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에게 매일 높은 수준의 공감능력이나 도덕성을 요구 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피치 못할 위험이나 습격에 대비 하기 위해 당연히 에너지 낭비를 덜 하려는 쪽으로 생활 하는 본능적인 습관이 있기 때문에, 말/행동/노력 등 그 어떠한 것이라도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여력 = 정신적인 에너지를 필요 없는 일에 쓰는 것을 극도로 조심하게끔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다 위에서 300m 앞 부표를 찍고 오는 바다수영대결을 하는 두 명의 남자가 있다고 해보자, 아무리 대결이라 하더라도 두 명 모두 기력이나 에너지를 100% 쓸 수는 실제 없다. 왜냐하면 바다수영대결에서 전력질주로 승리를 하더라도, 그 후에 에너지가 고갈 되어 돌아올 힘이 없거나 돌아 올 힘을 남겨두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바다에 잠겨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배려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로는 "도와주려 하거나 보살펴 주려고 애를 쓴다"라고 되어 있다. 앞서 두 남자의 바다수영대결에서 우리는 인간이 젖 먹는 힘까지 다해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법칙이 DNA에 박혀 내재되어 있는 태초의 생존본능임을 깨달았다. 즉,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과도하게 높은 수준의 공감능력이나, 도덕성을 발휘'하라고 이야기 하는 건 부자연스러운 거구나라고 생각이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가 ?
어떤 사람에게 과도한 공감능력을 요구한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에선 특정 상황에서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공감을 요구를 하는 경우나 문화를 쉽게 볼 수 있다. 남자 역시 여자를 믿지 못해, 과도하게 집착 하는 경우도 자주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사생활이 물밑에서 수면 위로 올라오면, 정의중독 사회는 그 사람을 심판한다. 과도한 도덕성을 요구한다. 특정 상황에서 이치에 맞지 않음에도 과도하게 공감을 받아야 할 것을 강요 받는 사회에서는 다름은 존중 받지 못하고 파괴 된다. 내 연인은 공감하지 못하는 쓰레기 남자친구가 된다. 도덕성을 과도하게 요구하는 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이든 쉽게 '부적절한 사회'가 되기 쉽다.
서로의 기대치를 좀 더 내려놓는 건 안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