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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리머소녀 Jan 28. 2021

문제 속에 답이 있잖아

영알못 아들의 온라인 수업 일지

작년 9월 초에 시작된 큰아이의 두 번째 Term이 끝났다. 이곳 초등학교는 한 학년이 네 개의 Term으로 이루어져 Term을 마무리할 때마다 성적표를 주고, 새로운 교과 과정으로 넘어간다. 크리스마스이브부터 설날을 낀 주말까지 겨울방학이 약 열흘 간 있었고, 봄방학은 3월 말부터 열흘이다. 마지막 Term이 끝나면 6월 중순이 되고, 그때부터 9월까지 기나긴 여름방학에 들어간다.


작년 3월, 미국에서 코로나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패닉 바잉이 시작되던 거짓말 같은 타이밍에 우리 가족은 시카고에서 메릴랜드로 이사를 했다. 이삿짐 박스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상태로 아이가 배정될 학교에 찾아갔으나 코로나 비상사태로 인해 등록할 수 없었고, 그다음 주부터 메릴랜드주의 모든 공립학교들이 문을 닫아 버렸다. 그 문은 그로부터 10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굳게 닫혀있다. 학교 정문에 가면 벨을 누르고 용건을 간단히 말한 후 문 앞에서 문의사항을 해결하게 되어 있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건물 출입은 금지되어 있다. 학생들을 태운 차량으로 북적거려야 할 학교 주차장은 텅텅 비어있고, 학교 건물은 물론 주변에도 적막이 흘러 서글프기까지 하다.


온라인 교육이라도 받게 하려면 아이를 어서 등록시켜야 할 텐데, 학교로 출근하는 인력도 없었으니 차일피일 미뤄졌다. 끈질긴 문의 끝에 한 달쯤 후 드디어 교육청에서 전화가 왔고, 아이를 학급에 배정해 주었다. 그런데 학급만 정해졌을 뿐, 담임 선생님이나 같은 반 친구들이 누구인지도 잘 모른 채 학습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과제만 제출하다가 한 학년도가 끝나 버렸다. 과제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아이를 붙들고 교과 과정을 따라가 보았지만, 대체 내가 여기까지 와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영어 실력이 부족한 아이를 EL(영어 보충 교육) 과정에 넣고 싶어 수차례 문의해도 학기가 다 끝날 때까지 아무 연락도 받지 못했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지난 9월 초에 3학년이 시작되었고, 아이는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한 학년을 처음부터 제대로 시작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나눠주는 크롬북을 받아왔는데, 두 번째 Term이 되니 터치스크린 기능이 있는 새 것으로 교환해주었다. 코로나 지원금을 받았다고 하더니 오래된 크롬북부터 싹 갈아준 것 같았다. 온라인 수업은 처음이라 아이는 물론 엄마도 우왕좌왕 헤맸지만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었다. 지난 몇 달간 구글 미트에서 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받고 발표, 질문, 토론, 퀴즈, 과제, 시험 등 많은 것들이 온라인 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내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으며 이렇게도 교육이 가능하다는 걸 체험했다.


9시부터 15분간 담임선생님과 미팅이 있는데, 그 시간에 선생님은 아이들의 안부를 묻고, 그 날 시간표와 함께 공부할 것들의 목차를 간단하게 브리핑해 주신다. 그리고 나면 체육/음악/미술 시간이 있다. 체육 시간에는 음악을 틀어놓고 신나게 춤을 추기도 하고, 푸시업이나 윗몸일으키기, 스트레칭, 볼링이나 축구공 차기 같은 간단한 운동을 하기도 한다. 음악 시간에는 차이코프스키, 베토벤, 모차르트 같은 작곡가에 대해 배우고 클래식 음악 감상도 하고, 악보 읽는 방법도 배운다. 아이가 즐거워하는 미술 시간에는 여러 가지 작품을 만들고, 만든 작품을 사진 찍어 과제로 올린다.


10시 30분부터 한 시간은 수학 시간인데, 내용 자체는 한국 수학에 비해 많이 쉬워 보인다. 3학년 1학기인데 이제야 한자릿수 곱셈, 나눗셈과 분수의 개념을 배우고 있다. 구구단을 외우게 하지도 않고 3에다 3을 곱한 것과 3을 세 번 더한 것이 같다는 개념만 열심히 가르친다. 아이가 다 아는 내용이니 잘하겠거니 안심할 수는 없는 게, 모든 과제와 시험이 서술형이기 때문이다. 간단한 문제라도 질문의 핵심을 끄집어내 아이의 언어로 요약하고, 그 밑에는 수식과 그림을 이용해 풀이과정을 적고, 답은 완전한 문장(full sentence)으로 서술해야 점수가 나온다.


아이는 문제를 읽는 즉시 답을 알지만, 문제의 핵심을 뽑아내고 풀이와 답을 쓰는 과정을 힘들어했다. PDF 파일을 편집하는 Kami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고 텍스트 박스를 만드는 방법도 배워야 했다. 문제가 쉽다면서 금세 다 풀어냈는데, 풀이 과정과 답을 서술하는 방법이 잘못되어 D를 받기도 했다. 말이 D이지, 3에 6을 곱한 게 18이라는 식의 과제에 그런 점수를 받아오면 하염없이 한숨이 나오고 눈깔이 뒤집히는 나 자신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주어와 동사가 있는 문장으로 답을 써내라고 하니까 "The answer is 18 (답은 18이다)"라고 써놓은 아드님. 이를 어찌하오리까. 깝깝한 마음에 아이 방 책상 앞에 대문짝만 하게 이렇게 써붙여 놓았다.


답 쓰기 전에 문제를 다시 읽어봐!
문제 속에 답이 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선생님께 여쭤보면 기회를 한 번 더 주시기도 한다는 거였다. 과제 점수가 좋지 않을 경우 아이가 선생님께 직접 메시지를 보내도록 했다. 몇 번 그렇게 했더니 아예 선생님께서 과제 평가란 옆에 "If you want to try it again and raise your score, let me know (다시 한번 풀어서 점수를 올리고 싶으면 알려줘)"라고 메시지를 남겨 놓으시기도 했다. 첫 Term에는 어마어마하게 헤매던 아이가 이제는 대부분의 과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좋은 점수를 받고 있다. 물론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스스로 선생님께 메시지를 보내 다시 기회를 얻기도 하고 말이다. 2층 부엌에서 3층 아이 방을 뻔질나게 오르내리던 나의 하루는 이제 일주일에 한두 번 과제를 다 제출했는지만 체크하면 될 정도로 편해졌다. 덕분에 요즘은 둘째 아이와 보드게임도 하고 색칠공부와 베이킹도 할 수 있게 되었다.


11시 30분부터 1시까지 점심시간에는 집밥을 먹는다. 주로 볶음밥, 김밥, 주먹밥, 유부초밥과 우동, 떡볶이와 군만두, 카레 돈가스, 짜장밥, 파스타 등 한그릇 음식으로 간단하게 해결하고 있다. 아이는 점심 먹기 전에 머리를 식힌다며 아이패드로 게임을 잠깐 하고는 점심을 먹고 동생이랑 30분 정도 집이 무너져라 뛰어논다. 가끔은 저러다 진짜 천정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날씨도 추운데 동생이랑 둘이 깔깔대고 뛰놀지도 못하면 스트레스는 어디 가서 푼단 말인가. 방에서 들려오는 쿵쾅쿵쾅 소음을 배경 삼아 다방커피를 홀짝이며 성경을 읽거나 틈새 독서를 하는 내 시간은 누가 뭐래도 꿀맛이다.


점심시간 후에는 1시간 15분 동안 영어 Reading/Writing을 한다. 처음에는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정규 과정에 들어갔는데, 아무래도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학부모 상담 때 EL 과정에 넣어달라고 다시 요청을 했다. EL 반에는 아이들이 세 명 밖에 없다가, 그나마도 한 명이 전학을 가고 또 한 명은 수료하는 바람에 요즘은 개인교습을 받고 있다. EL 선생님은 영어를 체계적으로 가르쳐주신다기보다는 정규 영어 Reading 수업에서 어려운 단어나 표현 등을 보충하는 식으로 수업을 진행하신다. 아이를 얼마나 사랑으로 대하시는지 문 밖에서 듣다가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크롬북 화면으로 선생님과 대화하는 그 시간 아이 얼굴엔 유난히 화색이 돈다.


2시 30분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동생이랑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를 본다. 잠시 후 옆집 아이들이 초인종을 누르고 우리 아이들을 불러낸다. 요즘은 너프건으로 총싸움을 하느라 집집마다 난리가 났다. 가끔은 재택근무 중인 아빠들도 최신 너프건을 들고 뛰어나와 아이들과 같이 논다.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이웃들과 왔다 갔다 하면서 훨씬 더 즐겁게 지낼 수 있을 텐데 생각하다가도, 지금은 함께 뛰어놀 동네 아이들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임을 기억한다.


고개를 푹 숙이고 시카고 초등학교 식당에 혼자 앉아 도시락을 먹던 그 아들은 어디로 갔는지, 이제는 이곳 아이들과 신나게 영어로 떠들며 노는 자신감 충만한 아들이 내 앞에 있다. 한자릿수 곱셈 문제에서 D를 받아도 주눅 들지 않고 선생님께 기회를 한 번 더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아들. 유창하지 않은 영어로 수업 참여도 발표도 열심히 하는 아들. 점심시간과 쉬는 시간에는 여섯 살 어린 동생과 격하게 놀아주는 아들. 온라인 수업이 1년 이상 지속될지 모르는 상황 가운데에서도 밝고 씩씩하게 자라나는 아들. 매일매일이 똑같아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일상이지만, 우리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답을 찾아가고 있다. 답은 언제나 문제 속에 있으니까 말이다.


일주일에 한 명씩 돌아가며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시간이 있다. 이걸 받아 읽으며 마음이 따뜻하고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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