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가능하다는 공포에 대하여
직장인의 의자는 바퀴가 달려 있습니다. 언제든 굴러가서 다른 사람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하며 살아갑니다.
"내가 이 회사를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데"
"나 없으면 이 팀이 돌아가겠어?"
라는 믿음으로 불안을 덮어두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내 의자 옆에 낯선 의자 하나가 놓입니다. 나보다 젊고, 빠릿빠릿하며, 심지어 내 일을 나보다 더 잘하는 것 같은 누군가가 그 자리에 앉습니다. 혹은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내 모니터가 꺼지고 내 책상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는 상상을 합니다.
그 순간, 덮어두었던 공포가 쓰나미처럼 밀려옵니다.
'나는 대체 가능한 부품인가?'
'이러다 책상 빼는 거 아냐?'
이 불안감은 사람을 비이성적으로 만듭니다. 멀쩡하던 동료를 적으로 만들고, 하지 않아도 될 실수를 저지르게 하며,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몰게 합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은 생존 본능이지만, 그 본능이 이성을 마비시킬 때 우리는 진짜 빌런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펜실베이니아의 제지 회사에서 출산 휴가를 앞둔 한 여직원이 겪는 '대타'와의 신경전을 통해, 자리 보전의 공포가 어떻게 인간을 조종하는지, 그리고 진짜 '내 자리'는 어디에 있는지를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이 회사의 안내데스크를 맡고 있는 직원은 출산 휴가 기간 동안 자신의 업무를 대신해 줄 임시직 직원을 교육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대타 직원은 너무 완벽합니다. 그녀는 젊고, 아름다우며, 업무 습득력도 빠릅니다. 게다가 성격도 싹싹해서 오자마자 사무실 남자 직원들의 환심을 삽니다.
안내데스크 직원은 위기감을 느낍니다. 임신으로 인해 부은 몸, 둔해진 움직임, 감정 기복으로 힘들어하는 자신과, 모든 면에서 빛나는 그녀가 너무나 비교되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돌아갑니다.
'사람들이 나보다 그녀를 더 좋아하면 어떡하지?'
'내가 없는 동안 그녀가 내 자리를 완전히 꿰차면? 나는 돌아올 곳이 없어지는 건가?'
'혹시 내 남편마저 그녀에게 흔들리는 건 아닐까?'
안내데스크 직원의 불안은 '망상'으로 발전합니다. 그녀는 대타 직원이 자신을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합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대타 직원은 그저 열심히 일하는 신입일 뿐입니다. 안내데스크 직원은 자신의 망상을 증명하기 위해, 사무실의 유일한 동맹군인 2인자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2인자는 특유의 과대망상으로 그녀의 불안에 기름을 붓습니다.
"대타 직원은 분명 너의 자리를 뺏으러 온 스파이다!"
두 사람은 대타 직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함정을 파서 그녀의 본색을 드러내려 합니다. 그녀의 가방을 뒤지거나, 혈압계를 들이대며 거짓말 탐지기 흉내를 내는 등 우스꽝스러운 소동을 벌입니다.
물론 대타 직원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저 주어진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안대데스크 직원은 결국 깨닫습니다. 대타 직원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낮아진 자존감이 문제였다는 것을.
"나는 이제 매력도 없고, 일도 못하는 뚱뚱한 임산부일 뿐이야"라는 자기 비하가, 죄 없는 대타 직원을 '나를 위협하는 빌런'으로 둔갑시킨 것입니다.
남편은 그런 그녀에게 진심 어린 확신을 줍니다.
"당신은 대체 불가능해. 대타 직원이 아무리 일을 잘해도, 당신이 될 수는 없어."
이 한마디에 그녀는 비로소 불안을 내려놓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이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가장 무서운 적은 내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가 아니라, '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 나'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한국의 직장인들도 비슷한 공포를 겪습니다. 특히 '사수, 부사수' 관계에서 이 묘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김 과장은 새로 들어온 박 대리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합니다. 처음에는 "잘 가르쳐서 내 일을 좀 덜어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박 대리가 일을 너무 잘합니다. 김 과장이 3시간 걸리던 일을 30분 만에 끝냅니다. 회의 시간에는 김 과장이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를 내서 팀장의 칭찬을 받습니다.
김 과장은 뿌듯함 대신 서늘함을 느낍니다.
'이러다 내가 밀려나는 거 아니야?'
'팀장이 나를 꼰대 취급하고 박 대리만 챙기네?'
이때부터 김 과장의 '견제'가 시작됩니다. 그는 박 대리에게 핵심 정보는 주지 않고 허드렛일만 시킵니다. 박 대리가 질문하면 "그건 나중에 알려줄게"라며 회피합니다. 심지어 박 대리의 작은 실수를 팀장 앞에서 크게 부풀려 보고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지식의 독점'을 통한 생존 전략입니다. "이 일은 나밖에 몰라"라는 상태를 유지해야만 자신의 고용 안정이 보장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충수입니다. 후배를 키우지 못하는 선배는, 결국 리더로서의 자질이 없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출산 휴가나 육아 휴직, 혹은 병가로 장기간 자리를 비웠다가 복직한 직원들이 겪는 현실은 더욱 냉혹합니다.
돌아와 보니 내 자리는 구석으로 밀려나 있고, 내 책상에는 모르는 짐들이 쌓여 있습니다. 내가 하던 핵심 업무는 이미 다른 사람이 맡고 있고, 나에게는 '지원 업무'라는 이름의 잡일이 주어집니다. 팀원들은 환영한다고 말하지만, 눈빛은 "이제 와서 뭘 하겠다고?"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때 느끼는 '소외감'과 '잉여 인간이 된 것 같은 공포'는 엄청납니다. 회사는 대놓고 나가라고 하지는 않지만, "눈치껏 알아서 나가라"는 무언의 압박을 줍니다. 이것은 '책상 빼기'의 현대판 버전입니다.
많은 복직자들이 이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퇴사합니다. "내가 여기서 짐만 되는 것 같아." 그들은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입고 회사를 떠납니다.
최근에는 인간이 아닌 존재가 우리의 자리를 위협합니다. 바로 'AI'와 'RPA(업무 자동화)'입니다.
"이거 챗GPT 돌리면 1분이면 나오는데, 김 대리는 왜 반나절이나 걸려?"
"회계 정산 프로그램 도입했으니까, 경리팀 인원은 좀 줄여도 되겠네."
나의 10년 노하우가 알고리즘 하나에 의해 대체되는 순간, 우리는 깊은 무력감을 느낍니다.
"기계가 나보다 낫다니."
나의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는 느낌입니다.
이 불안감에 대처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러다이트'처럼 기술을 거부하고 "기계는 사람의 감성을 따라올 수 없다"라며 과거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결국 도태됩니다.
다른 하나는 기술을 '도구'로 활용하여 자신의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기계가 할 수 없는 '판단'과 '조율'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이토록 '대체 가능성'에 공포를 느낄까요?
그것은 우리가 회사의 '부품'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품은 언제든 더 성능 좋은 새것으로 교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 불가능한 사람'은 부품이 아닙니다. 그는 '맥락'을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단순히 업무 매뉴얼을 아는 것이 아니라, 왜 이 업무가 이렇게 만들어졌는지, 과거에 어떤 시행착오가 있었는지, '히스토리'를 아는 사람.
단순히 연락처를 아는 것이 아니라 김 부장님은 비 올 때 전화하면 좋아한다, 이 거래처는 A보다 B를 제안해야 먹힌다는 관계의 맥락을 아는 '네트워크'를 가진 사람.
데이터를 뽑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읽어내는 '통찰력'을 가진 사람.
이런 것들은 신입사원이나 AI가 하루아침에 따라 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당신의 자리가 위협받는다고 느낀다면, 당신이 지금 '기능'을 하고 있는지 '맥락'을 다루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흔들리는 내 자리를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첫째, 경쟁자를 '후계자'로 만드십시오.
나보다 일 잘하는 후배가 들어왔다면, 그를 질투하고 견제하는 대신 내 편으로 만드십시오.
"박 대리, 일 처리 솜씨가 정말 좋은데. 내가 하던 이 업무를 넘길 테니 한번 맡아봐. 내가 뒤에서 봐줄게."
내 업무를 넘겨주는 것은 자리를 뺏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기 위해 손을 비우는 과정입니다. 후배를 키우는 선배는 조직에서 '리더감'으로 인정받습니다.
둘째, '복귀 신고식'을 화려하게 치르십시오.
휴직 후 복귀했다면, 주눅 들어 있지 말고 더 당당하게 움직이십시오.
"1년 동안 쉬면서 업계 트렌드를 이렇게 분석해 봤습니다. 우리 팀에 이런 부분이 적용되면 좋겠습니다."
복귀 첫 주에 내가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할 '한 방'을 터뜨리십시오. "아, 역시 김 과장 안 죽었네"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합니다. 동정표가 아닌 실력표를 받아야 합니다.
셋째, 나만의 '시그니처'를 만드십시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이건 김 대리 아니면 안 돼"라는 업무 영역을 하나쯤은 확보하십시오.
그것은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가장 정리가 잘 된 회의록', '가장 섭외력이 좋은 전화 스킬', '복잡한 엑셀 수식을 다루는 능력'.
남들이 귀찮아하거나 어려워하는 영역에서 나만의 깃발을 꽂으십시오. 그 깃발이 당신의 영토를 지켜주는 울타리가 됩니다.
당신의 자리는 의자가 아니다
회사의 의자는 언젠가 사라집니다.
당신이 아무리 꽉 붙잡고 있어도, 은퇴하는 날에는 놓고 떠나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일하면서 쌓아온 '경험', '동료와의 신뢰',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의자가 사라져도 당신의 몸속에 남아 있습니다. 당신의 진짜 자리는 책상과 파티션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료들의 마음속에, 그리고 당신 스스로의 자부심 속에 있습니다.
누군가 당신의 자리를 위협한다고 느낄 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의자는 뺏길 수 있어도, 당신이라는 사람은 결코 대체될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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