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맛
속이 더욱 울렁거렸다.
어제 과음으로 속이 안좋았는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오징어 국이 나왔다.
어려서부터 어머님은 오징어국을 해 주지 않으셔서 오징어국을 처음 먹었던 곳은 대학 교내 식당이었다. 당시 새벽에 등교할 일이 많아 학생회관 식당에서 정식을 자주 먹었는데 제일 맛이 없는 메뉴가 오징어 국이었다. 당시 먹었던 오징어국은 비리고 덜큰했다
졸업 후 회사에 입사해서 대구에서 열리는 유럽 여행 설명회에 참석하고 대구 지사장님과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시간이 늦어 지사장님 댁에서 자고 일어났는데 사모님이 아침으로 오징어 국을 내어주셨다.
난감했지만 싫은 내색 없이 국을 떠서 입에 넣었는데 눈이 확 뜨졌다. 그 전에 싫어했던 비린 맛은 전혀 없었으며 오징어 국은 달고 시원했다.
처음 접하는 음식은 가격이 비싸더라도 제대로 된 것을 먹어야 그 맛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스페인의 대표적인 음식 하몽이 내게 그랬다.
바르셀로나에 가면 누구나 방문하는 보케리아 시장 앞에는 하몽을 파는 가게가 많다. 특히 종이 봉투에 담아 1, 2유로의 가격으로 하몽을 파는데 호기심에 사서 먹었다. 그런데 너무 비려서 한 조각을 못 먹고 버렸다. 그 이후로 하몽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흐른 어느날 인솔을 마치고 손님들과 숙소 앞에 있는 식당에 들렀다. 손님 중 한 분이 하몽을 시켜 나에게 맛보라고 권하였다.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계속 권해서 할 수 없이 받아 먹었는데 먹는 순간 깜짝 놀랐다. 너무 맛있었다.
말린고기 특유의 고소함과 쫄깃함 그리고 지방 부분의 감칠맛이 염장이 되어 적당이 배여 있는 짠 맛과 만나 환상적인 맛이었다.
그때부터 스페인으로 인솔을 가면 최고의 즐거움은 하몽을 먹는 것이 되었다. 하루 인솔을 마치고 큰 슈퍼에 들러 20유로 정도의 이베리코 하몽과 적당한 가격의 포도주를 싸서 호텔방에서 먹는 것이 최고의 사치가 되었다.
하몽 Jamón 은 돼지의 뒷다리를 소금에 절인 후 숙성한 음식으로 5 등급으로 나누어진다. 가장 하위의 등급은 세라노(Serrano) 로 사료를 먹여 사육한 백돼지로 6개월간 숙성시킨 것이다.
그 위 등급인 세보(Cebo)는 흑돼지인 이베리코 돼지로 세라노와 동일하게 사료를 먹여 키우며 24개월 정도 숙성한 것이며 그 상위 등급인 레세보( Recebo)는 사료를 주고 키우지만 방목시켜 운동량을 늘린 돼지로 지방이 많다.
그 다음 등급인 하몽 이베리코 데 베요타 (Jamon iberico de bellota) 는 다양한 교배종 이베리코 돼지로 만든 것이며 최상급인 이베리코 데 베요타 100% (Jamon iberico de bellota 100%)는 순수한 이베리코 토종으로 만든 것으로 숙성기간만 2년에서 3년이 걸린다.
<베요타> 라는 표시는 스페인어로 도토리를 말하는 것으로 도토리 산지에 이베리코 돼지를 방목하여 돼지가 도토리를 주워먹고 자랐다는 것을 증명한다.
가장 맛있는 하몽의 조합은 최상급 하몽인 하몽 이베리코 데 베요타를 사람이 직접 잘라서 주는 것으로 자르는 사람이 하몽을 자르면서 각 부위에 맞게 지방의 비율과 얇기를 조절해서 주기 때문이다.
하몽은 얇으면 얇을수록 맛있다. 하몽을 입에 넣었을 때 혀에 닿아 지방부터 녹으면서 하몽 자체가 가진 짠맛을 잡아주고 감칠 맛을 주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스페인 출장을 못가고 몇 개월 동안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선배가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선배는 대학시절부터 만나온 30년 지기로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는 친구이기도 하다. 선배가 술을 좋아하셔서 유럽 출장을 갔다오면 40유로 정도의 포도주를 선물하곤 하였다.
저녁시간 선배 집을 방문했는데 유럽 간지 오래되어서 유럽 음식이 그리울 것이라며 이전에 내가 선물한 포도주와 큰 마트에 덩어리째 수입되는 이베리코 하몽을 직접 슬라이스해서 내어 주신다.
한 입 베어 물은 하몽은 적당히 짠 맛과 더불어 고소함과 감찰맛으로 가슴을 먹먹하게 하였다. 이후 하몽은 내게 최애의 음식이 되었다. 사람이 맛으로 감동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느꼈다.
이후 선배는 하몽의 최하등급인 세라노를 구입해서 나를 불러 함께 먹었는데 그마저도 맛이 좋았다.
역시 처음 맛보는 음식은 제대로 된 것을 먼저 먹은 이후 조금 못한 것을 먹더라도 이전의 완성된 맛을 기억하며 그 음식을 즐길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