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ULL Apr 20. 2024

키보드를 찾아서

지난주는 내 생일이었다. 고등학교 때 생일에 친구들끼리 크게 다툰적이 있었고 이후 몇번의 생일은  즐겁지 않아도 되니 무탈하게 지나가기만 바랬다.  성인이 되자 무탈보다 탈이 더 재미있었다. 20대의 요란하고 그럴싸한 생일들이지나고 나자 이젠  감흥이 없다. 시니컬해지다 못해 부담스럽다. 누가 생일축하한다고 케잌이라도 내밀면 있는 힘껏 웃고 기뻐해야할 것 같다. 내 기쁨의 크기와 상관없이 케잌을 내민 누군가들을 위해서. 그렇다고 아무에게도 축하를 받지 않으면 제법 쓸쓸할 것 같다. 뭐 어쩌라고 싶겠지만 난 조금 더 맘편한 생일을 보내고 싶다. 미역국을 안 먹어도 가엽지 않고, 옛날처럼 서프라이즈로 짠! 하는 축하를 받지 않아도 초라하지 않고. 저녁에 아무런 약속없이 귀가해서 잠시 쓸쓸해도 감히 나를 가여워 하지 않는 그런 생일.


키보드만 있으면 될 것 같았다. 오래 전 작업실에서 썼던 기계식 적축 키보드. 그런 키보드만 있으면 다시 예전처럼하루 중에 일초 정도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뭐라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생일을 핑계로 친구들에게 많이 삥뜯었다. 갖고 싶었던 실리콘 지퍼백도 갖고, 이불도 갖고, 운동복도 갖고, 기계식적축 키보드도 가졌다. 쿠팡의 갑질과 횡포 덕분에 키보드가 제일 먼저 도착했다. 그치만 선뜻 뜯기엔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저걸 뜯어도 어차피 난 안 쓸건데.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나로써 반품을 해야하나 당근을 해야하나 고민했다. 도전과 포기를 꾸준히 초 단위로 하는 내모습이 이제는 훌륭하다. 계속하는 것은 힘이된다. 이 외에도 반품과 교환을 거듭하고 거듭했다. 나는 키보드가 세 개나 있다. 계속하는 것은 키보드 세 개가  된다. 아니 계속하는 것은 힘이 된다. 


도서관에 왔다. 집에서는 도저히  밥먹고 포카칩 생감자맛 먹으면서 유투브나 금쪽같은 내새끼, 나는 솔로 보는 거 만큼 재밌는 게 없다. 하지만 도서관은 대출기 옆에 반납한책들을 구경하며 사람들을 뭔 책 읽나 훔쳐보는 재미가 있다. 자리 찾는 척 슬쩍 둘러보면서 다른 사람들은 뭐하나 음침하게 쳐다보며 뭐하는 사람일지 추리하는 재미도 있다. 813번 대 한국소설 책장에 있는 책 제목을 보는 것도 쏠쏠하다. 그중에 썩 재밌는 제목은 아니지만 정용준의 <내가 말하고 있잖아>를 빌렸다. 그리고 이 도서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중 약간 가여운 일 하나는 내가  몇달 째 <SAVE THE CAT 시나리오에 숨겨진 비밀> 을 대출하고 있다는 것. 매주 대출을 하고 반납일 연장까지 하면 한 번 빌릴 때마다 3주간 대출을 할 수 있는데. 집에 가서 단 한 번도 펴 본적이 없다. 예전엔 너무 재미있어서 숨가쁘게 읽고 한 참을 멈춰서 생각하기도 하고 그랬던 책인데. 어쨋든 이번에도 대출과 반납연장을 더해 3주 동안 책을 빌리기로 했다. 계속하는 것은 힘이 된다.


도서관까지 걸어오면서 노후에 대한 생각을 했다. 나는 지금 베란다에 하얀색 아이스박스를 두고 상추와 케일 그리고 미나리를 심어 놨다. 내 노후에도 이런 삶을 살고 싶다. 뭔가를 심고 소소하게 가꾸고 또 때가 되면 그것을 먹는. 그리고 어제는 금쪽같은 내새끼에 나오는 코끼리가 너무 갖고 싶은데 판매를 하지 않아 손수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삶. 아무거나 해도 되는 삶. 이게 내가 꿈꾸는 미래인것 같다. 그럴려면 역시 혼자 사는게 답인 건가.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걸어오면서 자연스럽게 노후에서 내 집 마련까지 생각이 이어졌다. 고모랑 고모부가 있는 시골 집은 사는 거다. 그럴려면 최소 몇 억이 필요할까? 그리고 그 집을 리모델링 하는 거다. 아빠와 함께. 그럼 박터지게 싸우겠지. 그럼 엄마도 쫓아와서 같이 박터지게 싸우겠지. 당연히 예산은 초과하겠지. 그럼 오빠한테 돈을 빌려달라고 하겠지만 오빠는 치사하게 빌려주지 않겠지. 그럼 난 또 오빠를 재수 없어하겠지. 사실 오빠가 치사한 건 아니다 내가 갚을 생각으로 빌려달라 하는게 아니란 걸 알고 있을 뿐이지. 아무튼 내 집인데 내 맘대로, 생각대로 안되서 화나겠지. 싸우겠지. 재수없겠지. 그런데 우린 가족이겠지.


시놉시스만 써놓고 처 박아놨던 이야기가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키보드를 구매와 반품을 여러번 거듭하고 이 키보드 저키보드를 사고. 얻어내고. 읽지도 않는 작법 책을 징그러울 정도로 대출하고 잔인할 정도로 쳐다보지 않았지만 그게 뭐가 됐든 계속하는 건 힘이 된다. 아니. 계속하는 건 힘이 되어야 한다. 난 뭐가 됐든, 숨을 쉬는 것이든, 똥을 누는 것이든, 밥을 먹는 것이든, 카보드를 사는 것이든, 책을 무기한 대출 하는 것이든 계속 할 거니까. 


난 항상 마지막 마무리 한 줄을 쓰는 게 어렵다. 사실 읽다가 재미 없어서 안 읽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가독성이 젤 낮은 구간일텐데. 그치만 이 한 줄이 어려운 건 사실이다. 그러니 아무거나 써야겠다. 짭짤이 토마토. 참외. 콩국수.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나 왜 맥북 충전기 안 가져왔지?. 포카칩. 남해 유자빼빼로.






작가의 이전글 커피가 맛있는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