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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강인성 Feb 20. 2023

최민식vs송강호를 정확하게 답 내릴 수 있을까?

절대적으로 좋은 연기가 있는가에 대해

제가 가지고 있는 취미 중 하나는 논쟁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실없는 옛날이야기만 하다가도 불현듯 진지한 이야기를 하곤 하죠. 그때 저는 그  틈을 노립니다. 몹시 곤란한 질문을 끼워 넣을 순간을 말이죠. 질문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상대방은 홀린 듯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답이 나오면 그때부터 논쟁은 시작됩니다. 전 그게 그렇게 재밌더라고요. 제가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도 그 논쟁을 즐기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논쟁도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저번주에 세상에서 제일 친한 후배들과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다들 연극동아리 후배이고 거기다 그중 한 명은 연극배우를 하고 있는 친구이기에 술자리에서 배우와 연기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죠. 이야기의 시작은 약간 유치했습니다. 송강호 vs 최민식. 누가 더 연기를 잘하는가. 역시 의미 없는 줄 세우기와 대결만큼 재밌는 것도 없죠. 개인적으로 저는 황정민 배우를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배우후배에게 질문했어요. 황정민 vs 하정우. 이거 당연히 황정민 아닙니까? 그러나 후배는 하정우를 선택하더군요. 여기서 황정민과 하정우의 연기를 분석하진 않겠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후배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면서 끊임없이 표했던 말들입니다. 어떤 말인가 하면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데 사람들마다 생각은 다 다르니까요.", "어떻게 누가 더 연기를 잘하는지 알 수 있겠어요." 같은 말이요. 반복적으로 그런 말이 나오는 걸 들은 저에게 그 틈이 보였습니다. 곤란한 질문을 던질 타이밍이죠. 결국 못 참고 질문을 해버렸습니다.

"그러면 너는 절대적으로 더 좋은 연기는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저는 개인의 주관성을 뛰어넘은 절대적으로 더 좋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준이 어디에 있냐고 한다면 현상계를 뛰어넘은 이데아의 세계에, 공통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의식 구조 중 이성의 영역에, 현대 문화예술산업구조가 만들어낸 자본성 속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입장을 앞으로 연기절대주의라 하겠습니다.

반대로 후배는 연기란 개인의 주관성의 영역이기에 상대적이지 절대적으로 더 좋은 연기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술 안에 있는 아름다움은 관념이기에 모두가 합의 가능한 좋은 연기를 판단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죠. 후배는 그저 자기가 생각했을 때 좋다고 여기는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라 말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을 연기상대주의라 하겠습니다.


일단은 어려운 말들은 재껴두고 논쟁에서 주되게 다루었던 각각의 명제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논쟁을 의미 있게 이끌어가기 위해선 문제가 되는 명제들을 단순화해야 하거든요. 논쟁 중 문제 삼았던 명제들은 이러합니다.

1. [우리는 어느 정도 합의 가능한 수준으로 배우가 가진 연기 실력의 우위를 나눌 수 있다]

2. [연기란 수많은 영화예술의 요소 중 하나이기에 한 배우의 연기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건 불가능하다]

3. [좋은 배우들의 연기는 스타일의 차이이지 실력의 차이가 아니다]

4. [좋은 연기의 기준은 모두가 다르기에 절대적으로 무엇이 좋은 연기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

위의 명제들이 실제로 논쟁 속에서 다루어졌던 명제들입니다. 사실 당연히 네 가지보다는 조금 더 많긴 했지만 이 네 명제 정도가 그나마 유의미한 명제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술 퍼마시다 하는 논쟁에서 더 많은 걸 바랄 수는 없죠. 각각의 명제들은 연기절대주의와 상대주의 두 입장을 증명하는 명제입니다. 그렇다는 건 위의 명제들에 대해 반박하는 행위가 바로 논쟁의 내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하나 뜯어먹어보죠.

첫 번째 명제는 연기절대주의 쪽의 명제입니다. 우리는 분명 다수가 동의할만한 내용으로 배우들의 연기실력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송강호의 연기가 배우후배의 연기보다 훌륭하다는 건 100명 중에 100명이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에요. 너도 동의하지? 이러한 합의는 결국 연기 실력을 평가하는 데에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보편성은 절대주의에서 가장 필요한 요소 중 하나이고요. 

그러나 이 명제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이렇습니다. "어느 정도 합의 가능의 기준은 무엇인가? 100명 중 90명이 합의하면 그 배우는 좋은 배우인가? 80명은? 70명은?" 이러한 문제를 '연속성의 문제'라고 합니다.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는 선에서 어디 하나를 뚝 잘라 기준을 만들어야 하는데, 도대체 보편의 기준이 뭐냐 이겁니다. 그 기준은 누가 정하고요. 결국 양으로 판단한다는 건 그 자체로 애매함을 가질 수밖에 없는 거죠. 

또 이런 문제도 있습니다. 일반 대중 95명이 좋다고 하는데 영화평론가 5명이 구리다고 한다면요? 반대로 영화평론가 95명은 좋다고 하는데 일반 대중 5명이 좋다고 한다면? 영화평론가는 질적으로 더 정확한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양으로 치환할 수 있나요? 영화평론가 1명의 의견은 일반대중 몇 명의 평가와 맞먹습니까? 그게 아니면 영화평론가 1명과 일반관객 1명이 같은 가치의 평가를 내릴 수 있나요? 예술을 평가하는 데에 양적 평가가 중요합니까 질적 평가가 중요합니까?

 

두 번째는 연기상대주의 쪽의 명제라 할 수 있겠군요. 맞는 말입니다. 절대적으로 연기를 좋은 연기를 하는지 알기 위해선 한 배우의 연기를 순수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외부조건을 모두 제거해야 마땅하죠. 영화의 연출, 편집, 미술, 플롯은 한 배우의 연기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데에 있어선 방해요소일 뿐이죠. 그러나 그게 가능하려면, 완벽히 동일 조건에서 영화를 찍는 대신 캐스팅만 바뀐 영화를 찍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올드보이를 최민식 캐스팅 송강호 캐스팅 이렇게 두 번 찍는 거죠. 이게 가능합니까? 

 하지만 이 명제에 대한 확실한 반박은 있습니다. 구린 영화에서 좋은 연기를 펼친 배우가 있다는 것이요. 분명 영화의 모든 요소가 별로인데 연기만 좋은 영화가 있습니다. 최근에 기억나는 건 [종이의 집-공동경비구역]이네요. 각색, 연출, 편집 모두 정말 별로였지만 박해수의 연기는 훌륭했습니다. 그건 캐릭터를 뛰어넘는 연기 실력이었어요. 마찬가지로 모든 요소가 좋았는데 연기는 아쉬운 경우도 있습니다. 거기다 한 영화에서 거의 동일한 분량의 배역을 받았음에도 배우 사이에서 연기 역량의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왕왕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미 나름대로 외부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고 배우의 연기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모든 건 배우의 역량 차이지 한 영화 속에서 배우의 연기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건 가능한 일입니다.


나머지 두 명제에 대한 문제와 논쟁의 본격적인 내용은 2편에서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이런 소소한 논쟁을 심각하게 다루는 글을 간간이 올려보겠습니다. 일단 제가 재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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