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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국국어교사모임 Jan 26. 2021

배창환 선생님의 제자로 살아가기

권오경 서울 공항중 yuraehan@hanmail.net

80년대 초, 내가 배정받은 고등학교는 이름조차 들어 본 적이 없는 학교였다. 배정표를 들고 찾아간 학교는 2층까지만 지어진 채 한창 3층이 올라가고 있었다. 우리 위로 한 개 학년, 달랑 다섯 개 반만 있었던, 대구 변두리의 여자고등학교. 함께 교문을 쓰던 여중과 우리 여고, 두 개 학교만 소속되어 있었던 정말 가난한 영세 사립재단 여학교였다.

교복을 입고 시내에라도 나가면 어느 학교냐고 수군거림을 당하던 학교, 완성되지도 않은 건물의 1, 2층에 있던 교실, 분명 새로 짓고 있는 건물이었건만 화장실조차 재래식이었던 곳. 체육 시간이면 운동장 가에 모여 앉아 풀을 뽑고, 운동장 구석 삐죽 튀어나온 비닐 쪼가리를 당겨 보면 땅속에 묻혀 있던 기다란 폐비닐이 달려 올라오던 곳. 수업 중에도 위층에서는 건물 짓는 망치 소리가 뚝딱였다. 건물은 1년에 한두 층씩 올라갔다.

대구와 경북 각지에서 청운의 꿈을 안고 모였던 우리는 그렇게 그 학교 2회 입학생이 되었다. 학교가 사는 방법은 지독히 공부시켜 눈부신 입시 성적을 올리는 것밖에 없었다. 주초고사, 월례고사, 모의고사, 중간고사, 기말고사… 고사들의 연속이었다.

그 속에서 우리가 숨 쉴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선생님들 덕분이었다. 갓 대학을 졸업하신 20대 패기만만하고 열정적이었던, ‘말이 통하던’ 선생님들. 그곳에 배창환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내가 2학년 때 우리 학교에 오셨고 그해 나의 담임이 되셨다. 국어 수업과 한문 수업 담당 선생님. 여고의 총각 선생님^^ 


자유롭게 표현하고 깨우기 

선생님의 수업과 시험은 새로움을 넘어선 파격이었다. 수업 시간에 케케묵은 국정교과서 대신 고은, 김지하, 신경림, 김광섭, 황동규의 시를, 황석영, 김승옥, 최인훈의 소설과 희곡을, 두보, 이백, 김삿갓, 최치원 등의 한시를 함께 읽었다. 그리고 그들 작품으로 시험을 봤다.

수업 시간이 행복했다. 황동규 ‘十月’, 고은 ‘새벽길’,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같은 시부터 두보 ‘춘망(春望)’, 최치원 ‘추야우중(秋夜雨中)’, 김삿갓 ‘구월산봉(九月山峰)’ ‘이십수하(二十樹下)’ 같은 다양한 한시까지. 선생님은 멋진 글들에 흠뻑 빠져들게 하셨다. 우리는 선생님 덕분에 다양한 글을 시험지 속 지문이 아닌 마음을 벅차게 만드는 작품들로 만날 수 있었다. 고2 때 한문 중간고사 시험문제가 지금도 생각난다. 수업 시간에 함께 배운 한 시 몇 수를 내시고 “해석하고 감상하시오”였다. 서·논술형 독서 평가! 그때도 중간고사, 기말고사는 내신 성적으로 매겨져 학력고사와 합산하여 대학 입시 점수가 되었는데, 4지 선다형의 문제에만 익숙했던 우리는 적잖게 당황했다. 덕분에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구절들.

수업 시간, 선생님은 우리에게 자꾸 이야기를 시키셨다. 친구에 대해, 우정에 대해, 그리고 사랑에 대해. 수업 시간에 개념 위주의 짧은 단답형 대답을 제외하고 늘 듣기만 했던 우리는 거의 처음으로 다른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길게 이야기해야 했다. 말하기 수업이었다. 지금은 수업 중에 활동을 많이 하지만 그때는 내 견해를 오롯이 나의 말로 표현할 기회가, 그것도 고등학교 수업 중에는 흔치 않았다.

학교도서관에 새 책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시험지옥 속에서도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마다 교실은 책 읽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그즈음 우리가 가장 많이 읽었던 건 민음사 작가 총서의 책들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맑은 눈빛으로 문학과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아직 제대로 다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그 열정만은 오롯이 전해져서 우리도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들은 대학생이 되어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지도하셨던 문학(시) 동아리 ‘가락’은 똘똘한 친구들이 대를 이어 문학과 사회에 대한 고민과 열정을 키워 가는 요람이었다. 글쓰기에 자신이 없었던 난 가락에 속하지 못했지만 시와 문학은 우리 주변에 늘 가까이 있었다. 축제 때 열린 문학의 밤 행사에 선생님의 ‘분단시대’ 동인 시인들이 오셔서 시도 읽고 강의도 해 주셨다. 아직 유명하기 전의 도종환 선생님도 그때 뵈었다.

정말 낭만적인 기억도 있다. 어느 날 방과 후, 반 체육대회에서 심판을 보셨던 선생님은 학급 뒤풀이에서 박인환의 시로 만든 ‘세월이 가면’ 노래를 불러 주셨다. 선생님은 정말 노래를 잘하셨다. 살짝 떨림이 있는 그 목소리. 쑥스러워서 한자리에 서 있지도 못하고 바지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시던 선생님. 아, 감수성 가득했던 우리들의 가슴을 어찌나 흔들었던지…. 하지만 그 이후로 우리가 아무리 졸라도 선생님의 ‘세월이 가면’ 노래는 들을 수 없었다. 너무 감상적이라 그만 부르겠다고 하셨던가? 




깨어 있는 인간으로 살아가기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을 하며 대구를 떠났다. 사범대학에 입학한 건, 고교 시절 선생님들의 영향이 컸다. 나도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방학이면 어김없이 대구를 찾았고 선생님을 만나 뵈었다. 선생님은 기꺼이 술 한 잔 사 주시며, 술김에, 젊은 치기에 고래고래 부르는 노래에 장단 맞춰 주셨다.

대학에 가고 어른이 되고 나서야 그 척박하고 서슬 퍼런 80년대 초,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고 운이 좋은 학생들이었는지 알게 됐다. 덕분에 받은 과제가 있다. ‘깨어 있는 인간으로 살아가기’. 대구 경북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민단체 활동가들 중 그 학교 출신이 여럿이다. 각자의 생활 영역에서 깨어 있는 시민으로 살아가기가 쉽지는 않다. 그것도 ‘보수의 본산 티케이(TK)’에서 말이다. 지난겨울 대구에서 만났던 한 후배가, 대구에서 배창환 선생님의 제자로, 선생님이 주신 과제를 하며 살아가기가 얼마나 고단한지 이야기할 때 우리는 웃음과 함께 꽤 큰 공감의 박수를 보냈다.

1988년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 은평구의 한 중학교에 역사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전교조 결성에 참여했다. 탈퇴 공작은 얼마나 집요했던지…. 경북 소백산 자락의 산골짜기 조부모님, 부모님이 사시는 마을에까지 지역 교육청 장학사가 찾아가 협박을 하고 갔다. 1년 반 만에 담임 한 번 못 해 보고 스물다섯 살, 학교 막내였던 나는 혼자 학교에서 쫓겨났다. 선생님과 나는 해직 동지가 되었다.

눈물을 쏟는 아이들을 달래 교문 안으로 들여보내고, 닫힌 교문 앞에서 혼자 펑펑 울다 돌아오곤 한 출근 투쟁은 내가 기억하는 한, 내 생애 가장 고단한 시간이었다. 아무 힘이 없었던 어린 학생들을 제외하곤 아무도 반기지 않는 학교였다. 함께 가입했던 동료들한테조차 내 존재는 고통이었으니까….

어느 날 교문 앞으로 출근하다 말고 대구로 도망쳤다. 선생님들이 그리웠다. 이미 몇 년 전에 여중으로 쫓겨 가셨던 배창환 선생님을 비롯하여 무려 열 분의 선생님들이 여중, 여고에서 해직되셨다. 고3 담임을 맡고 있던 선생님들도 ‘직권면직’이란 이름으로 하루아침에 학교에서 쫓겨나셨다. 대구 경북에서 처음으로 평교사회를 만들었고, 온갖 회유와 탄압 속에서도 힘 모아 재단의 부정이나 문제를 고치고, 교육의 본질로 돌아가고자 애쓰셨던 선생님들. 그 흔한 ‘탈퇴 각서’ 제출 요구 한 번 받아 보지 못한 채 그렇게 학교에서 쫓겨나셨다.

모교의 굳게 닫힌 교문 앞에 고1, 고2 담임 선생님, 2년 꼬박 수학, 국어 등을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들이 모두 서 계셨다. 교문 너머로 재단 편에 서서 선생님들을 막고 있는, 나를 가르쳤던 또 다른 선생님들의 모습도 보였다. 선생님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학생들. 선생님들은 어느 날 갑자기 선생님을 잃어버린 아이들의 힘겨웠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늘 가슴 아파하셨다. 해직 기간 동안, 길 위에서 늘 선생님들을 만났다. 전국 단위 집회가 열리면 대구지부 깃발을 찾아가 늘 선생님을 뵈었다.

내 결혼식 날, 선생님은 시를 보내 주셨고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던 지미미 선생님이 오셔서 읽어 주셨다. 


…… 이제 잠시, 흘러온 날들의 아픔을 흘려보내고

저 강물 흐르는 곳으로

흘러서 더욱 낮은 곳으로

마음 잔잔히 가라앉히고 갈 때가 되었습니다.

그대 앞에 전혀 새로운, 그러나 지금과 전혀 다르지 않을 그 길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 새로 맞이하는 동지와 함께.

-‘흐르면서 깊어지는 물과 같이’에서 


지치지 않고 따라가기 

4년 반 만에 복직했다. 복직한 지 일주일이 지나 나는 딸애의 엄마가 되었다. 나는 다시 교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선생님은 대구 지부장을 맡아 복직하지 않고 여전히 거리의 교사로 남으셨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 여전히 가난하셨던 선생님의 고단함이 짐작되고도 남았기에 선생님에게 독배를 쥐어 준 대구지부 선생님들을 원망했다. 우유 배달, 신문 배달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 가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선생님이 복직하실 때까지 나는 선생님을 생각하면 늘 막막했다.

10년 만에 선생님이 복직하셨다. 나도 두 딸애의 엄마이자 교사로 정신없이 살았다. 선생님은 언제나 청년 교사셨다. 지치지도 않고 수업에서 교육에서 삶에서 늘 부지런하셨다. 틈틈이 쓰신 시로 몇 권이나 시집을 출간하셨다. 아이들과 문학 수업을 하셨고 수업의 결과물은 책으로 만들어 내셨다. 그리고 못난 내게도 보내 주셨다. 벽진중 아이들의 졸업 문집 《별뫼 아이들, 마침내 세상으로 나서다》를 시작으로 김천여고 아이들의 창작 시집 《뜻밖의 선물》(휴머니스트, 2012) 산문집 《어느 아마추어 천문가처럼》(휴머니스트, 2013)을, 경주여고 창작 시집 《지금은 0교시》(한티재, 2014), 산문집 《채식주의자라는 이름으로》(작은숲, 2015)를 펴내셨다. 우리는 안다. 아이들과의 수업 결과물을 책으로 엮어 내는 것이 얼마나 큰 노동과 시간, 열정이 필요한 일인지. 학급 문집 하나 낼 때도 중간중간 때려치우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다.

그 일을 하지 못할 이유는 백 가지도 넘는다. 일단 하나의 주제로 지속적으로 수업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 아이들은 “맨날 이거만 해?” “또야?” 하며 툴툴거리고, 학부모들은 “애들 공부할 게 많은데 이것만 해서 걱정”이라는 불만을 내비치고, 심지어 동료 선생님들까지도 “애들이 그것만 붙잡고 있다”고 은근히 싫은 기색을 보인다. 수업과 시험 틈틈이 글 내라고 채근하고, 피드백 하고 돌려주며 수정하게 하고, 글 모으고, 편집하고, 교정보고 해야 하는 노동. 선생님은 퇴임하는 그날까지 그 일을 계속하셨다. 친필 사인이 담긴 책은 지금도 너무나 감사하고 자랑하며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지만, 책을 볼 때면 사실 난 조금 불편하다. 좀 더 열정을 가지고 노동을 아끼지 않는 선생이 되라는 가르침으로 느껴져 자꾸 교사로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게 만들기에.

2006년 선생님의 시집 《겨울 가야산》(실천문학사)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선생님은 젊은 시절 벗들과 함께 드나들었던, 70, 80년대 대구 민주화 운동의 성지, ‘곡주사 할매집’에 제자들을 초대하셨다. 그날, 초대받은 나도 케이티엑스를 타고 정말 오랜만에 대구로 향했다. 행사장엔 모교 1회 졸업생 선배부터 많은 후배들, 그때 선생님이 계시던 김천여고 제자들까지 모였다. 또 다른 은사님이신 지미미 선생님도 함께하셨다.

돌아가면서 인사 한마디씩 하는데, 마이크는 내게도 돌아왔다.

“선생님들 참 좋으시겠어요. 저 같은 제자를 두셔서요.”

폭소가 터졌다.

“저도 교단에 서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선생 하다 어려운 상황, 시험에 놓이게 될 때 저는 선생님들을 떠올립니다. 선생님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하셨더라? 선생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나중에 선생이 된 제자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저를 떠올린다면 저는 최고로 행복한 선생이 될 것 같아요. 그러니 선생님들, 저 같은 제자 두셔서 정말 행복하시지 않으세요?”

선생님들은 맞다며 박수를 치셨다. 그건 하나도 과장하지 않은 진실이었다. 선생님들은 그렇게 30년 가까이 되는 교사 생활 내내, 내 굳건한 기둥이고 멘토셨다.

그날의 출판기념회는 뜻밖에도 기념회라기보다는 선생님의 수업이었다. 강산이 몇 번 변한 세월에도, 선생님은 당신이 두고 떠나온 아이들, 그 남은 아이들이 입었을 상처와 모진 시련이 가슴 아프셨고, 늘 선생님께 빚으로 남아 있었던 게다. 선생님은 그날의 그 아이들을 만나 그때 마무리하지 못한 수업을 이어 가셨다. 이제는 중년의 어른이 된 아이들.

행복한 수업이었다. 수업 후에 우리 모두는 선생님으로부터 예쁜 비닐에 싼 붉은 장미 한 송이씩을 선물로 받았다. 따뜻한 위로였고 감동이었다. 선생님 얼굴에도 밀린 숙제를 다 한 이의 홀가분함이 묻어 있었다. 훗날, 선생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나도 아이들도 마음속에 위로받아야 할 그늘 같은 그 무엇이 늘 남아 있었다. 상처는 아프더라도 상처를 돌아보고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넘어설 수가 있고, 그 상처에 역사적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때 우리는 어두운 시대가 우리에게 강요한 그늘을 벗어던지고 환한 햇살 속으로 다시 걸어 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이야기 시, 우리들의 수업 풍경》 서문에서 


작년 초, 여전히 청년이신 선생님이 정년 퇴임하셨다. 그리고 그해 하반기, 선생님은 시집 《별들의 고향을 다녀오다》(실천문학사, 2019)를 내시고 11월 초에 다시 대구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50대 중반의 우리들부터 대학생까지 선생님이 거쳐 오신 학교의 제자들이 가득했다. 그날 읽었던 선생님 시집 속의 시 한 편. 


그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교무실로

나의 오랜 제자들이 눈꽃 빛 백설기를 보내왔다.

전 교실 아이들에게 다 나눠 주고도 남을 만큼,

떡 하나하나마다 곱게 싼 겉포장에 가지런히 새긴 글,

-위대한 평교사, 선생님의 퇴임을 축하드립니다! 

그 포장에 꽂힌 내 심장이 우르르 흔들렸다.

아, 내가 오늘 정말 떠나는구나, 하는 떨림이 올라오고

그 옛날, 아이들 앞에 부끄럽지 않으려고

숨통이 막혀 죽어가는 학교를 고쳐 세우려고

모진 칼바람 맞서는 아픔 속에 다시 태어나야만 했던

‘평교사’, 이제는 바래져가는 그 이름 앞에

‘위대한’이란 수식어를 붙일 줄 아는 제자들이 있어

그동안 헛살지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따라왔다……

-‘백설기’에서 


내 심장도 우르르 떨렸다. 위대한 평교사 선생님이 교단을 떠나시던 날 보낸 이 지극한 응원! 그리고 우린 또 한 권의 작은 시집을 선물로 받았다. 《이야기 시, 우리들의 수업 풍경》. 2006년의 《겨울 가야산》 출판기념회에서 있었던 수업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 시였다. 그날 모였던 제자들 한 명 한 명의 사연과 말과 마음을 빠짐없이 담아서 선생님이 건넨 졸업 앨범이었다.

지난 스승의 날, 난 선생님께 문자를 보냈다. “선생님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도 나도 쑥스러워 감사하단 말 한마디 쉽게 못 하는 경상도 출신인데다 선생님을 떠올리면 마음 한가득 차오르는 무언가가 있어 문자 하나로 인사를 전하는 게 늘 망설여졌다. 그것도 스승의 날, 내 인생의 스승에게 마음을 전하는 일이기에 기념일의 무게를 감당할 만한 말을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랬다. 선생님은 날 가르치기만 한 게 아니라 키워 주셨다. 사람으로, 선생으로 키워 주셨다. 당신의 삶 속에서 쉼 없는 실천으로 보여 주셨다.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노동을 보태셨다. 한결같은 치열함으로, 아이들과 함께하는 청년 선생으로 평생 살아오셨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걸 보고 나는 자랐다. 선생님의 제자라는 것이 행복하다. 늘 기댈 언덕이 있어 든든하다.

이제 나 역시 선생으로 살아온 세월이 꽤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선생님은 ‘나는 인간으로, 선생으로 잘 살아가고 있나?’ 자꾸만 내가 지나온 발걸음을 뒤돌아보게 만드신다. 그래도 선생님께 받은 마음과 추억을 잊지 않고 한 발 내딛으려 한다. 배창환의 제자, 그것도 선생으로 살아가는 일은 그래서 좀 버겁기도 하다. 




글쓴이 소개

경북 소백산 자락의 첩첩산중 보수적인 대가족, 맏손녀로 태어나 산골 마을 여자 대학생 1호가 되었습니다. 1989년, 스물다섯 살 꽃다운 나이에 전교조 가입으로 해직, 서른 살 남산만 한 배를 안고 복직했습니다. 여러 학교를 거쳤지만 혁신학교 삼정중에서 보낸 시간이 가장 행복하고 빛납니다. 교단을 떠나는 날까지도 아이들과 생활하는 게 즐거웠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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