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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같은 언어'를 쓰고 있습니까?

'심심한 사과'가 불러온 피로한 전쟁

by 돌부처

"이번 사태에 대해 심심(甚深)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어느 기업의 사과문이 올라온 날, 인터넷은 난데없이 불타올랐습니다.


"사과가 심심하다고? 장난하냐?"

"나는 하나도 안 심심하다."


'마음 깊이'라는 뜻의 한자어 '심심'을, '지루하다'는 뜻으로 오해한 사람들이 분노를 쏟아낸 것입니다.


이 촌극은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그리고 이 비극은 인터넷 댓글 창을 넘어, 지금 당신의 사무실 한복판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습니다.


"금일(今日) 중으로 보고해."라는 말에 "금요일까지요?"라고 되묻는 신입사원.
"이 문서는 사흘(3일) 뒤에 파기해."라는 말에 4일 뒤에 파기하는 동료.
"가제(Working Title)를 정해 오라"는 말에 "랍스터 말고 킹크랩은 어떠냐"고 농담을 던지는(혹은 진담인...) 상사.


우리는 지금 같은 한국어를 쓰면서도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바벨탑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닙니다. 업무 지시가 오독되고, 보고서의 맥락이 파괴되며, 결국 프로젝트가 산으로 가는 '비용'의 문제입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입니다. 모르면 물어봐야 하는데 묻지 않고, 알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얇은 지식을 세상의 전부라 믿는 '문해력 빌런'들. 그들이 어떻게 조직의 혈관을 막고 있는지, 오늘 우리는 펜실베이니아의 한 사무실을 통해 그 답답한 속사정을 들여다보려 합니다.


이 시트콤의 지점장은 '문해력 빌런'의 살아있는 교과서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말을 하지만, 그중 절반은 틀린 단어이거나 잘못된 맥락입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명대사 중 하나는 파산 위기에 처했을 때 사무실 한가운데서 외친 한마디입니다.


"I declare BANKRUPTCY!!!! (나는 파산을 선언한다!!!!)"


그는 법적인 절차를 밟는 것이 아니라, 그저 큰 소리로 '선언'만 하면 파산 처리가 되어 빚이 사라지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단어의 사전적 의미만 알았지, 그 단어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전혀 몰랐던 무지의 소치입니다.


특히 '중국' 에피소드에서 그의 문해력 문제는 정점을 찍습니다. 그는 치과 대기실에서 <뉴스위크> 잡지의 기사 하나를 읽습니다. "중국이 세계 경제를 지배하고 미국을 앞지를 것이다"라는 내용의, 흔한 위기 조장용 칼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점장은 이 기사 하나를 읽고 자신이 '중국 전문가'가 되었다고 착각합니다.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중국이 우리를 집어삼킬 거야!", "모든 것이 중국산으로 바뀔 거야!"라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회사의 모든 정책을 중국의 위협에 대비하는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무실의 브레인인 회계부서 직원이 팩트와 데이터를 들어 반박하려 하지만, 지점장은 듣지 않습니다.


"그건 환율과 구매력 평가 지수를 고려하지 않은 단순 비교입니다."
"아니, 내 말이 맞아. 잡지에 나왔다고! 너는 잡지도 안 읽냐?"


지점장은 '글자'는 읽었지만 '맥락'은 읽지 못했습니다. 기사가 말하고자 하는 뉘앙스, 비판적 시각, 그리고 반대되는 데이터들을 종합적으로 해석할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안다'고 믿었기에 더 위험했습니다. 그의 얕은 지식은 신념이 되었고, 그 신념은 조직원들을 불필요한 공포와 혼란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것이 문해력 빌런의 가장 무서운 점입니다. 그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잘못 알고 있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 믿음을 바탕으로 엉뚱한 지시를 내리고, 정당한 반론을 '도전'으로 받아들입니다.




한국의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문해력 이슈는 '어휘력 부족'과 '긴 글 기피증'입니다.

신입사원 A 씨에게 팀장이 메일을 보냅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금주' 진행 상황을 '명일'까지 보고 바람."


A 씨는 당황합니다. '금주? 술 끊으라는 건가? 명일? 밝은 날?'


그는 검색창을 켜는 대신, 옆 자리 동기에게 묻거나, 혹은 제멋대로 해석합니다. 결국 그는 '이번 주'가 아닌 '오늘' 보고서를 내거나, '내일'이 아닌 '다음 주 명절'까지 기다리는 촌극을 벌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맥락 맹인'입니다. 팀장이 A4 3장짜리 기획안을 주며 "이거 읽어보고 핵심 요약해서 보고해"라고 지시합니다. A 씨는 10분 만에 돌아옵니다.


"다 읽었습니다."
"그래? 핵심이 뭐야?"
"음... 우리 회사가 잘해야 한다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는 글자를 '보았을' 뿐, '읽지' 않았습니다. 숏폼 콘텐츠와 3줄 요약에 익숙해진 뇌는, 긴 글의 행간을 읽어내고 논리 구조를 파악하는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들은 업무 지시사항이 적힌 긴 메일을 끝까지 읽지 않습니다. 제목만 보고 판단하거나, 굵은 글씨만 대충 훑어봅니다. 그리고 엉뚱한 결과물을 가져와서 말합니다.


"팀장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신 줄 알았는데요?"


이들과 일하는 리더는 매번 스무고개를 해야 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단어의 뜻부터 숨은 의도까지 숟가락으로 떠먹여 줘야 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리더십 비용의 낭비입니다.




반대편에는 '지식의 저주'에 빠진 고연차 빌런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쉬운 우리말 대신, 굳이 어려운 한자어나 출처 불명의 업계 은어, 콩글리시를 남발합니다.


"이번 안건은 '재가(裁可)'를 득한 후 '공람(供覽)'하도록 하고, '기일(期日)' 엄수해서 '품의(稟議)' 올리게. 아, 그리고 'R&R'이랑 'T&C' 확실히 하고 '아삽(ASAP)'으로 '팔로우업'해."


신입사원의 머릿속은 하얘집니다. 이것은 업무 지시가 아니라 암호 해독입니다.

빌런들은 왜 이렇게 말할까요?


첫째, '권위의 확인'입니다. 어려운 말을 씀으로써 "나는 너희보다 많이 안다", "이곳은 내 구역이다"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것입니다. 언어를 권력의 도구로 사용하는 셈입니다.


둘째, '습관성 게으름'입니다.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춰 쉽게 설명하려는 노력을 하기 귀찮은 것입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지"라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습니다.


이런 리더 밑에서 직원들은 질문을 잃어버립니다.


"부장님, 재가가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으면 "무식한 놈" 소리를 들을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르는 채로 일을 진행합니다. 그리고 사고가 터지면 리더는 화를 냅니다.


"내 말 못 알아들었어?"

아니요, 못 알아들은 게 아니라 당신이 못 알아먹게 말한 것입니다. 소통의 책임은 화자에게 있습니다.




대면 소통보다 메신저와 이메일 소통이 늘어난 하이브리드 워크 시대, '텍스트의 뉘앙스'를 읽지 못하는 빌런들도 급증했습니다.


김 과장이 정중한 보고를 의도한 이메일을 보냅니다.

"이 부장님, 요청하신 자료 보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이 메일을 받은 이 부장은 화를 냅니다.

"김 과장 이 친구, 싸가지가 없네. 나한테 지금 딱딱하게 구는 거야? 그리고 '수고하십니다'라는 인사도 없어?"


이 부장은 텍스트에 없는 감정을 스스로 창조해 냅니다. 그는 텍스트의 '정보'가 아니라, 자신의 기분과 권위 의식으로 문장을 해석합니다. 그는 메신저에서 "넵"이라고 하면 "장난하냐?"고 화를 내고, "네"라고 하면 "딱딱하다"고 화를 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상사가 "이거 좀 다시 살펴봐..."라고 보냈을 때, 문해력이 있는 직원은 "아, 마음에 안 드시는구나. 수정해야겠다"라고 행간을 읽습니다. 하지만 문해력 빌런은 "다시 보라고? 네, 다시 봤습니다. 이상 없는데요?"라고 답장합니다.


상사의 완곡한 거절이나 피드백을 문자 그대로만 해석하여, 눈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텍스트 너머의 표정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 때문에 디지털 오피스는 지뢰밭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문해력을 '국어 점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직장에서의 문해력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상상력'이자 '배려심'입니다.


말하는 사람의 배려: 내 말을 듣는 사람이 이 단어를 알까? 내 지시가 오해의 소지 없이 명확한가?

듣는 사람의 배려: 저 사람이 왜 저런 말을 했을까? 텍스트 이면에 숨겨진 의도와 맥락은 무엇일까?


문해력 빌런들은 이 '배려'가 결여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중심적으로 말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합니다. "심심한 사과"에 분노한 사람들은, 상대방이 '마음 깊이' 사과하고 싶어 했다는 맥락을 읽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내가 모르는 단어를 쓴 상대에게 불쾌감을 느꼈을 뿐입니다. 이것은 '지적 게으름'이자 '공감 능력의 결여'입니다.




이 말이 통하지 않는 정글에서, 우리는 어떻게 소통해야 할까요?


첫째, '재진술'로 확인 사살을 하십시오.
상사의 지시가 모호하거나 어려운 단어가 섞여 있다면, 반드시 당신의 언어로 바꾸어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부장님, 말씀하신 내용을 제가 이해한 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A업체와 계약을 진행하되, B조항은 삭제하고, 이번 주 금요일까지 초안을 가져오라는 말씀 맞으십니까?"


이 과정은 당신의 이해도를 점검하는 동시에, 상사에게 "내가 이렇게 지시한 게 맞나?"라고 스스로 검열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둘째, '모호한 단어'를 추방하십시오.
당신이 말할 때는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명확하게 말하십시오.


"최대한 빨리(ASAP)" (X) -> "오늘 오후 2시까지" (O)
"잘 좀 해봐" (X) -> "오탈자 검수하고, 폰트는 나눔 고딕으로 통일해서" (O)
"금일 중으로" (X) -> "12월 22일(금) 퇴근 전까지" (O)


숫자와 고유명사로 말하십시오. 해석의 여지를 0%로 줄이는 것이, 사고를 막는 유일한 길입니다.


셋째, 모르면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묻는 사람을 타박하지 마십시오.

"심심한 사과가 무슨 뜻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진짜 부끄러운 것은 모르면서 아는 척하다가 일을 망치는 것입니다.

리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후배가 "명일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으면 혀를 차기 전에, "아, 요즘은 잘 안 쓰는 말이구나. 내일이라는 뜻이야"라고 친절하게 알려주십시오. 그리고 다음부터는 '내일'이라고 쓰십시오.


우리의 목표는 '국어 지식 자랑'이 아니라, '일이 되게 하는 것'이니까요.




언어는 권력이 아니라 '다리'여야 합니다.


시트콤 속 지점장은 자신이 유식해 보이고 싶어서 어려운 단어를 쓰다가 늘 망신을 당합니다. 그의 말은 겉만 화려할 뿐, 그 안에는 진심도, 정확한 정보도 없습니다.


직장은 문학 동호회가 아닙니다. 화려한 수사나 고상한 한자어가 필요한 곳이 아닙니다. 가장 좋은 소통은 '가장 쉽고, 가장 명확하고, 가장 짧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오늘 쓴 메일을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오.
상대방이 사전을 찾아봐야 이해할 수 있는 단어는 없습니까?
당신의 머릿속에만 있는 맥락을 상대도 알 거라고 착각하고 생략하지는 않았습니까?


언어는 상대를 제압하는 무기가 아니라, 나와 상대를 연결하는 다리여야 합니다. 그 다리가 끊어지면, 우리는 각자의 섬에 고립되어 굶어 죽게 됩니다.


오늘 하루, "금일" 대신 "오늘"이라고, "심심한 위로" 대신 "깊은 위로"라고 말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 작은 배려가, 꽉 막힌 사무실의 혈관을 다시 뛰게 만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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