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자아가 지워지고 현재가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의미로 육박해오는 초월의 경험은 시간이 충분히 흐른 뒤에야 언어로 기술할 수 있다.
언어로 옮겨진 후에야 비로소 그것은 '생각'이 되어 유통된다.
보통의 인간은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밤에 하지 말았어야 할 말부터 떠오르고, 밤이 되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뒤척이게 된다.
여행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우리를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 놓는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 <여행의 이유>, 김영하
여행을 가기 전, 예측 가능한 모든 것들을 표로 정리해 빼곡하게 작성해 놓곤 한다.
가는 행선지와 세세하게 계획한 시간은 물론, 이동경로, 이동수단 및 비용까지 예측해서 최대한 모든 것을 통제가능한 범위 안에 두는 것이다.
사전에 일행에게 취합받은 가고 싶은 장소와 구글 맵을 통해 알아본 유명한 관광 스폿등을 최적의 동선으로 효율성 있게 돌아볼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3일의 여행을 떠난다고 한다면 최소 3일에 걸쳐서 그 여행을 준비하고 검토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누가 시킨 것도, 딱히 돈을 받는 것도 아닌데 마치 여행사 직원처럼 상세한 일정을 만들어 일행에게 공유했다.
처음엔 내가 그저 계획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심지어 어린 시절에 가족과 패키지여행을 갈 때조차 맘 편히 따라가지 않았다.
패키지 일정 중간중간에 있는, 자유 시간에 대비하기 위해서 다음 날 가는 지역에 대해 전날 밤 호텔에서 미리 찾아보고 공부하여 그 장소에서 봐야 할 것, 알아두어야 할 것들을 정리했다.
그러다 보니 '자유'시간이 나에게는 정해진 것들을 수행하는 시간으로 변질되고 만다.
여행지에서의 시간을 그저 느긋하게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타국에서의 경험은 또 언제 올지 모르는 특별한 순간이니까, 최대한 많은 것들을 보고 담고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어진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와야 한다는 강박적인 의무감.
일상의 부재에서 오는 자유를 누리기 위한 여행을 떠났지만 다시 스스로의 자유를 속박하여 굳이 굳이 고행의 길을 걷고 마는 것이다.
누구보다 '자유'를 갈망했지만 주어진 운명에 따라 해야 할 일을 수행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진격의 거인> 속, 자유의 노예인 에렌이 떠오른다.
십오 일간 유럽 여행을 다녀온 아버지는 자랑스럽게 공책을 내밀었다.
"봐라, 다 적어 왔다."
여행 중, 가이드가 하는 온갖 얘기를 빠짐없이 적어 온 것이다.
내가 준 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하지만 내가 아버지에게 기대한 것은 그런 것이 전혀 아니었다.
내가 원했던 것은 그저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숙제 공책' 덕분에 나는 오히려 아버지의 노력을 인정해주어야 하는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어버렸다.
평생을 검소하게 살아온 아버지는 그렇게 큰돈을 쓴 여행이라면, 그냥 먹고 놀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여행은 배움이어야 한다는 인류의 오랜 믿음을 따랐다.
작년 친구들과 함께 떠난 여행에서 나의 이런 습관은 불안함에서 기인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비행기가 지연되어 예상 시간보다 늦게 도착하고, 생각보다 어려운 타국의 교통과 길에 대해 헷갈리기 시작하면서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안을 느꼈다.
내 예상과 현실이 비껴가기 시작하며 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요소들이 하나씩 생겨갈수록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불안해하는 나를 달래는 친구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보다 훨씬 길을 잘 찾는 친구인데도 불구하고 뼛속 깊이 새겨진 타인에 대한 불신 때문에 친구의 안내를 무시했다.
어느새 나는 여행을 처음 떠난 목적을 잊고 말았다.
함께 즐겁게 있는 것.
나는 계획한 것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좌절감에 현재를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한 발 물러서서 나를 부감해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정해진 일정이 무사히 진행되기를 바라며, 안전하게 귀환하기를 원한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강력한 바람이 있다.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런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그야말로 '뜻밖'이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그걸 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에 치밀한 계획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행이 너무 순조로우면 나중에 쓸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나라를 가든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 너무 고심하지 않는 편이다.
운 좋게 맛있으면 맛있어서 좋고, 대실패를 하면 글로 쓰면 된다.
대부분의 여행기는 작가가 겪는 이런저런 실패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
길을 잃는 다면 어떤가?
어차피 함께라면 길을 잃는 것조차 하나의 여정이고 추억이 될 것이다.
그마저도 즐겁게 함께할 친구들이니, 사실 어딜 가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다.
길을 잃어 멀리 돌아가다 지치면 잠시 쉬어가면 되는 것이고, 배가 고프면 당장 먹을 수 있는 것을 찾아 먹으면 그만인 것이다.
꼭 계획한 것을 먹어야 하는 법이란 없다.
이번 여행에서 아주 좋았던 점은 두 달 전부터 정해두었던 일정대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전혀 예정에 없던 곳에 들르며 우리가 반복했던 말은 '그래도 괜찮다', '맘에 드는 곳이 생기면 언제든 머무르라'는 메시지였다. 그 덕분에 나는 현재에 존재함을 느낄 수 있었다. 타국에서 영화관을 가보는 경험, 발길 닿는 대로 마음에 드는 길을 따라 가보는 경험, 예쁜 카페를 찾아가 몇 시간이고 앉아 있는 경험은 썩 괜찮았다. 이후에 뭘 해야 할지, 어떤 것을 봐야 할지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여기, 현재에서 볼 수 있는 것 중 가장 눈길이 가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인간 본성에 관한 비극적인 사실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인생을 사는 것을 자꾸 미루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바로 저 창 밖에 피어 있는 장미의 아름다움을 즐기지 못하고 지평선 너머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혹은 기억 속 가장 매혹적인 장미 정원만을 그리워한다.
우리는 왜 이렇게 어리석을까? 왜 이렇게 비극적일 만큼 어리석을까? 나는 이제껏 '지평선 너머 어딘가의 매혹적인 장미 정원'을 꿈꾸며 오늘을 사는 것을 미루며 산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의 짧은 인생은 얼마나 이상한가? 아이들은 내가 좀 더 크면'이라고 말하지만, 조금 더 자란 아이는 내가 어른이 되면'이라고 말한다. 어른이 되면 '내가 결혼하면'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결혼한 뒤에는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생각은 이렇게 바뀌고 만다. '내가 은퇴하게 되면' 은퇴 후 그는 지나온 날들을 회상해 본다. 그곳에는 차가운 바람만 불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그렇게 삶은 지나가버렸다. 우리는 너무 늦게 깨닫는다. 인생은 살아가는 여정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매 순간의 연속이라는 것을 말이다"
단테는 "오늘은 결코 다시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라."라고 말했다. 믿기 힘들 정도의 빠른 속도로 인생은 사라져 가고 있다. 초속 30킬로 미터라는 속도로 우리를 둘러싼 공간 속을 가파르게 달려가고 있다. 그러니 오늘은 우리가 가진 가장 귀한 재산이다. 오늘이야말로 우리가 지닌 유일하고도 확실한 재산이다. 어제와 내일이라는 허상에 사로잡혀 흘려보내고 있었지만 사실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건 오늘 밖에 없다.
나는 여행지에서 매일매일의 아침마다 오늘을 최대한 즐기기 위한 다짐을 했다. 이 긴 여정에서, 그리고 무거운 책임 속에서 오늘의 내가 견뎌야 하는 무게는 딱 오늘만큼이다. 딱 오늘 만큼을 견뎌내고 딱 오늘 만큼만 살아내면 된다.
여행에 의미나 목적 따위는 없다. 무언갈 배워야 할 필요도 깨달아야 할 필요도 없다.
여행과 인생은 닮아 있다. 그래서 '이래야만 한다'는 당위성 같은 것이 여행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여행은 그저 우리를 현재 순간으로 되돌려 놓을 뿐이다.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연습을 하러 가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성욕, 수면욕, 식욕 이외에도 한 가지 아주 강력한 본능, 감동을 나누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자신이 감동받은 것에 대해 표현하고 그것을 타인이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타인도 함께 이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자신이 감동받은 대상에 대해 알리고 설명하기에 열심이다. 이 본능 덕분에, 혼자 하는 여행보다 동행하는 여행에서 더 많은 통찰이 이루어질 수 있다. 나는 같은 장소에서도 각자 서로 다른 것을 발견하고 알려줌으로써 각자의 두 시선이 교차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혼자 걸었을 땐 절대 주목하지 않았을 것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같은 장소에 풍요로움을 더해준다. 나와 상당히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친구조차도 그의 시선에서 발견한 것에 대해 듣고 있자면 그가 얼마나 나와 또 다른, 고유한 인간인가에 대해 새삼 감탄하게 된다. 또한 나의 감탄과 설명에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여 들어주는 상대가 있어 그 자체로 나는 행복을 느낀다.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전혀 다른 것에 감탄하는 것에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에게 감사할 수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보다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고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것이 훨씬 편할 수 있다. 그러나 단언컨대, 타인을 통해 어쩌면 놓쳤을지 모를 어떤 것에 대해 새삼스럽게 감탄하는 것은 그 불편함을 감수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값진 것, 바로 '뜻밖의 사실'을 통해 자신을 발견해 내는 여정에 아주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함께 여행을 떠난 친구는 '무엇을' 하느냐 보다는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더 초점을 맞추는 친구였다. 친구는 여행지 내내 내게 집중해 주었다. 보통 우리는 여행하는 시간 동안, 나의 시선에 갇혀 있기 때문에 정작 여행을 하는 '나'에게는 집중하지 못한다. 그러나 친구는 나와 함께 하는 순간들 중, 하이라이트를 포착하여 타인의 시선에서 나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 어떻게 기억되는지를 계속해서 담아 주었다. 돌아와 숙소에서 그 영상들을 다시 보며 새로운 시선에서 그 경험들을 해석하는 건 묘한 감정이었다. 직접 겪은 기억 위에 함께한 다른 사람의 시야로 보는 경험이 중첩되어 쌓여감을 통해 혼자서는 도저히 떠올릴 수 없을 생각과, 느낄 수 없을 감정들을 느꼈다.
현재 일본에서 상영 중인 진격의 거인 극장판 파이널 에피소드 쿠키 영상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삼인방이 진격의 거인 영화를 보았고, 아르민과 미카사는 서로의 평이 갈려 싸우기 시작한다.
아르민은 미처 다 회수되지 못한 떡밥과 수수께끼에 찝찝함을 느끼고, 미카사는 그마저도 좋았다며 10년간 쌓아온 대장정의 마지막을 봤음에 감동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일치하지 않는 첨예한 대립 끝에 둘은 묻는다.
"넌 어땠어? 에렌."
우리의 주인공 에렌은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 곤란했는지, 난처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말한다.
"나? 나는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