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주 취소한 새집을 덜컥
눈높이를 확 낮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이 거실이 두 개, 다이닝룸이 두 개씩 있으면 뭐 하나. 여름이면 잔디 깎으랴 겨울이면 눈 치우랴 엄청난 노력과 비용이 들 텐데 뒷마당이 아예 없는 집은 어떨까. 작은 공간에 살면 그 공간을 물건으로 채우지 않기 위해 노력하게 될 거고 유틸리티 비용도 낮아져 좀 더 절약할 수 있을 텐데. 미국 직장은 영문도 모르고 하루아침에 해고되어 짐 싸서 나와야 한다던데 정신 바짝 차리고 허리띠 졸라매야지. 남편은 이왕 집을 살 거면 아이들이 커서까지 널찍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집, 이왕이면 뒷마당도 있고 평수도 넉넉한 집에 살길 원했지만 내 마음은 이미 작고 좁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질로우에 지은 지 20년쯤 되는 작은 타운하우스 매물이 올라왔다. 사진 상으로는 아담하고 깔끔해 보였고, 동네 슈퍼, 음식점, 도서관, 스타벅스, 맥도널드, 서브웨이에 걸어 다닐 수 있는 좋은 위치였다. 질로우 매물과 함께 올라와 있는 중개인에게 연락해 바로 투어 신청을 했다. 벚꽃이 흩날리던 따뜻한 봄날 그 집 앞에는 중개인들과 그 집에 관심 있는 부부들이 삼삼오오 모여 투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 팀은 투어를 마칠 시간을 훌쩍 넘겨서까지 집 안에서 시간을 오래 끌었다.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무슨 사연이 있는 집인가 보다 싶었다. 페인트 칠을 새로 한 것 같은 부엌 천장에는 물이 흐른 자국 같은 게 있었고, 부엌 등은 망가져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 곳곳이 파여있었고 계단을 오를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안방과 방 한 개는 멀쩡했는데, 맨 마지막에 본 방 벽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고 붙박이장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고, 차고에도 벽에도 구멍이 뚫려 있었다. 혹시 정신병자가 살던 집이었을까, 가정폭력이나 범죄의 현장이었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고 자꾸 등골이 오싹해져 빨리 나가고 싶었다. 중개인도 놀란 눈치였는데, 매매가가 워낙 저렴하게 나왔으니 이런 집을 사서 직접 고칠 수 있다면 좋은 선택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애써 말했다. 우리 부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근처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고, 그 집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레드핀에 올라온 방 세 개, 화장실 두 개, 3층짜리 아담한 타운하우스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결정적으로 큰 길가 쪽이라 침실에서 들리는 소음이 상당했다. 또, 동네 외곽 쪽의 타운하우스는 페인트칠을 예쁘게 새로 하고 인테리어와 관리가 잘 되어 있었지만, 차고(garage)가 없이 집 앞의 공동주차장을 이용하는 형식이었다. 차가 비나 눈을 맞고 바깥에 서있는 것은 큰 문제는 아니지만, 쓰레기 처리가 불편할 것 같았다. 베란다 밑에 쓰레기통을 두고 쓰레기차가 오는 날 옆집 마당을 빙 돌아가 쓰레기통을 내놓아야 하는데, 하루이틀도 아니고 그 짓을 할 때마다 내가 왜 이런 집을 사서 이 고생을 하나 후회할 것 같았다. 자전거나 킥보드, 아이들 장난감 등 차고에 두고 사용하면 편리한 물건들이 많은데, 이런 것들을 보관할 곳도 마땅치 않아 결국은 지하의 넓은 공간이 창고화될 것 같았다. 우리 동네에서 집을 하나둘씩 보면 볼수록 당시 우리가 살고 있던 렌트 집이 얼마나 좋은 위치에 있고 얼마나 넓고 쾌적한지를 깨달았고, 덕분에 우리 눈이 상당히 높아져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남편이 재택근무하던 날, 아침에 눈 뜨자마자 질로우부터 확인하던 나는 우리 동네 뉴타운에 새로 지은 집이 올라온 것을 발견했다. 보통 새로 지은 집들은 빌더(건설사)들이 분양을 시작하는 시점에 제일 저렴하게 살 수 있고, 좋은 위치를 선점할 수 있다. 보통은 시간이 지날수록 분양가가 올라가며, 다 지어진 집을 파는 경우는 대부분 모델하우스로 사용되었던 집이거나 입주 직전 매수를 취소한 경우이다. 특히나 이렇게 부동산 시장이 들썩이고 모든 자재값이 올라가는 시점에는 다 지어진 새집을 구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새집을 보러 가는 경우에는 부동산 중개인을 끼기도 하지만, 우리는 일단 직접 가서 보기로 하고 분양 오피스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밝고 상냥한 여자는 그날 점심시간에 바로 보러 오라고, 너무 좋은 기회라고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오피스에 찾아갔더니 화려한 프린트 블라우스를 입고 액세서리를 주렁주렁 단 금발머리 백인 여자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여자는 우선 모델하우스부터 구경한 후 매물을 보러 가자고 했다. 새로 지은 타운하우스여서 나무랄 데 없이 깔끔하고 예뻤고, 요즘 지은 집답게 모던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평수는 우리가 렌트해서 살고 있던 타운하우스보다 작았지만, 1층 차고 옆에 꽤 넓은 거실 공간이 있어 그곳을 아이들의 놀이공간이나 사무실로 꾸미면 좋을 것 같았다. 2층에는 거실이 하나, 부엌과 다이닝룸이 하나씩 있었고, 발코니에 지붕이 있어 햇빛을 차단해 주고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형태였다. 그 공간에는 실내용 그네와 소파베드, 벽난로가 있어 내 집 발코니에서 럭셔리한 글램핑을 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모델하우스를 둘러본 후 백인 여자를 따라 차를 몰고 나와있는 매물을 보러 갔다. 그 여자는 우리에게 운이 너무 좋다고 하면서 그 집에 입주하기로 했던 가족이 정말 스위트한 4인 가족이었다고 했다. 군인인 남편이 퇴역하고 나서 살 집을 분양받아 몇 달 후에 이사를 들어오기로 되어있었는데, 퇴역 전 마지막으로 파병되었던 곳에서 변을 당해 입주를 취소했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누군가의 아픔이 또 누군가에겐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까... 라며 말끝을 흐리는데 뭐라고 반응을 해야 하는지. 우리는 구석구석을 들여다봤고, 나는 남편에게 이 집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사실 몇 가지가 마음에 살짝 걸리긴 했다. 가격이 동네 시세나 평수에 비해 높다는 점, 앞집과의 거리와 차고로 들어가는 driveway가 너무 좁다는 점, 주변에 신규분양하는 집들을 한참 짓고 있어서 한동안은 공사판에서 살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따질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이런 물건이 또 언제 나온단 말인가. 아무도 살지 않은 새 집인데 가격이 좀 더 높은 것은 당연하지. 우리가 망설이는 사이에 누가 채가면 어떡하나. 또 놓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마음이 요동쳤다.
상큼 발랄한 백인 여자를 따라 오피스로 돌아가 뭐에 홀린 듯 그 집 매매계약서에 덜컥 사인을 했다. 부동산 중개인을 끼지 않고 직접 거래할 경우 매매가에서 약간의 디스카운트를 해준다고 했고, 건설사와 연결된 업체에서 대출을 받으면 이자도 잘 쳐준다고 했지만, 대출은 몇 군데 더 비교해서 결정하겠다고 했다. 일주일 내에 마음이 바뀔 경우 계약금을 돌려준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과 어리둥절하며 말했다.
"우리가 방금 집을 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