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모든 것을 휩쓸고 가다.
코로나가 모든 것을 휩쓸고 갔다. 치열하게 고민했던 그동안의 흔적을 남김없이 가져갔다. 그냥 텅 빈 공간에 갇힌 기분이었다. 누군가 나를 불러도 나는 넋을 잃고 앞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함께 생활하는 가족 외에 나에게 힘을 주는 두 가지의 사건이 일어났다.
첫 번째가 글쓰기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고 느꼈던 것을 정리하면서 <적어도 내가 헛살지는 않았구나>라는 생각을 하였다. 글을 적으면서 남들이 보면 너무나 평범한 문장 하나에도 감정이 이입되어 스스로 울고 웃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복했다. 특히 현재에 집중하며 고대 문명을 일구었던 메소 포티아 사람들의 모습과 자신의 운명을 뜨겁게 사랑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모습 속에서 가슴이 뜨거워졌다.
또한 근세에 살았던 고흐와 괴테의 삶에서 삶의 목표가 명확하지 않아도 방향을 잃지 않고 산다면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에곤 실레와 로트렉의 삶에서 위로를 받았다.
다행히 내가 쓴 글들이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어서 무엇보다 보람이 있었다. 그분들 중 펀딩을 해서 책을 출판하자는 분도 계셨다. 부담을 드릴 수 없어 사양했지만 평생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배려였다.
두 번째는 사람이다.
코로나가 발생하자 정말 많은 사람들로부터 위로 전화를 받았다. 연락이 끊겼던 어린 시절 친구부터 주위 지인들까지 전화가 와서 안부를 물었다. 또한 생각지도 않았는데 치킨과 커피 쿠폰을 톡으로 쏘며 응원을 주시는 분들도 많았다. 대부분 함께 일하다가 그만둔 동료와 고객들이다. 그분들은 재기를 바란다는 진심 어린 응원의 메시지도 보내주셨다.
그중 가장 고마운 분은 친구처럼 지내는 선배로 큰돈을 선뜻 빌려주신다고 하였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돈 때문에 귀한 인연을 놓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분은 지금도 음으로 양으로 늘 저를 도와주신다. 그리고 부족한 내게 변하지 않는 응원을 주시는 어른도 계신다. 한 분은 두툼한 봉투에 돈을 넣어 건네주시며 나를 안고 울어주셨다. 그날 나도 죄송해서 함께 많이 울었다. 물론 돈은 받지 않았다.
또 다른 한 분은 초등학교 때 선생님으로 얼마 전 문자로 잘 이겨낼 것이라며 응원을 해주셨다. 벌써 4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사랑을 주시는 선생님은 내가 평생 마음속에 은사님으로 모실 분이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시절부터 시작한다. 당시 나는 늘 우울했다. 집이 가난했으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루하루 먹고 사느라 우리를 돌볼 틈이 없었다. 동생 둘과 나는 늘 외롭고 배고프게 하루를 살고 있었다.
학교에서의 생활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공부는 꼴찌에서 몇 번째에 옷차림과 도시락 반찬도 변변치 못해 친구들로부터 늘 소외당했다. 어린 마음에 나와 같은 고통을 겪는 두동생이 받은 상처를 생각하며 늘 두통에 시달렸다.
별다른 희망 없이 6학년에 올랐다. 말이 적은 데다가 늘 어둡게 다니는 나를 선생님이 부르셨다. 앞으로 방과 후에 남으라는 지시였다. 아무 생각 없이 방과 후에 남아 있으면 선생님은 늘 내게 와 글짓기와 그림을 가르치셨다. 나는 평생 처음 받아보는 과분한 관심에 어쩔 줄 몰라하다가 이내 익숙해졌다. 언젠가 건방을 떨며 책받침으로 보이는 창가의 하늘 풍경을 그리겠다고 이야기드렸더니 웃으시면서 그러라고 하신다.
한 번씩 반 전체 급우들과 방과 후에 학교 뒷산에 오르면 선생님은 내게 꼭 응원을 시켰으며 주번의 완장도 늘 내게까지 오게 하셨다.
나는 얼마 후 반에서 상위 등수에 들게 되었고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던 반장과 부반장 하고 어울리기도 하였다. 당시 부반장이 무용을 전공해서 팔자에도 없는 무용공연을 한 번씩 보러 다니기도 했다.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여학생이 생기는 사건도 생겼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여름방학에 친구들과 함께 선생님의 고향집이 있는 거제도에 놀러 간 기억이다. 거제도에서 내내 탁구 치고 공차고 수영하고 그렇게 보내다가 부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부산에 도착해서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일주일 내내 앓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초등학교의 마지막 겨울방학, 졸업문집을 만드는데 선생님이 함께 하자고 하셔서 방학 내내 선생님 집에서 선생님은 타자 치시고 나는 삽화를 그리며 같이 보냈다. 그때 간식으로 라면을 먹으면서 선생님은 나의 젓가락 사용법을 고쳐주셨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중학교에 입학하자 나는 학교 대표로 전국 글짓기 대회에 나가는 영광도 누렸고 교내 사생대회에서 준장원을 해 미술 선생님이 미술반을 추천하기도 하셨다. 모든 것이 6학년 선생님의 지도 덕분이었다.
대학교 입시를 마치고 선생님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벌써 6년 이란 세월이 흘러 있었다. 수소문 끝에 반장을 통해 선생님이 살고 계시는 곳을 알았다. 강원도다. 선생님은 민간인들은 잘 들어가지 못하고 군인들만 사는 관사에 살고 계셨다. 6학년 당시 선생님의 애인이 육군사관학교에 다니셨으니 원하시는 대로 결혼을 하신 것이다.
어머니에게 1박 2일 외박허가와 용돈을 받아 밤새 기차를 타고 혼자 강원도로 갔다. 반장 보고 같이 가자니 주소 하나 들고 찾아갈 수는 없다고 한다. 강원도에 내려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걸어서 드디어 오전 8시쯤 선생님 댁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금방 잠이 깬 얼굴로 선생님이 누구냐고 물어보신다. 선생님은 여전히 아름다우셨다. 내 이름을 이야기하니 가만 생각하시다가 갑자기 웃음을 가득 안고 반갑게 맞이 하신다.
아침밥을 내어주셔서 맛있게 먹고 아쉬워하면서 길이 너무 멀어 곧 내려가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한 겨울이라 날씨가 매우 차가운데 버스 타는 곳까지 따라 나서 주셨다. 관사 지역이라 버스 타는 데까지는 1킬로가 넘었다. 가는 길에 대학은 어쩔 건가 물어보신다. 시험을 못 봐서 아직 모르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당시 새로 생긴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추천하신다.
버스가 도착해 버스를 타려고 하니 선생님이 계몽사에서 아동문학상을 타서 돈이 많다며 3만 원을 손에 꼭 쥐여주신다. 이래저래 선생님은 나한테는 주시기만 하시는 존재이다. 그렇게 선생님과 헤어졌다. 아직도 차창으로 긴 머리를 눈발에 날리며 손을 흔들어 주시는 선생님의 아름다운 모습이 가슴 가득하다.
그리고 다시 30년이 지나 다시 선생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으며 지금도 소식을 전하며 지낸다. 선생님은 얼마 전에 거제에 아지트를 마련하셨다고 힘들면 언제든 내려오라고 하신다.
현재 코로나로 나는 힘들지만 선생님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의 진심 어린 응원과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다. 하지만 주눅 들지는 않는다. 빚처럼 받은 많은 분의 사랑을 평생 갚으며 살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오늘 또 나는 그 빚을 갚기 위해 텅 빈 사무실로 출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