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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대한 단상에서 발견하는 나에 대한 단상

타인을 향한 시선 속에서 발견하는 나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 아닌지조차 알지 못한다."
- 막스 프리쉬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는 것은 결국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알아가는 것이다. 함께하며 내가 그에게 무엇을 투사하고자 하는 지를 보는 것이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왔던 것은 결국 나의 욕망과 인식되는 것 사이의 간극을 구별해 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나라는 사람은 곧 세상이 나와 맺는 관계를 말한다. 나와 그를 연결하는 가느다란 실을 잡아당기면 우수수 딸려 나오는 것은 그에게서 발견하는 나의 조각들이었다. 그를 내 삶에 받아들이는 것은 그와 연결된 새로운 삶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무엇을 보는 걸까? 그와 함께 하는 한 달 동안 나는 오히려 모든 것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누구와 함께 무엇을 봐도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담장에 그려진 그림에서도, 이웃집 창문의 붉은 조명에서도, 꽃집을 지나치다 우연히 시선이 머무르는 리시안셔스 다발에서도, 함께하는 친구의 사려 깊은 친절에서도 그를 발견하곤 한다. 나는 그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하기보다, 오히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서 그를 발견했다. 그를 먼저 떠올리는 것이 새삼스럽지도 않게 느껴지는 요즘, 나는 마치 그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만 같다.

나는 대체 그에게서 무엇을 원하는 걸까? 혹시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을 그에게 옮기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나를 발견해 내는 일 말이다. 그에게 나 대신 나를 발견하라는 사명을 짊어지게 하려는 것 아닐까? 그러면서 스스로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서 그를 발견하고는 해야 할 일을 다 했다며 안심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 모든 게 그를 통해 온전해지려는 시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나는 가끔씩 그의 이면에서 떠오르는 고유성을 포착해 내어 온전한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뚫어져라 그를 쳐다보곤 했다. 이런 관찰은 그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을 때, 즉, 그가 나에게 집중하지 않을 때 더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가 다른 것에서 자신을 발견해 가듯이, 나도 그런 그를 보며 나를 발견해 갈 수 있다.


인간은 놀라울 만큼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내가 느낀 그와의 유사점은 우리의 공통된 언어에 기반한 것이리라. 같은 나라에 태어나, 같은 언어로 말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인 일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동일한 교양 수준과 가치관, 공유했던 라이트 모티프에 기반하여 서로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다면, 그를 통해 정말로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행운이라 부를 만한 일이다. 언어는 우리에게 이해의 능력을 부여한다.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가 내 이해의 범주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그의 세계가 나의 사고 체계에 수용되는 것을 파도가 모래를 휩쓰는 것과 같은 자연현상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 동안 자연을 이해하는 것이나 타인의 행위를 통해 나의 경험을 재해석하는 것이 별반 다르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동일한 언어로 그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인과관계의 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자연을 감상하는 것과도, 나아가 예술을 감상하는 것과도 일치한다. 개별적인 사건을 행동하는 말로써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면, 나아가 그를 통해 우리의 체험을 단순한 느낌 이상으로 표현해 낼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언어로 하는 예술의 근간일 것이다.

그러나 같은 언어를 쓴다 해도 그와 나 사이에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와 알베르 카뮈만큼의 간극이 있다. 플로베르와 같은 그는 섬세하게 세상을 포착해 낸다. 그는 무엇이 아름다운지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시각에서 그 특정한 요소를 포착해 내어 사람들에게 내보인다. 어떠한 사물이 어떤 각도에서 어떠한 빛을 머금을 수 있는지, 그 광경이 어떻게 느껴지는지를 내보인다. 피상적이고 전반적인 경험 아래로 깊이 파고들어 무엇이 자신의 마음에 와닿았는지를 진실하게 묻고 신중하게 여과해 내어 선보이는, 반짝거리는 그의 시야는 매혹적이다. 플로베르와 같이 "완벽한 문장"에 집착하며, 문단의 구조와 순서를 정교하게 다듬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그의 글은 교양의 정수라고 불릴만하다. 읽는 이로 하여금 그의 내면에 천천히 스며들게 하기 때문이다. 긴 문장과 섬세한 묘사를 통해 자신이 보는 세상을 완전히 체험할 수 있게 안내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다.

카뮈와 같은 나는 간결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선호한다. 눈앞에 피사체에서도 한 발 멀어져, 그 무엇도 섬세하게 담아내지 않고, 새가 멀리서 아래를 내려다보듯 묘사하는 것이 나의 방식이다. 핵심을 정확히 전달하고자 지나치게 감정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무덤덤하고 차갑고 담백한 말투로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그 부조리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데만 관심이 있다. 주변이나 사건을 묘사할 때조차 감정적 개입이 거의 없고 감각적으로 단절되어 있다. 이는 내가 심리적으로 나의 감정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잘 드러나는 특성일지도 모른다. 카뮈와 같이 단순함 속에 깃든 인간 존재와 삶에 본질에 대한 심오하고 철학적인 문장.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문장이다.


나는 그의 고유성을 모두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외부 세계에 침잠해 들어가면서 나는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자신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를 통해 나를 인식하려던 나는 질투에 사로잡히고 만다. 결국 그의 고유성을 통해 인지하려던 것은 나의 고유성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새로운 인식의 확장을 느낀 것은 오로지 그였다. 그렇기에 난 여기 남겨져 있고 그는 넓혀져 가고 있다.


내가 느낀 것은 그가 발견한 세계에 대한 질투일까? 그의 철학을 깊게 들여다보면 그가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낫다는 것은 타인이 쉽게 인지할 수 있는 재능의 영역에 국한되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사고의 끝에 도달한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이 있다. 그렇기에 그는 상처 주는 것을 주저하는 것이다. 상처를 줄 바에 스스로를 한 번 더 인식하고 마는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지능에 기반한 '선함'이라는 것은 비쳐 보일 때마다 내게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편협한 시선으로 타인을 배척하는 것이 익숙하기만 한 내가 도저히 가져 본 적 없는 시선에 기반한 선함. 그 시선은 끝까지 스스로의 사고를 의심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인식의 경지이기 때문에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사랑을 위해 자신만의 견고한 성을 향해 질문을 던져 깨뜨릴 수 있는 노력을 할 수 있었던 그를 보면서 동시에 나의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성을 보게 된다. 이 성은 정말 견고한 걸까? 세찬 폭풍에 부러지게 될까? 재건할 시기를 놓친 것은 아닌가?


그를 통해 나를 비춰 본다면 생각이 게을렀던 것은, 어쩌면 내가 아니었을까? 그의 흔적을 따라가며 지면을 밟아보는 것이 그를 기다리는 내가 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나는 같은 것을 보고도 같은 감정을 인식할 수가 없다. 그것이 내가 그에게 느끼는 질투의 근원이다.


타자를 인식한 다는 것은 결국 하나의 사물을 통해 느껴지는 감각이 주는 단순한 윤곽을 넘어서 그 정체가 나의 시야에서 어떻게 밝혀질 수 있는지를 배워가는 것이다. 나의 인식의 지평선을 넓혀야 비로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과 나의 관계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보면서 그 안의 나를 보고 있다. 나는 그에게 동화되어 보기도 하고, 그를 내 세계로 편입하여 옳고 그름의 구별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두기도 하고, 그의 언어를 따라 하면서 길들임의 과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그렇게 적응과 조정의 과정을 계속하다 보면 마침내 발견하는 것은 그와는 또 다른 것을 느끼고 있는 나만의 정체성이다.

그의 세계관과 그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다고 해도 그의 모든 것을 소유할 수는 없었다. 씁쓸하게 느껴지는 이 사실이 오히려 나를 자유하게 하며, 발견하게 한다. 당신의 언어의 낯섦이 당신이 가진 고유한 영혼의 낯섦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나는 우리가 다른 개체라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하고 합일에 대한 이기적 욕망에서 벗어나 타자로서 당신과 나의 각기 다른 욕구를 인식하고,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게 된다. 나와는 또 다른 소리를 내는 당신만의 운율을 알게 되는 경험, 당신만의 선율을 듣는 경험은 내가 세상에 나를 연주하는 방식이 또한 어떻게 다른지 새삼스레 느껴지게 했다. 그렇기에 그저 당신의 언어가 어떻게 발전해 갈지를 지켜봐 주는 것이 나 또한 고유한 하나의 존재로서 당신의 영혼과 교류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라고 믿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골방에 틀어박혀 스스로의 생각으로 끝없이 파고 들어간다고 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갈등과 상황 속에 나를 던져 넣으며 어떻게 내가 반응하는지, 어떤 것을 못 견뎌하는지, 어떤 것에 흥미 있어하는지, 무엇을 좀 더 오래 바라보는지, 어디에 좀 더 오래 머무르고자 하는지 찾아내야 한다. 내가 인식하는 범위까지가 나의 세상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서로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서로에게만 함몰되어 있으면 안 된다. 우리는 세상에 나가 세상과 부딪혀 상호작용하는 서로를 보며 더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이 파도에 부딪혀 흩어지는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당신이라는 사람이 가진 형질에 대해 제대로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도 마찬가지로, 내가 세상의 수많은 다른 것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 가를 지켜봐야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총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를 알기 위해서도 서로에게만 집중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함께 세상으로 나가 수없이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한다. 그리고 같으면서도 또한 다른 각자의 언어로 심화된 이야기들을 서로에게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사고의 또 다른 테마와 또 다른 모티프를 쌓아가며 점점 발전하는 멜로디를 새롭게 쌓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우리가 서로에 대해 진정으로 알고 이해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 걸까? 서로에 대한 믿음이 낯설어지는 순간은 우리에게도 반드시 올 것이다. 그때의 낯선 믿음은 옅어지다 못해 투명해질 테고, 그 투명한 막 너머로 서로의 사고를 비쳐 볼 테고, 그다음 비로소 새롭게 서로의 것을 습득해 다시금 친숙한 믿음으로 돌아가게 되리라 믿는다. 낯선 바람이 따뜻한 공기 아래로 파고들어 순환하면서 또 한 번의 완전한 순간을 만들어 갈 것이라 믿는다. 이러한 친밀함과 낯섦의 반복은 우리가 계속해서 느낄 아주 중요한 감정이다. 웃음과 울음, 수치심과 두려움, 그리고 질투를 반복해서 느껴가며 나는 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그와 맺는 관계가 어떤 형식을 취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 관계가 내게 어떻게 경험되는지를 정의한다. 나는 다른 방식이 아닌 내가 느끼는 바로 그 방식을 통해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를 통해 나는 결국 나의 존엄함을 경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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