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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사랑한미술관 Oct 25. 2021

누군가와의 마지막을 자주 생각하는 당신에게

최은영 작가 <모래로 지은 집> & 박형지 작가 <무제>

* 유튜브 영상의 스크립트입니다. 영상은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누군가와의 마지막을 자주 생각하는 당신에게 | 최은영 작가 | 모래로 지은  | 내게 무해한 사람 | 박형지 작가 | 무제 |  블룸 | 하이트 컬렉션 https://youtu.be/dK4xrVmZDc8



안녕하세요. 내가 사랑한 미술관입니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에 실려 있는 <모래로 지은 집>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입니다. 여러 면에서 저와 닮은 주인공을 보며 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인데요. 소설은 고등학교 온라인 동아리에서 익명으로 활동하던 친구들이 학교를 졸업한 뒤 오프라인 정모에서 만나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정모에는 온라인에서 '나비', '모래', '공무'라는 아이디를 쓰던 친구 셋이 나오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소설은 나비의 시선에서 풀어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과 모래, 공무에 대한 나비의 생각이나 감정이 소설의 주를 이룹니다. 저는 나비를 보며 그녀가 저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평소에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었던 저의 어떤 면이 나비라는 인물을 통해 구체적이고 또렷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나비는 정모 이후 모래의 관심을 유난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반기며 이렇게 말합니다.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사람에게 연연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상하고 망가지고 비뚤어진다고 생각했으니까. 구질구질하고 비뚤어진 인간이 되느니 차라리 초연하고 외로운 인간이 되는 편을 선택하고 싶었다.'


모래의 남자친구를 두고 언쟁을 벌이다 모래에게서 ' 이런 감정 모르잖아.'라는 말을 듣고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모래의 말은 맞았다. 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자아를 부수고 다른 사람을 껴안을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나에게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영혼은 "안전제일"이라고 적힌 조끼를 입고 헬멧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상처받으면서까지 누군가를 너의 삶으로 흡수한다는 것은 파멸. 조끼를 입고 헬멧을 쓴 영혼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정모에 나오길 잘했던  같냐고 묻는 공무의 질문 뒤에는 이런 내용이 이어집니다.


'공무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랑 있으면 편해. 사람들이랑 있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편할 수 있지? 그런 생각도 들고. 이게 얼마나 갈까."

"넌 꼭 오래 살아본 사람처럼 말한다. 얼마나 갈지가 그렇게 중요해?"

공무가 관계의 지속을 바라는 마음을 유치하다 비웃는 것 같다고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응. 나는 그래"

나도 최대한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우리 둘 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미래가 환상일 뿐이라는 거 알아. 우리는 현재만을 살 뿐이고, 모든 일의 끝을 어림하는 게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도 알아. 그렇지만.'


나비는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관계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누군가에게 마음을 줬다가 상처 받는 것이 무서워서 누군가를 자기 삶 안으로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나비 스스로도 사람은 현재만을 살기에 어떤 일의 끝을 미리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걸 알지만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나비의 이런 모습이 저와 비슷하다고 느꼈는데요. 나비와 제가 인간 관계에 회의적인 이유 중 하나는 어떤 관계든 영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비와 제가 어떤 관계의 마지막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면 박형지 작가는 예술 작품의 끝에 대해 고민하고 이를 소재로 한 작품을 선보였는데요. 지난 영상에서 박형진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며 언급했던 하이트 컬렉션의 전시 <인 블룸>에서 보았던 <무제>라는 작품입니다. 박형지 작가는 예술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데 반해 폐기되는 것은 한 순간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작업을 오랜 시간에 걸쳐 폐기시켜보기로 합니다.


작가는 꽃을 그린 그림을 길가에 걸어두고 햇빛과 바람, 비 등에 그대로 노출시켜 자연스럽게 작품이 폐기되는 과정을 영상으로 담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림은 햇빛에 빛이 바래고 바람에 색감이 씻겨나가 점점 본래의 색을 잃어버립니다. 그림 속 꽃이 점점 희미해지는 동안 작품 앞에 심어둔 씨앗에서는 싹이 터서 꽃을 피우는데요. 그 모습이 수많은 인연이 오고 가는 우리 인생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런 인생에서 제가 할 일은 누군가와의 마지막을 미리 가늠하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과 보내는 순간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시장에는 영상에서 작가가 폐기시키고자 했던 작품이 희미한 흔적을 간직한 채 영상과 함께 걸려있었는데요. 희미해진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그 모습이 한 때 마음을 나눴던 사람들이 떠난 자리와 닮아 보였습니다. 인연이 끝났다고 해서 그들과 보낸 시간, 주고 받은 마음까지 모두 한 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이렇게 점점 희미해지는 것이겠죠. 그림은 그 흔적들이 남아있는 한 우리가 누군가와 함께 보낸 시간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고 저를 위로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소설을 읽고 나서 나비처럼 무심했던 제게 다가와 열심히 관심과 애정을 쏟아준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는데요. 그 고맙고 미안한 마음과 박형지 작가의 작품에서 받은 위로 덕분에 저도 용기를 내보려고 합니다. ‘안전제일’이라 적힌 헬멧과 조끼는 잠깐 벗어두고 이제는 제가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 보려고요. 마지막으로 이 영상을 빌려 제게 먼저 손 내밀어준 제 인생의 모래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영상이 마음에 드셨다면 좋아요와 구독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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