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주방을 지나다가 싱크대 앞에 멈춰 섰다. 집안을 훑던 내 시선 끝에는 우리 가족들이 하나씩 먹고 남긴 유산균 껍데기와 그 옆에 덩그러니 놓인 유리컵이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었다. 아침에 출근하는 신랑이 바쁘게 입안에 털어 넣고 남은 껍데기가 하나. 출근 준비 중인 아빠 옆에 쪼르륵 섰을 우리 집 꼬마들이 아기새처럼 입을 벌리고 하나씩 받아먹었을 유산균 껍데기가 둘. 아빠가 유리컵에 물을 꽉 채워 꿀꺽꿀꺽 마시고 그다음 아이들도 나눠 마시고 비워졌을 유리컵. 그리고 조금 뒤 나도 똑같은 유산균을 먹고서 더해진 껍데기가 또 하나. 그리고는 같은 유리컵에 물을 따라 마시고 다시 비워진 유리컵. 우리가 하나둘씩 쌓은 아침의 이 흔적들이 우리 가족의 안녕과 안온한 내 삶을 담고 있는 것 같아서.
우리의 아침이 오늘도 어제와 같이 무탈하게 시작되었음을 말해주는 안부인사 같았다. 사랑하는 신랑과 아이들이 오늘도 건강하고 우리의 하루가 평범하게 흘러 넷이 함께 누운 우리 집 안방 이불속에서 마무리된다. 특별한 건 없지만 더 바랄 행복이 없는 삶. 이제는 나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다른 많은 것보다 사랑하는 이들의 안녕이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이 되었다. 별일 없이 평범한, 이 안온한 날들이 사뭇 감사하다. 물처럼 어떤 형태로 잡히지도 않고, 무색무취라 눈길을 사로잡는 특별한 색이나 향기도 없지만 잃으면 매 순간 가장 간절하게 목말라질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겐 그런 간절함이지만 동시에 모두가 쉽게 잊어버리기도 하는 소중함이라서. 우리의 일상은 담는 마음을 따라 다른 모양이 된다. 나 역시 후자 쪽에 가깝고. 어른이라고 부르고도 남을 나이가 되었어도 내 마음은 아직도 삐죽하게 모난 그릇이라 소중하게 담아내지 못하는 날들이 더 많았다. 어떻게 어떻게 겨우 담았어도 거친 모양새일 때가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넉넉한 마음이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런 내 모습에 스스로 실망하고 자책하다 보면 아이를 키우는 일이 어렵고 지치게 느껴지는 게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 삶에서 벗어나고 싶거나 이전으로 되돌리고 싶은 것은 아니다. 숱한 날을 채웠던 내 자책과 실망은 사랑해서 다정하고 싶었고 소중해서 최선이고 싶었던 내 진심에서 온 것이었으므로.
곱게 담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남이 보면 도무지 뭔지 모를, 별것 없는 이 순간을 사진으로 남겼다. 기억하고 싶어서. 잊지 않고 싶어서. 물론 이런다고 이 마음이 오래 지속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목청이 남다른 우리 집 두 꼬마가 내 귓전을 때리는 고성으로 싸움을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지금 이 마음은 벼락처럼 번쩍하고 순식간에 사라질 테니까. 그렇게 금방 잊어버리더라도 다시 떠올리고 한번 더 기억하고 싶다. 신랑과 아이들 그리고 내가 하나씩 먹고 남긴 유산균 껍데기와 유리컵 같은 것들을 말이다.
외출 후 돌아온 현관 앞에 여기저기 흩어진 우리 네 식구의 신발. 저녁이면 양치 전쟁을 마치고 칫솔 살균기에 나란히 꼽혀 푸른빛으로 소독되고 있는 네 개의 칫솔. 주말 아침이면 아이들과 같이 만들어 먹는 핫케이크. 하루 끝에 네 식구가 안방에 누워 동화책 한 권 읽고 “꼬마들아 이제 자자~” 하고 불을 끄면 그때만큼은 서로 뭐가 그리 좋은지 두 꼬마가 한참 깔깔거리며 장난치다가 자기들도 모르게 까무룩 잠드는 밤들을. 우리 네 사람이 함께, 모두 무탈하고 지극히 평범하게 살고 있다.
이만한 행복이 없다. 특별한 건 없지만 더 바랄 행복이 없는 삶. 함께 하는 우리만 아는 평범한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안온한 날들이 되어 여기, 우리 곁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