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 모나코
코로나19로 집콕 중에 자기 전 침대에 누워 하릴없이 사진을 넘겼다. 유럽에서 찍은 사진들에 시선이 멈춘다. 나와 아내는 2016년 가을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소중한 추억이 깃든 곳들. 런던-니스-파리의 일정. 그래서 사실 글의 시작은 런던에서의 일부터 적는 것이 순서상 맞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계기가 모나코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이므로 모나코에서의 기억으로 서두를 떼어 보려고 한다.
지금 찾아보면 모나코에 도착하는 방법은 말 그대로 가기 나름이다. 하는 일이 유럽 노선 담당이니 더 공부해야 하겠지만, 어디로 가든 정도가 없는 것이 유럽 여행의 매력 아닐까 싶다. 우리처럼 니스에서 모나코를 차를 타고 가면 1시간도 걸리지 않았던 것 같고, 지금 보니 구글 맵 기준으로도 40분 내외다. 이렇게 동선을 짰던 걸 보면 아내는 그 때나 지금이나 즉흥적인 듯 준비성이 철저해서 놀랍다. 나도 같이 찾았던 건가? 아무튼 모나코는 남프랑스와 이렇게 가깝다. 그리고 동시에, 동쪽으로 이탈리아를 접한다. 더해서 지중해를 끼고 있는 특성상, 해안도로를 따라 달린다면 굳이 출발지가 프랑스일 필요도 없어 보인다. 국적사가 취항하는 이탈리아 밀라노, 로마에서 쉬엄쉬엄 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고,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가는 것도 가능하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고, 또 준이가 훌쩍 큰 훗날을 기약해야 하겠고, 차 털릴까 매일매일 지키면서 잠들어야겠지만, 유럽 자동차 여행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꼭 다시 한번 하고 싶은 일 중에 하나다.
우리는 남프랑스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렌터카를 이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프랑스 니스에 에어비앤비 숙소가 있었고, 그래서 모나코 당일 투어가 가능하다. 아마 시간만 있었으면 다녀온 다음날 모나코에 또 갔을지도 모른다. 이것 말고도 차에 대한 이야기가 할 게 많은데, 이후 니스 여행기에서 본격 끄적여 보는 걸로 하자.
지금 찾아보니 모나코는 공국이라고 한다. 군주가 공작이기 때문인데, 결국 왕국과 비슷한 셈 치면 될 것 같다. 굳이 따지자면, 영지를 가진 영주가 독립을 할 때 스스로를 왕으로 칭하면 주변국들의 강한 견제를 받아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또 통치하는 영토가 그리 넓지 않으면 스스로를 공작으로 칭하던(알아서 양심껏) 역사 덕분이라고 한다. 더 할 말이 없는 것이 모나코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작은 국가라고 한다. 첫 번째는 바티칸시국이라네. 그래도 내가 보기엔 왕국이었다. 큰 나라는 아니어도 궁궐이 멋들어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왕국에 왔으니 왕궁을 봐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차를 가져왔으니, 왕궁에 가려면 주차를 해야 한다. 니스와 모나코 모두 주차장 찾는 일이 쉽지 않다. 경복궁의 대형 주차장은 잊어버리고, 서울 시내의 상가 주차장도 잊어버리자. 처음 쥐어 본 국제면허증, 빵빵거리며 지나가는 슈퍼카 틈에서 옆에는 절벽. 운전하는 것만으로도 긴장되는데 주차장 찾는 일은 더 복잡했던 것 같다. 다시 유럽에 자동차 여행을 간다면 근처 주차장을 미리 찾아 놓고, 2안과 3안까지 넉넉히 준비해 두도록 하자. 더군다나 모나코에 들어가면서부터 스마트폰이 잘 터지지 않는다. 국경이라기엔 민망한 느낌이었지만, 아무튼 그 국경을 넘어갔기 때문이었을까. 해안가 해양박물관 옆 주차장에 겨우 차를 대 놓고 와이파이의 흔적을 찾아 꽤나 헤맸던 우리가 떠오르네.
차에서 내려 둘러본 10월 말의 남부 유럽 모나코는 맑고, 덥지도 쌀쌀하지도 않았다. 조금 습한 느낌은 있었다. 사진을 보면 점심 무렵부터는 조금 흐렸던 것 같다. 이 작은 나라는 딱히 어떤 절경을 보지 않아도 자연히 내가 남부 유럽을 걷고 있음을 실감하게 해 줬다. 또 한편으로는 부가 느껴지는 나라, F1 서킷이 시내에 있는 나라-사실 F1의 흔적은 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카지노의 나라-사실 당일 치기라 카지노도 보지 못했다-에 내가 있는 것도 신기할 노릇이었다. 지금 보니 못 본 게 많네. 그래도 무엇보다 가장 깊이 뇌리에 남는 것은 한가로우면서도 부족함 없어 보이는, 마주치면 인사해 주던 사람들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그 날 날씨처럼, 그 하얀 건물과, 짙은 오렌지 빛 지붕들처럼 따스했다. 그런 여유와 즐거움이 부러웠다.
그렇게 조금 걸으면 왕궁 근처가 나온다. 왕궁 입구까지 가기 위해서는 오르막 길을 죽 걸어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오르막이 생각보다 긴 걸? 아마 다른 길이나 엘리베이터가 있지 않을까 싶은 순간이 온다. 그 무렵 오르막길 중턱에 모나코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포인트가 있다.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졌나 보다. 오르막에 숨이 찰 때면 다른 곳을 보고 숨을 돌릴 틈이 생기게끔 만들어졌나 보다. 해안가로 길게 정박해 있는 하얀 요트들이 눈에 들어온다. 또 뒤로는 절벽에 기대 지중해 특유의 짙은 오렌지 빛 지붕의 오래된 건물들로 둘러 있는데, 또 그 반대편으로 그리 높진 않지만 최근에 지은 빌딩들이 늘어서 있다. 하지만 그 조합이 이질적이지는 않았다. 완벽한 휴양도시의 모습이다. 007 시리즈에 나오는 돈 많은 악당이 숨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동네다.
길다 생각했던 오르막길은 금방 끝난다. 앞서 적은 것처럼 인생도 같다는 생각을 다시 해 본다. 왕궁 앞 광장까지는 갔는데, 왕궁 안으로 직접 들어가지는 못했다. 건축사나 양식에 대해 지금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마침 개인적으로 가는 곳마다 내외부 건축 양식을 눈에 담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기 때문에 아쉬움이 더 컸던 것 같다. 그 아쉬움 덕에 최근엔 건축사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 저것들을 찾아보고 있다. 시간이 지나 준이와 함께 어딘가를 여행하게 된다면, 다채로운 양식을 잘 정리해서 설명해주고 싶다. 그렇게 아쉬운 채로 왕궁을 조금 지나면 조그마한 골목이 나온다. 왕궁 안을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은 금방 사라진다. 기념품도 팔고, 작은 규모의 식당들도 작은 공간에 각자의 방식대로 조금씩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이 다정하다. 그 작은 골목에 가게들 마다 작은 테이블과 의자를 내놓고 야외에서 식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골목을 더 골목답다. 우리도 잠시 점심을 먹었다. 라비올리와 프렌치프라이를 먹었던 것 같은데, 일찍부터 차를 끌고 돌아다닌 우리가 뭔들 맛이 없었을까. 특히나 라비올리는 서울서도 몇 번 먹어본 적이 없었던 서울 촌놈 입장에서 참 고귀한 음식임에는 틀림이 없다. 배고프다.
왕궁 뒤편으로 나오면 성당이 있다. 모나코대성당이다. 아마 유럽 여행 중 처음 들어가 본 성당이었을 것이다. 상상 속 유럽의 성당만치나 과하지는 않았다. 책으로 보고 사진으로 보고 티브이로 봐 오던 성 베드로 대성당의 권위에 너무 젖어 있던 탓이었으리라. 그렇다고 실망했던 것은 아니다. 이 곳의 잘 다듬어진 기둥의 돌들과 견고하게 짜 맞추어진 천장, 과하지 않게 새어 들어오는 자연광에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는 오히려 우리나라 석굴암의 그것들을 떠오르게 했다. 화려함보다는 절제에 가까웠으며, 아늑했다. 그래서 더 좋았다. 나중에 더 다니다 보니, 남부 유럽의 성당은 대개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은은한 촛불 빛이 밝히는 성모상 앞에 무릎 꿇고 경건 속에 기도하는 사람들의 조심스러움과 그 고요함은 아마 앞으로도 잊히지 않을 것이다. 신앙은 이렇게 세계를 초월하는구나 싶었다. 나중에 또 적겠지만, 샌프란시스코의 한 성당에 갔을 때에도 이 곳과 같은 공기가 흘렀다. 이유는 더 살아봐야 알겠지만, 말도 안 통하는 나라지만 어떤 간절한 염원을 가진 이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지. 신실이라는 단어로 어렴풋이 짐작만 해 본다. 아무튼 나는 나대로 교회를 나가기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기도를 한다는 게 아직도 낯설고 어려웠던 시기다. 그래서인지 반대로 기도해야 할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 생각 저 생각하며 성당 안을 걷다가, 나가자고 약간 보채는 듯한 아내 덕에 성당 밖으로 나왔다.
저 정도 코스면 왕궁 일대는 썩 크지 않기 때문에 둘러볼 수 있다. 다시 시내로 내려오면 낮은 식당들이 줄 지어 있는 자그마한 광장이 있다. 아, 그 와중에 스타벅스(이하 스벅)는 또 들렀던 것 같다. 스벅을 먼저 가고 왕궁을 갔는지 왕국을 갔다가 스벅을 갔는지는 불명확하나 모나코에서도 우리는 초록색 인어공주를 찾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벅은 참 서울이나 유럽이나 미국이나 어찌 그리 똑같은지 싶기도 하다. 나는 아아를 먹고 아내는 뭘 먹었으려나? 음 아바라? 모나코에서도? 아무튼 냉장고에 붙일 자석과 캐리어에 붙일 스티커라도 사 볼까 하는 요량으로 잠깐 그 작은 광장에 들렀다.
그 광장에 이 책의 시작이 된 노점 꽃가게가 있었다. 이 꽃가게에서 찍은 아내의 뒷모습이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니까, ‘이 꽃가게에서 찍은 사진은 운명이었다’고 적어도 될 것 같다. 나름 애써서 찍었을 텐데, 그래도 잘 찍었는지 못 찍었는지 내 감각으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신혼여행 사진들 중 한 장이다. 신혼여행과 꽃, 살짝 흩날리는 머리가 그 날의 실바람 부는 날씨와 분위기, 향기와 설렘 같은 좋은 것들이 한 장에 모두 담겨 있다.
당시에 뒷모습을 보면서 한 생각일지, 사진 속의 뒷모습을 보면서 오랜 시간 곱씹은 생각이 기억이 된 것인지는 이제 시간이 지나 불분명하지만, 나는 이제 평생 여행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구나. 좋고 행복한 일이구나. 했으니. 모나코의 기억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