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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사랑한미술관 Jan 17. 2022

좋아하는 예술가와 동시대를 사는 일

권현빈 작가 <Hourglass> @갤러리 기체


* 유튜브 영상의 스크립트입니다. 영상은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좋아하는 예술가와 동시대를 사는 일 | 권현빈 작가 | Hourglass | 갤러리 기체 | 전시 감상

https://youtu.be/Qo91HBa7uPM




안녕하세요. 내가 사랑한 미술관입니다.


현재 국내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전시회에 관심을 가지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많습니다.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거나 여러 이유로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않는 이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즐거움이죠. 같은 작가 혹은 작품을 여러 전시에서 만나게 되는 경우에는 기획 의도 등에 따라 같은 작품을 다르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관심 있는 작가의 새로운 전시 소식이 들리면 설레는 마음으로 전시를 보러 갈 수도 있습니다. 단체전에서 마음에 드는 작가를 발견하면 작품 수가 많지 않아 아쉬워하며 어서 개인전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재미도 있는데요. 올해 첫 전시로 보고 온 전시가 바로 이런 마음으로 기다렸던 권현빈 작가의 개인전입니다.


권현빈 작가를 처음 접한 건 2020년 여름 갤러리 P21에서 열린 단체전 <서러운 빛>에서였습니다. 이 전시는 지난 영상에서 밀란 쿤데라의 소설 「무의미의 축제」와 함께 다룬 적이 있는데요. 권현빈 작가의 작품을 보고 처음으로 '돌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건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전까지는 돌로 만든 작품을 보고 감흥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돌이라는 재료의 물성이 드러나 있는 작품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 조각들은 가공을 많이 하지 않아 돌의 본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재료의 질감과 무늬, 색감만으로도 이렇게나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거기에 작가가 물감으로 그리거나 돌을 쪼아서 새겨 넣은 선이나 면 같은 회화적인 요소가 더해져 돌로 그린 아름다운 추상화를 보는 듯 했습니다.


작년 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단체전 <작아져서 점이 되었다 사라지는>에서 권현빈 작가의 작품을 두 번째로 만났습니다. 일 년 전에 보았던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분위기는 비슷하지만 작품의 크기가 좀더 커지고 돌 위에 그린 그림 같은 회화적 요소가 많이 줄었습니다. 그래서 돌의 종류나 절단된 방식에 따라 매끄럽거나 거친 질감을 가진 단면들이 눈에 띄었는데 그걸 보니 왠지 작품을 직접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더라고요. 작품을 만질 수는 없으니 손 대신 시선으로 작품을 만지듯 최대한 찬찬히 들여다보며 촉감을 상상해보는 과정이 재밌었습니다.


돌 위로는 물감으로 그린 그림 대신 작가가 뚫고 새겨 넣은 여러 구멍과 미세한 선들이 있었는데 돌이란 재료가 품고 있는 길고 긴 시간 때문인지 이것들이 각각의 조각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암호처럼 느껴졌습니다. 한쪽에는 고고학자가 오래된 유적이나 유물을 발굴할 때 하듯이 옆에 있는 작품을 탁본한 종이가 놓여있었는데 이 또한 암호를 해석하기 위한 과정처럼 보여서 더 그런 인상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암호를 풀 실마리를 발견하기 위해 돌 위로 새겨진 희미한 자국들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여다보게 되더라고요.


얼마 전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갤러리 기체에서 권현빈 작가의 개인전 <Hourglass>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올해 첫 전시로 이 전시를 보고 왔습니다. 서초동에 있던 갤러리 기체가 삼청동으로 이사하고 처음 가보는 것이었는데 건물의 한 층만 쓰던 전과 달리 3층짜리 건물 안팎을 모두 전시장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각 층의 전시장 형태가 모두 다르고 야외 공간까지 활용해 전시 공간과 동선이 단조롭지 않은 점이 좋았습니다. 전시도 전시지만 공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겨울이 지나고 다음 계절들이 왔을 때의 이곳의 모습을 상상하고 기대하게 되더라고요.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권현빈 작가의 신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지금까지의 작업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얀 대리석을 캔버스 삼아 그 위에 푸른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연작들입니다. 첫 번째로 언급한 작품들은 새하얀 대리석 위로 갈색과 푸른색 물감을 칠한 것인데요. 전작들이 짙은 아이보리, 갈색, 검정색 계열의 돌을 써서 땅에서 떨어져 나온 것처럼 보였다면 이번에 소개된 작품들은 물감이 표면에 자연스럽게 물들어 있는 모습과 아주 맑은 색감 때문에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바다 중에서도 적도 부근 같은 따뜻한 곳이 아니라 빙하가 둥둥 떠다니는 극지방의 차디찬 바다 말입니다. 작품들을 보면서 마음 속에 하나도 오염되지 않은 투명하고 깨끗한 바다의 모습이 떠올랐고 이어서 제 마음에까지 그 맑고 차가운 기운이 번져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또다른 유형의 작품은 하얀 대리석을 캔버스와 비슷하게 두께가 얇은 원기둥이나 사각형 모양 등으로 만들고 돌을 쪼아 그 위에 격자나 선, 점 등의 기하학적 요소를 새겨 넣은 뒤 푸른색 물감을 칠한 것입니다. 돌을 쪼아 만든 선이나 점의 깊이에 따라 물감이 고이는 정도가 달라져 투명에 가까운 파랑에서 짙은 파랑까지 다양한 농도의 푸른색을 볼 수 있습니다. 넓게 칠해져 있는 푸른색 물감이 번져 있는 자국을 보면 종이에 채색한 모습과 비슷한데 그 위로 사포처럼 거친 대리석의 질감이 드러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시장의 작품들과 일반적인 회화를 비교해보니 종이, 돌과 같은 다양한 재료의 물성과 그것이 작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어 재밌었습니다.


이렇게 권현빈 작가는 돌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아름다운 추상화를 그리기도 하고 그것이 품고 있는 오래된 이야기를 암호처럼 드러내기도 하고 머나먼 곳의 맑고 차가운 바다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그가 선사하는 이 모든 것들을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만끽할 수 있어 기쁩니다.


갤러리 기체에서 열리고 있는 권현빈 작가의 개인전 <Hourglass>는 2022년 1월 22일 토요일까지 계속됩니다. 사진과 영상으로는 세세한 부분이나 실제 색감까지 정확하게 담기 어렵기 때문에 직접 가서 작은 부분까지 놓치지 말고 관람하시기를 추천합니다.


영상이 마음에 드셨다면 좋아요와 구독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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