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서유럽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자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잠에 빠졌다가 기내식을 먹는 시간이 되어 눈을 떴다. 유럽으로 올 때보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의 기내식이 훨씬 맛있다. 깔끔한 와인으로 식사를 마무리하자 지난 15일간의 여행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설레는 마음으로 런던에 도착하여 빅벤을 보는 순간 내가 진짜 유럽에 왔음을 실감하였으며 파리의 유람선에서 바라 본 에펠탑은 압도적인 아름다움으로 경이로웠다. 그리고 스위스로 넘어가 알프스를 걸으면서 황홀감을 느꼈으며 피렌체에서 인간중심의 르네상스에 전율했다. 또한 로마를 여행하면서 로마제국의 장엄한 역사에 감동하였으며 이탈리아 남부 투어에서는 지중해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이었다.
피렌체 두오모를 올라가는 입장권을 구입하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은 피렌체의 대성당을 건축하던 감독관과 인부들이 이용하던 건물이었다. 이곳에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 진품이 있다.
하지만 여행자를 사로잡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도나텔로의 <막달라 마리아>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이다.
초기 르네상스 조각의 창시자였던 도나텔로의 <막달라 마리아>는 세상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지고 가는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갈릴리 호수 연안에 위치한 막달라에서 태어난 마리아는 자신에게 붙어있던 7마리의 귀신을 쫓아준 예수님에게 감사하여 그를 따라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생존을 위해 몸을 팔다가 바리새인에게 잡혀 죽을 뻔하였으나 예수님이 나타나 죄 없는 사람은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이야기하자 사람들은 흩어졌으며 그녀는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예수님의 제자가 된 그녀는 예수님이 체포되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달아나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곁을 지켰다. 또한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신 후 삼일만에 부활한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난 사람도 그녀였다. 그녀는 부활한 예수님이 마리아라고 불렀을 때 너무나 충만한 사랑의 힘을 느꼈다. 이후 예수님이 승천하자 그녀는 죽을 때까지 사막에서 고행의 삶을 살았다.
도나텔로가 조각한 실물 크기의 막달라 마리아 조각상은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자 모든 것이 덧없고 의미 없음을 깨닫고 사막으로 들어가 고행하는 늙고 추한 마리아의 모습이다.
그녀의 모습에서 중세시대의 경건한 성인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30년간 고행으로 인해 온갖 고난을 받은 그녀의 모습 속에 영혼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도나텔로는 이를 강조하기 위해 대리석 대신에 부패하기 쉬운 나무를 사용하여 썩고 부패하는 육체 속에 깃든 인간 영혼의 고결성을 보여주고 있다.
박물관에서 우리 삶의 아픔과 구원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이다.
미켈란젤로가 노년에 시력을 잃고 죽어가면서도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은 작품이 바로 <피에타>이다. 예수님의 옆에 보이는 인물은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이며 예수님의 머리 위에서 예수님을 부축하고 있는 인물은 니고데모이다. 부자이자 권세가였던 니고데모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예수님을 은밀히 부축할 만큼 영적으로 가난한 인물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니고데모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담았다. 뛰어난 예술가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지만 미켈란젤로 역시 죽음을 앞두고 고통과 불안 속에 살았다. 그가 예수님을 부축하고 있는 니고데모의 모습에 자신의 얼굴을 담은 이유는 죽음 뒤에 구원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열망했기 때문이다.
화려한 과거와 현재의 불안함 그리고 미래의 구원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이 작품 앞에서 여행자는 얼어붙은 듯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여행은 힘든 과거와 불안한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를 구원할 미래를 숙고하며 성장하는 시간임을 알게 되었다.
여행을 통하여
세상의 진실과 아름다움에 마주하는 순간
여행자는 여행의 신을 만나 구원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