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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군 Nov 04. 2020

런던과 로망

유럽 : 런던

        떠오르는 기억대로 글을 쓰다 보니 여행의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하지만 이게 바로 내가 쓰고 싶어서 쓰는 책의 묘미 아닐까 싶다. 어차피 뒤죽박죽 흐릿해지는 기억, 글로 남기는데 시간 순서대로 적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아빠는 007 시리즈를 참 좋아했다. 그 영향으로 나도 007 시리즈를 챙겨 본다. 명절이면 TV에서 3일, 4일 연속 방영해 주던 시리즈들. 아빠 옆에 누워 새벽이 될 때까지 봤던 숀 코넬리부터 피어스 브로스넌에 이르는 007 시대에서, 어느새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 시대도 저물어 가는 지금이다. 어린 시절 티브이에서 보던 007 시리즈의 한국 성우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나이 들어서 자막으로 보아도 들리는 그 영국 특유의 엑센트 덕일까. 시시껍절한 농담을 던져도 격조가 있던, 영국 신사의 모습과 그 배경이 되었던 런던을 나는 막연하게 동경했다. 첨단 무기와 파리도 미끄러지게 생긴 광나는 슈퍼카들, 아슬아슬한 잠입 액션도 기가 막혔지만, 나는 그 배경인 영국이, 런던이 너무 좋았다. 이후 러브 액추얼리, 브리짓 존스 시리즈, 이프온리처럼 갑자기 물밀 듯 쏟아져 나온 로맨스 영화의 배경이 된 런던은 학창 시절을 지나며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이 되었고, 특히나 런던아이는 사랑하는 사람과 꼭 한 번 가야 할 나만의 완벽한 로망이었다. 게다가 대학 시절엔 공부하는 방식이 자유롭고 독특하다는 LSE를 꿈꿔보기도 했는데, 사실 이것도 런던에 있다는 이유가 더 크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조금 더 노력했다면 런던에서 공부할 기회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과거의 나를 잠시 자책해 본다.  


        이런 곳을 신혼여행으로 가게 되다니 정말 설레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내를 만나고 결혼하게 된 과정 자체가 막힘 없이 술술 풀린 기적들이나 진배없다. 첫 일정을 런던에서 보내는 것에 동의해 준 것도 감사할 일이다. 2016년 10월 22일 토요일. 우리 반지 안쪽에도 새긴, 우리 결혼한 날. 얼굴은 웃는 채로 굳었고, 영혼은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부터 빠져나갔지만, 한 편으로 진짜 어른이 된 것만 같은 마음에, 또 신혼여행 떠날 생각에 설렜던 날. 살면서 언제 또 이렇게 열흘씩 시간을 내서 유럽 여행을 갈 수 있을까 싶었던 날. 그렇게 식을 올린 다음 날, 우리는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히드로 공항은 저녁이었고, 우리는 시내 서쪽 얼스 코트에 있는 이비스에서 묵었다. 호텔은 썩 큰 규모는 아니었고, 낡은 느낌이 있었지만 좋았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곳이 아니더라도 그 나름의 느낌이 있었다. 영국은 좀 그런 맛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자동으로 합리화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날이 밝자마자 거리로 나왔다. 둘이 하는 해외여행의 첫 시작이었다. 런던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오이스터 카드를 하나씩 품고 지하철에 올랐다.


        10월 말 런던의 날씨는 개인적으로 손에 꼽는다. 날씨가 좋아서가 아니라, 되려 상상했던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우중충하고 습함, 여느 영화에서 자주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사실 날이 좋아야 여행하기 좋다고들 하고, 또 정말 그렇기도 하지만, 흐린 런던은 그런대로의 멋이 있었다. 서울에서 런던으로 가던 기내에서 한 사무장님이 런던은 껴 입어도 춥기 때문에 옷 잘 챙겨 입으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대로였다. 구름이 껴서 흐렸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한기가 아우터 안으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는데, 코가 살짝 차가워지는 늦가을의 쌀랑함 덕분에 둘이 손잡고 걷기가 더 좋았던 것 같다.


        타워 힐스 역 근처 노점에서 커피를 한 잔 사 마시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늘상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나인데, 유럽이라서 그런지 굳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먹고 있다. 사진을 보면 이 허세는 니스에서도 이어졌던 것 같다.─, 천천히 조금만 걸으면 템즈 강변에 다다른다. 강변에만 나와도 어디서든 타워 브리지가 보이는데, 웅장하면서도 점잖은 모습이다. 아마도 템즈 강 폭이 더 넓었다면 이 다리는 더 웅장하게 지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가운데가 열리는 도개교라서 열리는 모습을 꼭 보았으면 했는데 결국 보지는 못했다. 1800년대 후반 준공 당시에는 증기기관을 이용해 이 도개교를 열었다 닫았다 했다고 한다. 그 규모는 위대한 제국의 영광, 도개교는 산업화 맹아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으로 단순한 권력보다는 권위가 느껴지는 건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짓는 과정에서 엄청난 권력이 작용하기도 했을 것이고, 그때의 영국과 이 시대의 영국은 비교를 다시 해 봐야 하겠지만, 그 상징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멀리서 보기만 해도 당장 영국에 왔음을 실감할 수 있는 곳임에는 틀림이 없다. 타워 브리지는 우리가 연인이 아닌 부부로 둘의 사진을 처음 찍기 시작한 곳이니, 따지고 보면 그런 점에서 또 의미가 있는 곳이다.


        타워 브리지를 건너면 바로 런던 시청으로 갈 수 있다. 잠깐 걸었음에도 런던 시내는 전통 건축물과 현대 건축물이 뒤섞여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특히나 현대 건축물들은 기하학적인, 아주 독특한 모습을 한 것들이 많다. 처음엔 런던 시청처럼 불쑥 있는 달걀 모양, 가지(?) 모양의 건물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하루 정도 다니다 보면, 새로 지은 건물은 그 나름의 멋이 있는 대신, 또 과거를 침범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 깃들어 있음을, 조화에 힘쓰고 있음을 누군가 설명해 주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깨닫게 되는 듯하다.

북한의 류경호텔을 떠오르게 한 레든홀 빌딩


        금방 점심시간이 가까워 버로우 마켓을 찾아갔다. 지하철을 타고, 템즈 강변, 타워 브리지만 걷다 보니 시내를 잘 보지 못했는데, 빨간 이층 버스가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새삼 감동을 받는다. 이 빨간 이층 버스는 보고 또 봐도 좋은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를테면 홍콩에서도 보고, 직접 타 보고, 우리나라에서도 타 봤던 이층 버스지만, 런던의 이층 버스는 볼 때마다 소중하다. 좁은 길과 빨간 이층 버스는 런던의 아이덴티티이니 말이다. 아내가 미리 찾아 둔 피시 앤 칩스 가게에서 대구 튀김을 먹었다. 음. 나는 워낙에 생선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네 생선가스와 비교했을 때에도 썩 특별할 것은 없어 보였으나, 시장 벤치에 앉아 이국적인 분위기에서 먹는 식사는 썩 괜찮았다.


         버로우 마켓에서 서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테이트 모던이 있다. 산업화의 상징과도 같은 공장 네모난 굴뚝이 덩그러니 혼자, 아주 삭막하게 서 있는 곳이다. 원래는 발전소였다고 하니, 그 외관이 이해가 가는 곳인데, 겉은 건드리지 않고 안을 완벽하게 미술관으로 재생한 곳이다. 전시관 가운데에 커다란 홀이 있는데,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누워 천장을 볼 수 있게 되어 있고, 각 전시관마다 현대미술이 전시되어 있다. 조금 어둡지만,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좋은 곳이다. 그러고 보면 여행을 가면 미술관은 한 두 군데씩 들렀던 것 같은데, 앞으로 좀 더 자주 들러야겠다 싶다. 고요함 속에서 우리나라에서 보지 못했던 작품들을 보는 시간이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을 가든 참 좋은 것 같다. 그렇게 오후까지 시간을 보내고 나오니, 아침보다 날은 더 개었고, 강 건너 세인트 폴 대성당을 배경으로 버스킹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모아 둔 결정체가 아니었을까. 런던에서, 아내와 걷는데, 버스킹이라니.

템즈강변 버스킹

         아내가 런던에서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개인적인 숙제 중 하나는 바로 바버 재킷을 사는 일이었던 것 같다. 테이트 모던에서 나와 세인트 폴 대성당으로 템즈 강을 건너 잠깐 버스를 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근처 레든홀 마켓이라는 곳에 바버 매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질 무렵이 되어, 거리에 가로등이 켜지고 건물마다 불빛이 켜지기 시작했는데, 특유의 노란 불빛이 부분들을 채워 아주 멋지게 빛났다. 기본적으로 멋짐이 채워져 있는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아내는 원했던 재킷을 문제없이 구입하는 데 성공했으므로, 기분이 아주 좋았다. 이윽고 저녁 시간이 되어, 우리는 첫 저녁식사를 랍스터로 장식했고, 맥주도 한 잔 했다. 완벽한 행복이라는 두 글자는 불 가능한 것으로 무의식 중에 단정 짓고 사는 시간이 많아진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저 날은 완벽한 행복이었을 것이다. 저 날 뿐만이 아닐 것이다. 완벽한 행복인 순간들은 무심코 지나친 채로 지금 당장의 불행한 것들만 꺼내 바라보고 불평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레든홀마켓. 아내는 여기서 바버 코트를 샀다. 드디어.


        무척 기분 좋은 상태로 식당에서 나올 땐 이미 저녁이었다. 우리는 다시 템즈 강변으로 걸었다. 살짝 길을 비추는 가로등 빛과, 그 특유의 파란 조명 빛을 받은 런던은 훨씬 멋졌고, 아내의 손을 잡고 런던 아이를 마주할 수 있었다. 푸른빛의 관람차들이 천천히 야경 속을 유영하고 있었다. 영화에서 숱하게 보았던 사랑이 결실을 맺던 바로 그곳. 나도 뭔가 이룬 느낌이 들었고, 영화 속 주인공인 것 마냥 민망한 착각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보통 무의미한 입장료를 낸다 싶으면 우리는 지나치지만, 이건 꼭 타야 한다는 내 욕심으로 우리는 런던 아이에 몸을 실었다. 모든 것이 반짝거렸다. 환하게 불이 켜진 건물들도,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도, 유람선도, 런던아이도, 아내도. 모든 것이 빛나는 저녁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마저도 모든 것이 좋았다. 런던에서 보낸 시간이야 짧았지만, 오며 가며 지하철을 타고 둘이 걷는 길은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가장 즐겁고 다정한 시간이 아닐까. 힘들고 짜증 나는 출근길도 함께 가는 순간만큼은 즐겁고, 퇴근길엔 역에서 만나 손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유럽에서의 그 날들처럼 즐겁고 재미있는 걸 보면, 그게 런던 이어서라기 보다 둘이 함께 가는 길이 어디든 즐겁기 때문이리라.       

        

런던 야경. 런던아이에서


        둘째 날은 저녁에 니스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에 잠시 피카딜리 서커스를 오전에 잠깐 들르고, 숙소로 돌아와 짐을 챙겨 셔틀을 기다렸다. 개트윅 공항을 오가는 셔틀이 조금 늦어져 이 정류장이 맞는지 긴가민가하고 있을 무렵에 한 커플이 정류장으로 다가왔다. 짐이 한가득인 걸 보니 공항에 가는 것이 맞아 보였다. 우리가 맞는 정류장에 있음을 깨닫고 다행스러워했다.       


          버스는 잘 도착을 했는데, 이 커플 중 여자만 버스에 오르는 것이 아닌가. 남자는 창 밖에 서 있고 말이다. 이별 중이었던 것 같다. 아마 런던에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여자가 떠나는 상황이었으리라. 한국이나 영국이나 버스는 이별을 기다려주지 않나 보다. 버스는 금방 출발했고, 공항까지 가는 내내 여자는 창밖을 보다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가 다시 또 창밖을 보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새로 시작하는 여행을 위해 이 곳을 떠나고 있고, 이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며 이 곳을 떠나고 있구나. 이별이라는 게 전 세계 어디 건, 그 당사자가 누가 되었건 슬픈 것은 다른 게 없구나 하고 실감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안도했던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저렇게 헤어질 일 없이 같이 살겠구나. 하면서 말이다. 시내를 벗어날수록 더 오래되어 보이는 길가의 벽돌집들을 보다 보니 개트윅 공항에 금방 도착했고, 조금 복잡했던 ─내 가방이 워낙 커서 결국 가방을 열어야 했다.─ 출국 심사를 마치고 우리는 니스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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