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권리보장원 정익중 원장에게 듣는 어린이의 놀 권리
[단풍잎 놀이터]
작년 11월 10일 넥슨재단과 메이플스토리는 굿네이버스 · 경기도 · 의정부시 · 성남시와 '공공형 놀이터 조성' 업무협약(MOU)을 체결해 노후된 놀이터 중 성남시 '나들이 어린이놀이터'와 의정부시 '하늘빛 어린이공원' 총 두 곳을 선정해 새롭게 리모델링하기로 했다. 두 곳은 단풍잎 놀이터로 재오픈될 예정이다. 이를 위해 메이플스토리는 조성 기금 10억 원을 기부하고 놀이터 설계 및 시공에 필요한 게임 IP를 무상으로 지원한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는 어린이해방군총사령관 방구뽕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배우 구교환이 연기한 방구뽕은 법정 최후 진술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어린이는 지금 당장 놀아야 합니다. 나중엔 늦습니다. 대학에 간 후, 취업을 한 후, 결혼을 한 후에는 너무 늦습니다. 비석치기, 술래잡기, 말뚝박기, 고무줄놀이 나중에는 너무 늦습니다. 불안이 가득한 삶 속에서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찾기에는 너무 늦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들과 함께 외친다.
“하나 어린이는 지금 당장 놀아야 한다. 둘 어린이는 지금 당장 건강해야 한다. 셋 어린이는 지금 당장 행복해야 한다.”
놀 권리는 유엔아동권리협약에서 명시되어 있는 아동의 기본권이다. 이화여자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휴직 중)이자 아동권리보장원 정익중 원장을 만나 어린이의 놀 권리에 대해 질문했다. 어린이는 왜 놀아야 하는가. 어린이들이 지금 당장 놀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UN아동권리협약 제31조
모든 아동은 적절한 휴식과 여가 생활을 즐기며, 문화 예술 활동에 참여할 귄리를 가진다.
놀 권리가 아동의 기본 권리로서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실 설명이 필요 없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죠. 누구에게나 놀이와 쉼은 중요합니다. 놀이는 밥이에요. 어른도 아이도 잘 놀고 잘 쉬어야 그다음 단계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놀이가 특히 더 중요한 이유는 어린이들은 놀면서 관계 맺는 방법을 배우거든요. 싸우기도 하고 화해도 하고요. 요즘 어린이들이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지금 어린이들의 놀이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님 등 성인이 만들어둔 틀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인인 우리가 놀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접근하느냐에 따라 어린이들의 놀이 환경이 많이 달라집니다. 요즘은 놀이가 많이 소외되어 있죠. 어린이들이 잘 놀고 있는지 어른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더 많이 신경 쓰고 살폈어야 하는데 어떻게 보면 놓친 것 같아요.
놀이는 밥이에요
왜 놀이가 소외되었을까요?
성인들부터 노는 것, 여가생활 즐기는 것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어린이들에게도 비슷한 생각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노는 건 게으르고 나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아니거든요. 우리는 모두 놀면서 자랐습니다. 놀면서 배웠어요. 우리가 알게 된 많은 것들이 실은 학습보다 놀이를 통해서 배운 것이 많습니다. 그걸 인정해야 해요. 그리고 어릴 때 잘 놀지 못한 사람은 제대로 놀지 못하는 어른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아요.
어린이는 당사자고 권리의 주체이지만, 주체로서의 역할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성인의 도움이 필요해요. 제가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는 것도 성인들의 공감대 형성을 위한 거예요. 어린이의 권리가 중요하고 잘 놀아야 한다는 거 당연한 이야기고, 다 아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노는 시간에 차라리 공부해라.”라고 이야기하는 어른들이 많아요. 노는 거 중요한 거 알고 있더라도 다른 친구들이 공부하니까 덩달아 학원을 보내죠. 저희가 너무 경쟁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 보니까, 다 같이 놀지 않고 엄청나게 달리고 있는 거예요. 달린다고 될 일이 아닌데.
놀다 보면 그만큼 뒤처진다고 생각을 하니까요.
저는 오히려 학습 능력이 더 탄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잘 놀아야지 잘 공부할 수도 있는 거죠. 그런데 이러다 우리 애만 뒤쳐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죠. 저는 법을 제정해서 강제로 다 같이 더 많이 놀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부도 이제 그만 강조해야 해요. 공부도 재능 중의 하나인데 모두가 다 공부를 잘할 수는 없잖아요.
아동기본법 제정은 왜 필요한가요?
인식이 바뀌면 좋겠지만 어렵기 때문에 법을 만들어서라도 인식을 선도하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이미 30년 전에 유엔아동권리 협약을 비준했고 국내법과 똑같은 효력을 갖고 있으니 그걸 실천하면 되는데 왜 아동기본법을 또 만드느냐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하지만 협약을 지키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법을 만들자는 거예요.
게다가 30년 전에 유엔아동권리협약이 나올 때는 디지털 환경이라는 게 없었어요. 디지털 환경 내에서 어린이들의 삶의 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요. 사실 저희가 100년 전에는 아동 권리 관련해서 제일 앞섰던 나라예요. 방정환 선생님이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세계에서 제일 먼저 우리 아동 권리 얘기하신 분이잖아요. 지금은 OECD 국가 중 아동 행복이 최하위입니다. 향후 100년은 다시 우리가 앞장서 준비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쉽진 않을 것 같아요.
다른 나라들은 어떤 식으로 아동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나요?
굉장히 잘하는 나라들도 처음부터 잘했던 게 아니라, 정책을 만들면서 변화했어요. 영국도 2008년에 처음 ‘국가 놀이 정책’을 만들었고요. 다른 나라들도 법 제정을 통해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요. 일본도 우리보다 아동기본법을 빨리 만들었어요. 그 안에 놀이권이 들어가 있죠.
어린이들의 바깥 놀이와 어린이 행복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자고요. 하루종일 사무실에 있으면 즐거운가요?
(다 같이) 아니요.
점심시간에 나가서 콧바람이라도 쐬어야 행복한 거예요. 관련 연구가 많이 있긴 하지만 사실 연구가 필요 없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예요. 우리나라 어린이들 삶의 만족도와 행복도가 OECD 국가 중 거의 최하위예요. 저는 놀이 시간이 적다는 게 굉장히 큰 이유라고 봐요. 공부를 열심히 했더라도 잘 놀았다면 이 정도까지 행복도가 낮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외국의 경우 빈곤한 어린이들이 행복도가 낮아요. 반면 빈곤하지 않은 어린이들은 행복도가 높아요. 그런데, 굉장히 특이하게도 우리나라는 빈곤하지 않은 아이들까지 행복도가 낮아요. 그래서 평균적으로 행복도가 낮아진 거예요. 빈곤하지 않은 아이들이 왜 행복도가 낮을까요? 놀지 않아서 그렇죠. 공부만 강요받아서 그랬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거든요. 부유한 가정의 자녀일수록 학원을 많이 다녀요.
놀이 공간도 부족한 게 현실이죠?
학습이 너무 강조되다 보니 놀이 시간과 공간이 부족해요. 같이 놀 친구도 없죠. 우리나라에 놀이터가 한 8만 개 있습니다. 그중 절반, 52%가 공동주택 안에 있어요. 그런데 요즘 많은 공동주택 놀이터를 거주민이 아닌 사람들은 이용할 수가 없어요. 너무 이상하죠? 예전엔 골목에서 놀았고, 모두의 것이었죠. ’ 놀이터가 우리 거주민 거다.‘라고 규정 지은 게 말이 안 돼요. 지금 어린이들이 놀기에 되게 어려운 환경이에요. ‘놀이터는 공동체의 영역이다.’라고 인식이 개선될 필요도 있어요. 이게 꼭 당신들 것만이 아니다.라는 거예요. 어린이들이 차별 없이 제대로 놀 수 있어야 공동체가 발전하고요, 그게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해요.
아파트 사는 어린이들과 그렇지 않은 어린이들이 하교 후에 어울리지 못하는 실제 사례를 들은 적이 있어요. 아파트 단지 놀이터들은 단지 안에서 잘 관리를 해서 아주 시설이 좋거든요. 빌라촌에 있는 놀이터는 공공시설물이라 그런지 상대적으로 시설이 열악하고, 놀이터 자체가 없는 경우도 많죠. 땅이 필요하면 놀이터부터 없애니까요. 이런 데서 차별이 생기죠.
부동산 가격이 높은 것도 놀이터가 줄어드는데 영향을 주겠네요.
어디다가 집을 짓겠어요. 땅값이 비싼 곳일수록 놀이터가 줄어들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거죠.
놀이 중에서도 특히 야외에서 하는 놀이를 강조하시는 이유는요?
야외에서 하는 놀이는 혼자 하는 놀이보다는 함께 하는 놀이가 많은 편이에요. 여러 연구를 통해서 혼자 하는 놀이보다는 함께하는 놀이에서 훨씬 더 놀이가 주는 긍정적인 효과가 크게 나타났어요.
놀이에는 어떤 조건이 있나요?
놀이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목적성과 자발성이에요. 어린이들끼리 놀이를 새롭게 만들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관계도 형성되고요. 그런데 놀이 코디네이터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놀이도 배워야 할까요? 성인이 노는 법을 알려주게 되면 놀이가 또 공부가 되는 거죠. 정보를 줄 순 있죠. 그런데 ‘이렇게 놀아야 한다.’라고 가르치는 건 이상해요. 어린이들은 어떤 공간 안에 풀어주면 알아서 놀아요.
“놀이터에서 다쳐야 크게 안 다친다.”라고 얘기하시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여러분 어릴 때 다 한 번씩 다쳐봤죠. 저도 다쳐봤어요. 다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작게 다쳐봐야 조심하게 돼서 크게 안 다친다는 뜻이에요. 어른들의 역할은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그 공간을 허락하는 거예요. 어린이들이 스스로 흥미를 가져서 자발적으로 해야 진짜 놀이이고, 그때 우리 어른들이 모르는 아주 창의적인 놀이가 나올 수 있는 거예요.
COVID-19 3년은 어린이들의 놀이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COVID-19 이후에 학습 시간이 늘어났고 미디어 사용 시간도 엄청나게 늘었어요. 운동 시간은 줄었고요. 수면 시간도 조금 늘었어요. 하지만 수면 패턴은 불규칙해졌죠. 이런 것들이 어린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어요. 그리고 또 큰 문제는, 어린이들이 자란 환경에 따라 사회성이나 정서 발달의 격차가 있을 수 있는데 학교에서 그 차이가 조금씩 완화되거든요. 그런데 COVID-19로 학교를 제대로 못 다녀서 격차가 더 강화되거나 고착되었어요. 학교라는 공간은 COVID-19 같은 팬데믹 상황에서 가장 늦게 닫고 가장 일찍 열었어야 되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COVID-19 이후에 꼭 복기해봐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학교는 어린이들이 노는 공간이며 사회성이나 정서 발달에도 꾀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학대나 가정폭력 상황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거든요. 학교라는 공간이 역할을 못하면서 이런 문제들에 대한 발견을 놓치는 면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린이들의 놀 권리를 위해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 있을까?
어린이들에게 놀이 기회를 줘야죠. 놀 시간도 만들어주고 놀이터 같은 장소도 만들어주고요. 그리고 학습 시간을 줄여야 해요. 하루 24시간 안에 자는 시간과 씻고 밥 먹고 하는 필수 시간 빼고 나면 남는 시간이 한정적이예요. 일부러 놀이 시간을 빼놓지 않으면 놀기 힘들어요.
놀이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식 전환을 위해 한동안은 법으로 강제할 필요가 있어요. 학원 운영 시간을 줄이고, 학교 돌봄 시간을 늘리고요. 제가 많이 얘기하는 것 중에 하나가 학생들 하교 시간 좀 늦췄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공부 시간을 늘리자는 게 아니고 학교에서 놀게 하자는 거예요. 점심시간에 노느라고 밥을 안 먹는 아이들도 있어요. 점심시간을 2시간 하면 밥도 먹고 놀기도 할 수 있겠죠. 쉬는 시간도 10분에서 30분으로 늘리는 것도 방법이에요. 하교 후에는 아이들이 학원으로 뿔뿔이 흩어지기 때문에 학교에서라도 충분히 놀 시간을 줄 수 있어야 해요. 학교는 비교적 제일 안전한 공간이니까요. 이런 고민이 필요합니다. 교사들에게 부담을 주자는 이야기가 아니고, 제도적으로 정책적으로 변화가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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