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한탄]나는 시집을 참 잘 왔다고 생각했었다
나의 시부모님은 참 좋으신 분이다. 나를 잘 챙겨주시고, 이런 아들과 결혼해 줘서 고맙다고 하시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시고, 사주시며 나의 건강도 살뜰히 챙겨주신다.
이렇게 칭찬을 늘어놓는 것은 이번 명절 때 받은 충격적인 상황을 쓰기 전에 합리화의 여지가 있나 생각해 보기 위해서다.
명절당일에는 남편의 큰집에 방문한다. 그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사 음식은 며느리들이 다 준비해 온다. 시어머니는 명절 전날에 전을 부치고 음식을 준비하셨다. 제사상을 차리는 것도, 치우는 것도 모두 며느리들, 그러니까 시어머니와 큰어머니들의 일이다.
제사를 지내고 밥을 먹는다. 밥은 남자와 여자가 따로 먹는다. 사실 여기서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는 왜 밥을 따로 먹을까. 그것도 21세기에. 남자테이블은 앉아만 있고 여자들이 부지런히 밥을 차려 준다. 남편은 새로운 며느리에게 "물 가져다주세요, 잡채 더 가져다주세요." 등등 연신 주문을 한다. 물론 남편이 시키고 싶어서 시키는 것은 아니고 그 테이블에 큰아빠와 작은 아빠들이 필요해 보이는 것들을 아랫사람인 남편이 대신 말하는 것일 터이다. 그래도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자기가 먹을 것이지 왜 저렇게 시킬까.' 집에서는 남편이 나에게 물을 떠다 주고 밥도 차려준다. 그런데 큰집에 가면 저렇게 그냥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른 채 저렇게 시키고 있다. 아마 내가 이런 말을 집에 오는 길에 했었다면 괜한 부부싸움만 날게 뻔하다. 그냥 이렇게 브런치에 적을 뿐이다.
시어머니는 본인이 시집살이를 안 당했기 때문에 나에게도 잘 대해 주시는 것이라고 말하셨다. 나는 처음에는 이 말을 순진하게 믿었다. 그러나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시어머니가 참 대단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본인은 이런 시집살이를 겪고도 나한테는 이렇게 잘해주신다고?라는 생각이 든다.
시집살이가 꼭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받는 그런 육체적 힘듦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시어머니는 시어머니의 시어머니(남편의 할머니)에게서 이런 말씀을 들었다고 하셨다.
"요즘 손녀(나의 아기) 봐준다며. 그래도 남편한테 소홀히 하면 안 된다. 남편을 잘 챙겨야지, 그게 다 너의 복이다."
무언가 맞는 말인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기분 나쁜 말이다.
--이번 명절에도 앞서 말했듯이 남자들은 가만히 있고 여자들, 특히 시어머니와 큰엄마, 작은엄마 등 며느리들이 밥을 차렸다. 그러면서 남자들끼리 하는 말이 대박이다. "옛날에는 여자들 이름이 없었어." "남편을 하늘같이 모셔야지."
아, 정말 다 때려 엎고 나오고 싶은 곳이었다. 원래 이랬나?라는 생각이 든다. 결혼한 지 벌써 꽤 몇 년이 지났고, 거의 명절 때마다 왔었는데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시어머니는 이번 추석 명절에는 아기가 아직 어리니까 큰집에는 안 와도 된다고 하셨었다. 이래서 오지 말라고 하신 걸까.
물론 막상 나는 가서 아기 보고 있느라 제사상을 차리지도, 치우지도 않았고 크게 힘든 일은 없었다. 그냥 듣고 있기가 힘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당연히 사촌들에게 명절 잔소리도 이어진다.
-동생 낳아야지(아직 나한테 하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곧 나한테도 하시겠지.)
-내년에는 결혼해서 여기 오지 말아야지(아직 싱글이신 남편의 사촌누나에게 하는 말이다. 누가 봐도 결혼 생각은 없어 보인다. 혼자서 잘 사시는 분인데..)
-어서 빨리 자식 낳아야지.(이번 6월. 3개월 전에 결혼했는데 벌써 애를 낳으라니)
물론 이 정도 잔소리는 그냥 어른들이 다 그렇지 뭐,라고 넘길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런 말들을 듣고 과연 내년 설에는 얼마나 모일지 걱정이 되었다.
시누이가 이번 해에 결혼을 한다. 시누이는 올해까지만 오고 내년에는 큰집에 더 이상 안 온다고 한다. 시누이가 정말 부러웠다. 탈출해서 꼭 좋은 시댁으로 명절을 지내러 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