생일이었다. 몇 살이냐고 묻는 그런 부적절한 센스는 부디 자재해주시기를. 


이제 삼십 대 중반이 딱 되었다. 세상에, 이 나이까지 시집을 가지 않고 있다니.. 

어린 날의 내가 미리 미래를 알았더라면 기가 찼을 노릇이다. 적어도 스물여덟에는 여자는 시집을 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서른이 넘으면 무조건 노처녀라고 생각했었다. 와, 근데 내가 지금 노처녀가 됐네? 


본래 내 꿈은 현모양처였다. 

조신하게 집안일하면서 아이 잘 키우고 남편 잘 내조하는 그런 인생을 사는 여자. 

그래, 틀린 꿈이었지.. 그땐 뭘 몰랐던 게 많았다. 비록 내 인생은 또래들보다 조금 더 파란만장했었고.. 호주에 와서 우여곡절이 참 많았었지만.. 어쩌다 보니 생각지도 못하게 시작했던 미술의 길이 난 좋다. 


지금 돌아보면 그 꿈이 와장창창 깨진 건.. 내 인생의 천운이었다. 

그리고 공부는 절대 내 길이 아닌 줄 알았건만.. 이 길을 가네, 내가?

사람 인생 역시 모르는 거다. 우리 엄마도 나도, 내가 미대 갈 줄은 정말 몰랐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그건 상상도 못 하셨을 듯.. 

게다가 이 분야에서 일하고.. 박사한 다고 설칠 줄은 정말 몰랐었다. 정말 인생은 예측불허이다. 


우리 엄마 사주가 학자를 낳는 사주라고 했었는데, 나는 이십 대 중반까지 공부랑은 거리가 멀었던 인생을 살았기에 신경도 안 썼었다. 근데, 길이 열리니까.. 정말 다 되더라. 저절로 된 건 아무것도 없다. 엄청난 노력과 마음고생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하지만 난 내 힘으로 공부했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는다. 다 도와주시고 이끌어주셔서.. 내가 끝까지 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렇게 받은 것들을 언젠가 세상에 꼭 베풀어야 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건 우리 집 비밀인데, 엄마가 말했다. 나는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아이큐가 높아진 케이스라고.....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충격이 가시지 않았었다. 


어쨌든, 생일이었다. 탄수화물이 엄청 먹고 싶었다. 그냥, 탄수화물... 


생일 기념으로 가장 좋아하는 먼 동네로 친히 운전을 해서 초밥을 왕창 먹었다. 

다이어트하느라고 탄수화물을 거의 일주일 끊었었는데, 이날은 정말 환장을 하고 실컷 먹은 것 같다. 

생일이잖아. 이 정도 먹어도 돼. 


나 자신에게 주는 생일 선물로 올해는 도예 용품을 샀다. 워낙 비싼 가격이라서 망설였지만.. 같이 일하는 교수님의 사용기에 대한 극찬을 듣고 나서 바로 결제를 했다. 클러치백을 하나 장만하고 싶었는데, 아.. 


예전에 데이트하던 오빠가 구찌백 사준다고 했을 때, 그깟 하찮은 자존심에 싫다고 거절을 했던 나인데.. 왜 노처녀가 되어서야 아쉬운 거니. 그냥, 생각난다. 

그래서 시집을 못 갔구나 싶고. 


또르르르르르....



[Pots springs eternal]

내가 레지던시 아티스트로 일하고 있는 스튜디오에서 열린 온라인 전시회에 참여했다. 

사실 시드니 락다운 기간 동안 스튜디오를 전혀 못 갔기 때문에 올해는 작품을 만든 게 많이 없다. 


올해 한 게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생각해보니 아예 뭔가를 안 한 건 아니다. 

올해 지금까지 5개의 전시회에 작가로 참여했으며, 3개의 큐레이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4개의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학위를 따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했고, 나의 석사 과정이 이제 거의 다 끝났다!!! 


비록 락다운 때문에 갇혀서 미친 듯이 학교 과제로 글만 쓰고.. 마음에 여유도 없고, 스튜디오도 못 가서 내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을 한 게 없어서 허전했지만.. 그럼에도 참 열심히 살았던 2021년이었다. 


내년에는 나 자신에게 기대가 된다. 하고 싶은 작품 콘셉트를 정했고.. 이제 실천만 하면 되니까. 

잘해보자, 한번. 내년에도 참 많이 바쁘겠지.. 그래도 감사하고 행복하다. 



키우던 딸기가 열렸다. 올해는 참 이상하다. 

원래 내가 식물을 키우면 다 죽었었는데.. 올해는 식물들이 유독 잘 자라나서 좋더라! 

공부가 거의 끝나가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식물에게 애정을 쏟게 된다. 애정이라고 특별한 건 없고.. 그냥 사랑하고 걱정하는 감정? 참 신기하다. 



시드니 고스포드 아트 프라이즈(Gosford Art Prize)에 파이널리스트(Finalist, 결선 진출자)가 되었다. 시드니 락다운이 풀린 날 아침, 락다운 거리 규정에 대해 전화로 문의를 하고 3개월 만에 장거리 운전을 했다. 코비드 규정 때문에 저렇게 앞에 두고 왔었다. 



시드니에도 오징어 게임이 난리다 난리. 


솔직히 너무 충격받았었다. 처음 들었던 생각은 말세다 말세.. 

어떻게 이런 드라마가 세상에 나오나 했었다. 물론, 오징어 게임이 사회적으로 주는 메시지와 보여주는 현실적인 민낯에는 동의한다. 



스튜디오 근처 공원에 가서 힐링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종종 혼자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혼자만의 시간은 나에게 꼭 필요한 것 같다. 잠시 30분 정도 멍 때리거나 그냥 풍경을 감상하는 그런 시간들 말이다. 뭐, 남들이 봤을 때에는 여유 있다, 쓸데없다, 시간낭비다.. 내게 별소리들을 하시지만..


나는 이런 시간도 없으면 절대 효율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못한다. 그래서 꼭 필요하니 비난은 사절한다. 

아무리 바빠도 종종 시간 내서 이렇게 혼자 시간을 보낸다. 숨 돌리는 시간.. 


아마 앞으로 누군가를 만나서 가정을 이룬다고 해도 나에게 이런 시간들은 반드시 필수로 필요하다. 

맛있는 커피는 덤이다. 



락다운 이후, 오랜만에 동네 탐방을 했다. 스튜디오 앞집에 살고 있는 고양이들이 날 잊지 않고 반겨줘서 너무 좋은 날이었다. 내가 언젠가 꼭 메인쿤 고양이를 키우리라.. 



흙이랑 화초도 사러 갔었다. 



키우던 장미가 활짝 피어나 줘서 너무 기뻤던 어느 날 아침. 



락다운 이후, 오랜만에 친구를 집에 초대했다. 6시간 수비드 한 스테이크와 꿀에 졸인 당근과 구운 아스파라거스! 그리고 신선한 홍합으로 육수를 내서 오일 파스타를 해 먹었다. 내가 했지만 왜 이렇게 맛있던지.. 

친구가 사 온 샤르도네와 어울렸다. 그리고 수다를 원 없이 떨었다. 



작업실에서 커피도 마시고.. 

나의 드립 커피 실력이 나날이 늘고 있다. 



아이고, 3개월 동안 스튜디오에 박혀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부서졌네! 다시 만들지 뭐! 



수강생 분이 손으로 만드신 다완. 뭔가 굉장히 아티스틱해서 마음에 든다. 



스튜디오에 놀러 온 수줍음 많은 소녀. 

절대 맨바닥에 안 앉는다, 뭔가를 깔아줘야지만 그 위에 앉는 아이.. 



한국 빵집에서 사 온 크로켓과 꽈배기. 정말 맛있다. 



새로운 취미가 되어버린 식물 키우기. 



새로 사귀게 된 친구와 함께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언니 언니 따라주니 참 고맙네. 



락다운 이후에 백만 년 만의 외식. 가장 먹고 싶었던 리코타 머시룸과 케일 칩이 올라간 사워도우. 

그리고 잘생긴 바리스타 오빠가 샘플로 준 새로 들어온 커피에 반해서 마셔본 이름 생각 안나는 커피. 

커피 맛있다고 딱 한마디 했는데, 그렇게 기뻐할 수가.... 


청소를 하든, 교수든, 커피를 만들든, 예술가든, 회계사든, 의사든, 수리공이든..

나는 자기 직업에 자부심이 있고, 그걸 파고드는 사람들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한다. 



공원에 가서 자리를 잡고.. 조용히 과제를 했다. 하아... 

사실 난 도서관에 가서 공부해야 하는 사람인데, 도서관을 못 가니 공원에라도 왔다. 불편했지만 나쁘진 않았다. 결론은 공부 안 함. 



앉아있는데, 펠리컨이 유유히 지나가는데 너무 귀엽더라. 

글 쓰면서도 왠지 다시 한번 힐링이 된다. 이 좋은 기분을 안고.. 푹 잠을 자야겠다. 

내일도 부디 예쁘고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기를. 


현실은 또 글 쓰고 글 써야하고.. 일도 밀려있고.. 해야할게 너무 많지만.. 

그래도! 감사한게 너무 많은 날들이다. 차근차근 하나씩 잘 해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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