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이 축복처럼 내리쬐는 10월의 서울 하늘은 티끌 하나 없이 맑고 높았다. 평화로운 주말 오후, 여의도 한강 공원은 벌써부터 밤에 있을 불꽃 축제를 기다리는 수십만 명의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색색의 텐트들이 잔디밭을 메웠고, 연인들의 웃음소리와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 치킨 배달 오토바이의 경적 소리가 뒤섞여 활기찬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이 평화롭고 설레는 풍경의 바로 뒤편,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1만 명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려는 끔찍한 음모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오직 세 사람만이 그 진실을 무겁게 짊어진 채, 축제의 그림자 속을 걷고 있었다.
안전가옥의 공기는 숨이 막힐 듯 무거웠다. 창밖으로 보이는 화창한 날씨와 대비되어 실내의 긴장감은 더욱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화이트보드에는 여의도 한강 공원과 주변 지역의 상세 지도가 붙어 있었고, 지도 위에는 붉은색과 검은색 매직으로 복잡한 선들과 기호들이 어지럽게 그어져 있었다.
“놈들의 계획은 간단하면서도 지독할 정도로 치밀합니다.”
윤도진이 지휘봉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고, 며칠 밤을 새운 듯 눈가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불꽃놀이가 절정에 달해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밤하늘로 향하는 순간, 한강 다리 네 곳과 63 빌딩 지하, 그리고 강 한가운데 바지선에 미리 설치해 둔 ‘영적인 기폭 장치’를 동시에 터뜨릴 겁니다. 그러면 거대한 결계가 형성되어 여의도 일대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고립된 섬이 되고, 그 안에 갇힌 100만 명의 사람들은 독 안에 든 쥐가 되는 거죠.”
“그리고 그 혼란의 순간, 강바닥에 숨어 있던 수천 마리의 지맥 포식자들이 일제히 올라와 대학살을 시작하겠지. 화려한 폭죽 소리에 묻혀 비명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테고, 피비린내는 화약 냄새에 가려질 거야. 완벽한 도살장이군.”
이강우가 껌을 씹으며 덧붙였다. 그는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자신의 단검을 숫돌에 갈고 있었다. 슥, 슥, 하는 규칙적인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문제는 그 기폭 장치의 정확한 위치예요. 워낙 범위가 넓어서 특정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하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지도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며칠째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서울 지도 위에 손을 얹고 영적인 탐색을 계속해왔다. 그녀의 손끝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제가 느낄 수 있는 건... 아주 희미하고 불길한 기운의 파동뿐이에요. 마포대교, 원효대교, 한강철교, 서강대교의 교각 아래 어딘가. 그리고 63 빌딩의 가장 깊은 지하, 마지막으로 불꽃이 발사되는 바지선 근처. 기운이 너무 교묘하게 분산되어 있어요. 마치 안개처럼요.”
“분산된 게 아니라, 놈들이 일부러 흩어놓은 거겠죠. 우리가 냄새를 맡지 못하게 하려고, 혹은 함정을 파놓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윤도진은 팔짱을 끼고 깊은 고민에 잠겼다. 경찰 병력을 대거 동원해 수색하고 싶었지만, ‘귀신 잡는 부적을 찾아라’라고 명령했다가는 당장 정신병원에 감금될 것이 뻔했다. 게다가 축제 당일이라 테러 대비라는 명목으로 보안 등급이 최상으로 격상되어 있어, 오히려 공식적인 접근이 더 까다로운 상황이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야. 우리가 직접 뛰는 수밖에.”
이강우가 숫돌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다리 밑을 맡을게. 물속에서 쥐새끼들 잡는 건 내 전공이니까. 냄새나는 한강 물 좀 실컷 마시겠네. 잠수 장비랑 수중용 무기 챙겨서 바닥부터 훑어보지 뭐.”
“그럼 저는 63 빌딩과 여의도 지하상가 쪽을 맡겠습니다.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고, 건물의 구조가 복잡해서 숨기기 좋은 장소들이 많습니다. 기계실이나 배전반 같은 곳을 중점적으로 수색하겠습니다.”
윤도진이 결단력 있게 말했다.
“그럼 저는... 바지선 쪽으로 갈게요. 불꽃이 쏘아 올려지는 곳, 그곳이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핵심 포인트예요.”
하진이 말했다.
바지선은 강 한가운데 떠 있어 접근이 가장 어렵고, 폭발물과 화약이 가득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안 돼. 너무 위험합니다. 당신은 전투 요원이 아니잖아요.”
윤도진이 즉시 반대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가야 해요. 그리고 영적인 기운을 가장 예민하게 감지하고, 기폭 장치를 안전하게 해제할 수 있는 건 저뿐이에요. 다른 사람이 갔다가는 함정에 걸려 터질 수도 있어요. 제가 가야만 해요.”
하진의 단호한 태도와 논리적인 설명에 윤도진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누구 하나라도 몸을 사리거나 역할을 미룰 때가 아니었다. 각자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해야만, 이 미친 계획을 막을 수 있는 희미한 가능성이라도 잡을 수 있었다.
“좋습니다. 대신 약속해요. 위험하다 싶으면, 임무고 뭐고 다 버리고 바로 빠지기로. 당신 목숨이 제일 중요합니다. 살아남아야 다음 기회라도 있는 거니까.”
“알겠어요. 약속할게요.”
세 사람은 각자의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이강우는 특수 제작된 수중 단검과 작살총, 그리고 방수 처리된 폭탄들을 챙겼다. 윤도진은 경찰 신분증과 무전기, 삼단봉, 그리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권총을 점검했다. 하진은 문지기의 옥 조각을 목에 걸고, 품에는 정화의 소금과 붉은팥, 그리고 자신이 직접 그린 ‘해신의 인’ 부적들을 가득 챙겼다.
“작전 개시 시간은 축제 시작 1시간 전.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릴 때입니다. 그때까지 각자의 위치에서 대기하다가, 신호가 떨어지면 동시에 움직입니다.”
윤도진이 손을 내밀었다. 하진과 이강우가 그 위에 손을 겹쳤다. 세 사람의 체온이 서로에게 전해졌다.
“살아서 봅시다. 셋 다. 끝나고 소주나 한잔해.”
이강우가 씩 웃으며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
축제 당일, 저녁 7시.
여의도는 이미 발 디딜 틈 없는 인산인해였다.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강변을 가득 메웠고, 주변 도로는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경찰과 안전 요원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통제를 하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대와 설렘이 가득했다.
아이들은 야광봉을 흔들며 뛰어다녔고, 연인들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곧 터질 불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행복한 표정들 위로 곧 덮쳐올 죽음의 그림자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진은 축제 진행 요원용 조끼를 입고, 관계자 출입증을 목에 건 채 바지선으로 향하는 보트에 올랐다. 윤도진이 미리 손을 써둔 덕분에 검문을 피할 수 있었다. 강바람이 차가웠지만, 그녀의 손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느껴져....’
바지선에 가까워질수록, 물 밑에서 올라오는 불길하고 역겨운 기운이 강해졌다. 검고 끈적한 기운이 강물을 오염시키며, 마치 썩은 생선 내장 같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백면의 기운이었다.
보트가 바지선에 접안하자, 하진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갑판으로 올라갔다. 화약 냄새와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기술자들은 마지막으로 불꽃 발사 장치를 점검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진은 그들의 사각지대를 찾아 그림자처럼 이동했다.
그녀는 옥 조각을 꺼내 들었다. 옥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방향을 알려주었다. 기운의 진원지는 바지선 가장 아래쪽, 화약 창고 바로 밑, 선체 깊숙한 곳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사다리를 탔다. 어두컴컴한 선창에는 거대한 화약통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불꽃 하나만 튀어도 이 배 전체가 날아갈 수 있는 위험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가장 안쪽,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구석진 바닥에 기이한 문양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붉은 페인트, 아니, 말라붙은 피로 그려진 복잡하고 기하학적인 무늬. 그리고 그 중앙에 박혀 있는 검은 쇠말뚝. 말뚝 주변으로는 죽은 쥐와 새들의 사체가 놓여 있었다. 제물이었다.
‘저거다. 영적 기폭 장치.’
하진이 다가가려던 순간, 어둠 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여기까지 오다니, 제법이군. 냄새 맡는 재주는 개보다 낫네.”
작업복을 입은 남자였다. 평범한 인부처럼 보였지만, 그의 눈은 텅 비어 있었고, 입가에는 비릿하고 섬뜩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백면에게 영혼을 잠식당한 하수인이었다.
“비켜. 더 이상 사람들을 해치게 두지 않겠어.”
하진이 옥 조각을 쥐고 단호하게 말했다.
“싫은데? 여기서 불꽃놀이 구경이나 같이 하자고. 아주 화려할 거야. 피로 물든 불꽃놀이.”
남자가 손에 든 묵직한 쇠파이프를 붕붕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같은 시각, 마포대교 아래.
이강우는 검은 잠수복을 입고 차가운 한강 물속에 있었다. 물속은 시야가 거의 확보되지 않을 정도로 탁했고, 각종 쓰레기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는 방수 손전등에 의지해 거대한 교각을 하나하나 훑어 나갔다.
‘이쯤인데... 쥐새끼들이 어디 숨었나.’
그때, 물살이 이상하게 요동쳤다. 이강우가 고개를 돌리자, 교각의 갈라진 틈새마다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검은 알주머니 같은 것들이 보였다. 지맥 포식자의 알들이었다. 수백, 수천 개가 다닥다닥 붙어 부화할 준비를 하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광경이었다.
“어우, 밥맛 떨어지게 생겼네.”
이강우는 허리춤에서 방수 처리된 특수 폭탄을 꺼냈다. 문지기의 힘이 깃든 성수(聖水)와 화약을 배합해 만든 정화 폭탄이었다. 그는 알주머니들 사이에 폭탄을 설치하고 타이머를 맞췄다.
그때, 뒤에서 물살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키에에에에엑!]
이미 부화한 새끼 지맥 포식자 한 마리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이강우의 등 뒤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물속이라 움직임이 둔했지만, 놈은 빨랐다. 이강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며 허리춤에서 수중용 단검을 뽑아 놈의 미간을 찔렀다. 검은 피가 물속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놈은 혼자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이며 그를 포위해오고 있었다.
“하, 이거 수중전은 예상 못 했는데. 숨 참기 시합이나 해볼까.”
이강우가 산소 호흡기를 고쳐 물며 쓴웃음을 지었다.
63 빌딩 지하 5층 기계실.
윤도진은 비상계단을 통해 은밀하게 내려가고 있었다. 이곳의 기운이 가장 탁하고 무거웠다. 그는 권총을 양손으로 잡고 조심스럽게 기계실의 철문을 열었다.
기계실 안에는 이미 쓰러져 있는 경비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중앙 제어 장치와 배전반 앞에,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 서넛이 무언가를 설치하고 있었다. 폭발물처럼 보이는 장치였다.
“손들어! 경찰이다! 움직이면 쏜다!”
윤도진이 소리치자, 사내들이 일제히 그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 역시 하진이 묘사한 대로 텅 비어 있었다. 인간의 이성이 사라진 눈이었다.
“경찰? 귀찮은 파리가 꼬였군.”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손짓하자, 사내들이 품에서 사시미칼과 쇠몽둥이를 꺼내 들고 윤도진을 포위해 왔다.
“이런, 숫자가 좀 많은데.”
윤도진은 뒤로 물러서며 엄폐물을 찾았다. 총알은 한정되어 있었다. 육탄전을 각오해야 했다.
“다들 덤벼! 오늘 여기서 끝장을 보자! 내가 너희들 제사상은 못 차려줘도, 감방 밥은 먹여주마.”
쾅-!
바지선 선창에서 하진은 남자의 쇠파이프 공격을 간신히 피하며 바닥을 굴렀다. 쇠파이프가 바닥을 내리찍으며 불꽃이 튀었다. 좁은 선창 안이라 피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도망만 칠 거야? 무당이라며! 굿이라도 한 판 벌여보시지! 신통력 좀 보여달라고!”
남자가 조롱하며 다시 달려들었다. 하진은 화약통 뒤로 숨으며 옥 조각을 움켜쥐었다.
‘문지기님... 도와주세요. 제게 힘을...!’
그녀는 옥 조각을 꽉 쥐었다. 푸른빛이 터져 나오며 그녀의 몸을 감쌌다.
“이곳은 신성한 물 위다. 부정한 것은 물러가라!”
하진이 손을 뻗자, 보이지 않는 힘의 파동이 남자를 강타했다. 남자는 거대한 손에 얻어맞은 듯 뒤로 튕겨 나가며 화약통에 처박혔다.
“크윽...!”
하진은 그 틈을 타 마법진 중앙의 쇠말뚝으로 달려갔다.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품에서 정화의 소금을 꺼내 말뚝 주변에 뿌리고, 옥 조각을 말뚝 위에 올렸다.
“파괴하라! 부정한 계약을 끊어내라!”
푸른 불꽃이 옥 조각에서 흘러나와 말뚝을 타고 내려가 마법진 전체로 퍼졌다. 피로 그려진 문양들이 비명을 지르며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때, 밖에서, 그리고 선내의 스피커를 통해 카운트다운 소리가 들려왔다. 수만 명의 시민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5! 4! 3! 2! 1... 발사!”
피유우우웅... 펑!
첫 번째 불꽃이 굉음을 내며 밤하늘로 쏘아 올려졌다. 화려한 불꽃이 터지며 밤하늘을 수놓았다. 축제의 시작이자, 대학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하진은 타들어 가는 마법진과 밤하늘의 불꽃을 번갈아 보며 생각했다.
‘아직... 늦지 않았어. 내가... 우리가 막을 거야.’
서울의 운명을 건, 가장 화려하고 잔혹한 밤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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