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아는 것
입주 취소한 새집을 덜컥 줍줍하고 어안이 벙벙해져 집에 돌아와서는 컴퓨터를 켰다. 에이전트는 DocuSign(비대면 전자계약 프로그램)을 통해 바로 계약서를 보내왔고, 계약서에 서명하고 계약금(earnest money deposit, EMD, 통상 매매가의 20%에 해당)을 송금하고 난 후에야 이 집을 우리 것으로 확정한다고 했다. 비어있는 집이기 때문에 이사 날짜는 빠를수록 좋지만 렌트 만기일과 최대한 맞춰주겠다고 했다. 남편과 나란히 앉아 계약서를 읽고 있는데 또다시 전화가 왔다. 집을 보러 온다는 사람들이 계속 연락 오고 있는데, 이 집을 확실하게 "Under Contract"로 표시해 두려면 우리가 계약금을 얼른 이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계약서를 훑어보고 나서 Quick Pay를 통해 일단 계약금부터 이체했다. 집을 사려고 한국에서 송금해 둔 금액을 바로 이체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는 혹시나 해서 School District Feeder를 검색해 보았다. 집을 보러 가서 에이전트에게 질문했을 때는 큰아이가 다니고 있던 초등학교와 동일한 학군이라고 했지만, 위치상 다른 초등학교에 더 가까운 것 같아서였다. 검색해 보니 역시 내 느낌이 맞았다. 같은 동네에 여러 개의 초등학교가 있을 경우 바로 길 건너라도 다른 학교로 배정되기도 하는데, School Feeder에 그 집 주소를 입력해 보니 다른 초등학교로 배정되는 지역이었다. 한국에서 이민을 오고, 시카고 학교에서 막 적응하기 시작할 무렵 메릴랜드로 이사를 오고, 코로나로 한동안 학교에 가지 못하다가 이제 막 학교로 돌아가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한 동네 안에서 이사라지만 또다시 전학을 시켜야 한다니 마음이 아팠다.
남편은 저녁 내내 별 말이 없더니 밤새도록 잠을 설친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대뜸 그 집을 사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보다 면적도 좁고, driveway도 좁고, 옆집, 앞집과의 간격도 좁은 데다가 집의 군데군데 마감이 싼 티가 난다고 했다. 거실과 부엌의 마루도 질 좋은 나무가 아니라 저렴한 자재를 쓴 것 같고, 화장실 바닥이 타일이 아니고 장판이었던 것도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짧은 시간에 구석구석 공사 자재까지 다 파악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비해 평수도 작고 마감도 대충 한 것 같은데 새집이라는 이유로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나는 집 주변이 공사판인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1년 내로 다 지어질 집들이라고 해도, 주변에 공사 자재들이 널려있고 먼지도 많이 날리고, 바깥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유해한 환경이었다. 이웃집 아이들과 서로 초인종을 누르고 불러내서 바깥에서 함께 뛰어노는 우리 동네가 많이 그리워질 것 같았다. 차로 5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라지만 매일 차로 데려다주고 기다렸다가 데리고 오기도 애매할 것 같았다.
고민이 되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동안 우리가 봐온 여러 집들은 이미 Under Contract 표시가 되어 올라오는 족족 사라지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할 만큼 망가져있던 타운하우스조차 생각보다 높은 가격에 팔려버린 것을 보자 마음이 더욱 요동쳤다. 이런 셀러마켓에서 새집을 만나기도 어려운 일인데. 하늘이 내린 기회를 차버리는 게 아닐까. 이 집을 포기했다가 가격이 점점 더 올라가거나 마음에 드는 집이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렌트 계약을 연장할 거면 통보해야 하는 시간도 다가오고 있는데 말이다.
한편 남편은 이미 마음을 결정했다면서, 이 집은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다고 했다. 차라리 렌트를 연장하고 천천히 찾아보는 한이 있어도 여러 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 집을 시세보다 비싼 값에 사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에이전트가 말해주었듯이 계약 체결 시점으로부터 7일 안에 계약을 해제할 수 있는 조항이 계약서에 있었고, 그 기간 안에 해제할 경우 아무런 페널티 없이 계약금 전액을 반환하도록 되어 있었다. 에이전트에게 바로 계약 해제(rescission of agreement)를 통보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매매계약에 근거하여 계약한 집 매매계약을 해제하기로 결정했다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그리고는 에이전트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계약하기 전에 학군을 미리 확인하지 못해 아이를 전학시켜야 하는 부분이 마음에 걸리고, 집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다급하게 결정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고만 간단하게 말했다. 에이전트는 전학시키는 학교도 좋은 학교이고 너무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 같다고 만유해 보다가 결국은 쌀쌀한 목소리로 계약금을 10일 이내에 계좌로 반환 처리하겠다고 했다.
아쉬움이나 후회보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공사판 먼지 속에서 살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다, 아이를 전학시키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다, 페널티 없이 계약금을 돌려받아 다행이다... 계약을 해제하고 나서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고 감사 제목만 떠오르는 것을 보니 이 결정은 잘한 것이었다. 이 세상에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 집은 딱 한 채인데, 그 집을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메모장을 열고 우리 가족이 원하는 집의 조건을 적어 내려갔다. 이 조건에 부합하는 집을 빨리 만나고 싶다고 기도하면서.
큰아이를 전학시키지 않아도 되는 초등학교 학군 안에 있을 것(학령기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이사할 때 반드시 동네 School Feeder를 확인해야 한다. 에이전트에게 물어봐도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많다)
3,000sqft (우리 동네에서는 이 정도가 평균 크기이다) 정도의 방 네 개, 화장실 세 개 이상인 집(싱글하우스의 경우 지하실 공사가 마무리된 집)
해가 잘 드는 남향집, 타운하우스의 경우 엔드 유닛(end-unit, 한쪽 벽만 이웃집과 공유하여 상대적으로 프라이버시가 있고 창문이 많아 해가 잘 드는 것이 장점)일 것
거실과 부엌은 좋은 재질의 나무 바닥(hardwood floor), 방은 카펫으로 되어 있는 집(바닥 난방이 되지 않기 때문에 방에는 카펫이 깔린 것이 아늑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는데, 이것은 개인적인 취향이다. 카펫 먼지 때문에 마룻바닥이나 장판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나 지하실(basement)이 있을 것
리빙룸이 한 개여도 좋지만, 두 개이면 금상첨화(한 공간은 TV를 놓고, 한 공간은 서재/사무실로 쓰고 싶었다)
차 두 대가 다 들어갈 수 있는 차고가 집에 붙어 있을 것(attached two-car garage)
우리는 과연 이런 집을 만날 수 있을까. 이런 집을 만난다고 해도 이렇게 핫한 셀러마켓에서 우리 같은 초보 이민자가 과연 매수까지 갈 수 있을 것인가. 렌트 계약 만료 전까지 집을 구할 수 있을까. 만약 렌트를 연장한다면 넉넉히 1년을 연장해야 할까, 아니면 월별(month-to-month)로 렌트를 지불하면서 계속 매수를 노려봐야 할까(월별로 지불하면 렌트가 훨씬 더 비싸게 책정된다). 여러 가지 의문들이 머릿속에 맴도는 가운데, 친구가 된 이웃집 미국 아줌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런 상황인데, 나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음. 내가 너라면 렌트를 연장하겠어. 내 마음에 쏙 드는 집이 나올 때까지 렌트로 살면서 찾아보겠어. 집이라는 게 한두 푼 하는 물건도 아니고 진짜로 사랑하는 걸 선택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