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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빛 Mar 30. 2022

통신 장애가 생기면 일어나는 일

어떤 하루


이상한 병에 걸린 것 같다. 집이 조용한 걸, 아무 소리가 안 들리는 걸, 무언가를 안 보는 걸 못 참겠다.

아침에 일어나면 무의식적으로 티브이를 켠다. 아침 시간이라 다들 바빠서 정작 아무도 보질 않는데 티브이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문득 이상하다.


늘 무언가를 보고 있다. 내 머릿속은 흡사 정글 같아서 정리와 침묵이 필요함에도 나는 무언가를 보는 걸 포기하지 못한다. 내 폰에는 웨이브,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까지 깔려있다. 나는 티브이에 연결해서 늘 무언가를 보고 있다. 보는 행위에 중독이 된 듯이.


어느 날 거실에서 스텝퍼를 하면서 티브이를 보다 문득 현타가 왔다. 어떤 예능을 보고 있었는데 그 방송 내용을 보고 생각하고 웃고 즐기는 게 아니라 아무 생각이 없이 그냥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는 걸 나도 모르게 자각한 것이다.

요즘도 그렇게 배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TV는 바보상자”라고 배웠었다. 그땐 그렇게 배우면서도 “왜?”라는 생각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요즘은 이해가 간다. 그것들에 적응이 되고 중독이 되어 가끔씩 뇌가 멈추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요즘 나는 어떤 단어가 갑자기 생각이 잘 안나기도 하고, 생각이 멈춰버린 느낌을 받았다. 원래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내가 더더욱 그렇게 된 느낌. 몸에 녹이 잔뜩 슬어버린 느낌.


그러던 어느  아침, 일어나 보니  IPTV 고장이  있었다. 와이파이도 잡히지 않고, 방송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컴퓨터는 당연히 되지 않았다. 화면에는 그저 신호가 잡히지 않으니 고객센터로 전화하라는 문구뿐.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런지 고객센터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번을 넘게 전화해서 연결된 고객센터에는, 동네 전역에서 일어난 일이라 복구중이라고 했지만 정확히 언제 복구가 끝나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내야 하지?




아무것도  놓지 않은 우리 집은 정말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아이조차 학교에 가서 아무도 없는 집에 아무 소리도 들르지 않으니 굉장히 어색했다. 오늘따라 아파트 어딘가에서 맨날 하던 그 시끄러운 인테리어 공사조차도 하지 않는다.


이번 통신장애는 지역뉴스에도 조그맣게 났다. 동네 인터넷 선 연결 공사가 잘 못되어 생겼다는 이번 일은, 정전이 된 것처럼 아파트 대부분이 절간처럼 조용해 보였다.

나는 소리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우선 집을 시끄럽게 만들어 보았다. 청소를 부랴부랴 마쳤다. 청소기 소리로 시끄럽던 집이 곧 조용해졌다.


또 어색해졌다.


이제 뭘 해야 하지? 나는 화장실이 마려운 강아지처럼 초조하게 하릴없이 집 안을 서성대기 시작했다.

때마침 빌려온 책도 없는데, 도서관에 갈까? 서점은?

일단 이른 점심을 먹자. 나는 밥상을 차려 밥을 먹기 시작했다. 젓가락이 반짝 부딪히는 소리, 밥을 씹는 소리. 이 세상엔 나와 밥그릇 단 둘 뿐인 기분이었다.


산책을 나갔다. 이제는 햇볕에 반사된 등이 제법 뜨겁다. 사람들의 옷차림에는 이미 봄이  있었다. 나만  같은 겨울에, 겨울 같은 집에 내내 처박혀 있었나 보다.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그냥 신이 났다. 마음속에 새싹이 , 하고 자라난 느낌.


공원에는 튤립을 잔뜩 심어놓았는데, 어찌나 환하게 피어있던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봄꽃 구경을 못 갔구나. 바깥은 알록달록 엠엔엠즈 초콜릿처럼 화사하고 저마다의 색깔을 내고 있는데, 문득 나만 갇혀 이 세상의 다양한 것들을 못 보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도 파란 하늘에, 주황빛 분홍빛 튤립들을 보고 있자니 답답했던  눈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사람들 없는 공원 구석에 가서 모처럼 커피도 한잔 사서 마셨다. 공기는 모처럼 맑고 달콤하다. 말로 표현하기엔 어렵지만, 비가    냄새가 나는 것처럼 봄이 오면 봄의 특유의 냄새가 있다. 달콤하고 뭔가 부드러운 . 새싹의 향인 것 같기도 하고 비가 온 직후의 젖은 흙 냄새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마스크 없이  냄새를 오롯이 코로 맡은지도 2년이 넘은  같다.

시럽이 하나도 들지 않은 커피인데도 맛이 달게 느껴졌다. 나는 사람들이 오지 않는  공원의 작은 공간에 감사하며 모처럼 천천히 커피의 향과 맛을 음미하며 노을이 예쁘게  때까지 그렇게 영원처럼 앉아있었다.


생각해보니 인터넷도 티브이도 없는, 심심하고  해야 할지 몰랐던 하루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이 쉬고 머리가 쉬어간, 전혀 심심하지 않았던 시간들이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놓치고 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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