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 방금 나갔어!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코로나 덕분에, 우리 집과 이웃집 아이들은 이 집 저 집 몰려다니며 놀기도 하고 바깥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온라인 스쿨 쉬는 시간에 아이들은 우르르 뛰어나가 킥보드를 타며 돌아다니다 다시 제각각 집에 들어가 수업을 듣고는,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또다시 우르르 몰려나가 몇 시간씩 함께 뛰어놀곤 했다. 이웃들과 서로 생일파티에 초대하기도 하고 먹을 것도 나눠먹으며 살맛 나게 살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하이브리드 수업이 시작되어 큰아이는 가상의 공간에서만 만나던 선생님들, 친구들을 학교에서 직접 만나게 되었고, 나날이 활력이 넘쳐 보였고 학교 생활을 즐거워했다.
렌트 만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이사했을 땐 마냥 과분하게 느껴졌던 집이었는데, 저녁마다 이케아에서 산 싸구려 창호지 커튼을 집게로 집어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도, 방마다 매트리스만 깔아놓고 사는 것도, 남의 집이라 액자 하나 걸어놓지 못하고 사는 것도 조금씩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어디에 가도 이만한 동네, 이만한 학교를 만나기 힘들 것 같았고 이곳에 집을 사서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간절해졌다.
어느 날 옆집 아줌마한테 문자가 왔다. 건너 건너편 집이 새로 지은 타운에 집을 지어 이사를 가면서 집을 팔려고 하는데, 관심 있으면 미리 연락해 보라는 것이었다. 이 동네에서 상당히 성공적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 이웃들이었는데, 온 집안의 카펫을 다 갈고 집 전체에 새로 페인트칠을 하며 집 팔 준비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집 구조도 마음에 들고 이웃들도 잘 알고 있는 데다 새 카펫과 새 페인트로 단장했다는 사실이 너무 끌렸지만, Pre-approval(모기지 대출을 위한 사전 승인)이 나기 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픈하우스 하던 날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렸고, 주말이 지나고 나에게 정보를 찔러주었던 옆집 아줌마에게 문자가 왔다. 그 집이 벌써 팔렸다고. 오픈하우스에 와서 본 중국인이 Listing Price에 프리미엄을 3만 불 붙여 올 캐시로 사버렸다는 것이다. 얼마 후 이웃집 부인의 SNS에는 "SOLD" 사인을 들고 집 앞에서 해맑게 점프하는 부부의 사진이 올라왔다.
심난해진 나는 매일 질로우(zillow.com)와 레드핀(redfin.com)에 들어가 이 동네에 올라오는 매물들을 샅샅이 훑어봤고, 주말마다 동네 오픈하우스를 몽땅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네이버부동산에 들어가 아파트 평면도만 훑어봐도 대충 어떻겠다 상상이 되었는데, 미국 집은 종류도 다양하고 구조도, 마감도, 건축 스타일도 한국과 너무 달라 상상하기가 어려웠고 볼 때마다 새로웠다. 남편이 직장에서 1년을 채우고 우리 부부가 2년 치 세금 보고를 마친 시점, 우리는 Pre-approval을 받을 수 있었고 본격적인 하우스 투어를 시작했다. 오픈하우스 구경이 아니라 부동산 중개인에게 사전 요청을 해 집을 보러 가는 정식 투어였다.
처음으로 보러 간 집은 우리 동네 외곽 쪽에 자리 잡은 싱글하우스였다. 땅값이 비싸고 인구밀도가 높은 편인 동부 워싱턴 DC 근교 메릴랜드에는 뒷마당이 넓은 집이 드문데, 이 집은 뒤가 탁 트여있었고 뒷마당 끝은 작은 숲이었다. 지하 공간을 빼고도 1~2층 면적이 3,000sqft(85평)가 넘는 싱글하우스인데도 그동안 봐온 가격 대비 상당히 저렴하게 나와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레드핀에 떠있는 중개인에게 연락해 투어 일정을 잡았다. 1층에는 거실이 두 개, 적당한 크기의 부엌과 다이닝룸이 두 개 있는 전형적인 싱글하우스 구조였다. 2층에는 침실이 네 개, 화장실이 두 개였는데, 마스터베드룸에 딸려있는 화장실 사이즈가 상당히 컸다. 욕조는 두 아이가 들어가 놀아도 충분할 정도의 크기였다. 지하실에는 빔프로젝터와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고 곳곳에 스타워즈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남편은 집이 마음에 쏙 든다며 당장 오퍼를 넣어보자고 했다. 나는 애매하게 누런 색의 오래된 부엌 수납장과 오븐, 전자레인지, 세탁기, 건조기 등 대부분의 가전이 낡은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런 것들은 집의 구조나 위치, 뒷마당 크기에 비하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날 오후 우리는 집을 보여준 중개인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집이 마음에 들어 오퍼를 넣고 싶다고. 중개인은 우리 부부에게 Preapproval Letter를 보내달라고 하면서 세 가지 논의할 사항이 있다고 했다. 첫째, Seller's Market(매도자시장; 매도인이 유리한 위치에 있는 시장)이기에 Inspection Right(매수인이 집을 사기 전에 문제가 있는지 점검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었다. 둘째, 매도인이 빠른 시일 내에 Settlement(매매 계약 체결)를 원하는데 실제로 이사를 나가기 전까지는 Rent Back(매도인이 판 집에 다시 렌트를 주고 거주하기)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셋째는 Appraisal(매수인이 집을 매수하기 전 그 집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감정하는 단계) 생략을 추천한다는 것이었다.
이메일을 받고 한숨이 나왔다. 우리도 렌트 만기가 다가오고 있었으니 빨리 Settlement 하고 매도인이 더 살다가 나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괜찮을 것 같았다. Appraisal을 생략하는 것은 좀 찜찜했지만 이렇게 핫한 셀러 마켓에서는 그냥 프리미엄을 얹어주고 사는 것 정도로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Inspection 부분은 동의하기가 힘들었다. 흰개미가 집의 나무를 갉아먹고 있는 것도 모르고 집을 사면 어쩌나, 혹시나 물에 잠겼던 집이라서 나무 구조물이 썩고 있다면, 또 HVAC(에어컨과 히터)이 망가졌다거나 집에 구조적인 큰 문제가 있으면 우리에겐 고칠 힘도 능력도 없는데. 남편이랑 둘이 머리를 맞대고 이걸 어쩌나 고민하고 있는데 얼마 안 되어 중개인에게 다시 이메일이 왔다.
"It just went pending (그 집 방금 나갔어)."
아니. 불과 몇 시간 전에 오픈하우스에 갔다 와서 오퍼 넣을 준비하고 있는데 집이 방금 나가다니. 이해를 할 수가 없어 중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중개인은 어떤 매수인이 8만 불의 프리미엄을 붙여 올캐시로 오퍼를 넣었고 매도인이 바로 수락했다고 들었다면서, Inspection과 Appraisal 모두 생략하기로 한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심난하고 허탈했다. 이런 시장에서 총알도 부족한 우리 같은 애송이들이 집을 사겠다고 덤비는 것 자체가 무모한 짓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