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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랑받을 만한 것을 만들어내려 한다.

사랑은 확인과 생산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사랑은 트렌드 한 맛집 사진에 현란한 해시 태그로 장식된 SNS 피드이다. 내 아내, 아니, 내 자녀까지 기죽지 않으려면 이런 맛집 사진, 여행지 사진, 유행하는 아이템 하나둘 쯤은 이미 피드에 올라와 있어야 마땅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피드에서 눈을 떼 주위를 둘러보면 입자인 줄 알았던 그들이 이중 슬릿을 통과하니 파동처럼 서로 간섭무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런 존재들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걸까? 관측할 때만 존재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걸까?


한편, 한 개인의 피드를 장식하는 수없이 현란한 태그들은, 그만큼 사랑 이외에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가 많은 시대이기도 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한 때는 생존이 목표이던 시대가 있었다. 살아남는 것이 단일한 희망이자 목표이며, 부족한 자원을 챙취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달려가다 보면 그 밖의 수많은 것들은 눈을 돌릴 수조차 없었다. 지금은 먹이를 찾기 위해 달려가지 않아도 나무에서 나온 열매와 도축된 짐승들을 먹을 수 있다. 육아라는 24시간 리얼리티 풀 라이브 생방송 이외에도, 수많은 라이브가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기 위해 혈안이다. 우리가 즐길 볼거리도 놀거리도 많다. 거기에 심지어 자아실현 또한 콘텐츠가 된 시대이지 않은가. 21세기의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콘텐츠이자 사랑의 대상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알고리즘의 선택이 나의 피드에 사랑을 올려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SNS에서는 그 어떤 특정 콘텐츠도 필수가 아니듯이, 사랑 또한 우리의 인생이라는 플랫폼에서 필수가 아니게 되었다. 부정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 사랑은 이미 그런 위치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때때로 사랑은 광고 형태로 우리의 부러움을 사며 등장하기도 한다. 이런 남자/여자를 만나야 한다! 이런 데이트가 행복한 데이트이다! 이런 선물이 좋은 선물이다! 그들은 마치 정해진 답이라도 있는 것처럼 떠든다. "당신이 응당 누려야 할 수많은 행복들은 바로 이런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바꿀 수 없는 행복, 잊을 수 없는 로맨틱한 순간! 그 모든 것의 출발… XX호텔>"


수많은 창작물에서의 사랑은 많은 사람들의 이상향인 아니마/아니무스가 투영된 형태로, 직접 그 이미지를 뒤집어쓴 채로, 자아가 집어삼켜진 상태로 우리의 불완전한 감정을 투사할 도구가 되어 나타 한다. 우리는 과연 사랑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을까?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사랑, 그 행복한 사랑이라는 이미지가 과연 자본주의가 시장의 원칙에 따라 판매하는 사랑의 형태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이전 세대와는 다르게 우리는 현실에서 점점 더 고립되어 간다. 친근한 이웃 주민은 옛 말이고, 이젠 얼굴조차 서로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색다른 장소에는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가 이곳에서도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보다 크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 친구, 이웃, 동료 등 많은 인간관계에서 나눠질 수 있었던 짐이 이제는 전부 연인에게 쏠린다. 우리는 때로 연인에게서 엄마나 아빠의 모습을 찾는다. 아주 이상적인 부모처럼 날 대해주길 바란다. 그러다 가끔 친근한 친구처럼 굴어주길 원한다. 또 가끔은,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색다르고 낯선 이성으로 느껴지길 바란다. 우리는 서로에게 과대하게 기대하는 바람에 마음이 다치고, 또한 과도한 기대를 받는 바람에 마음이 지친다.


그러다 사랑은 콘텐츠가 다 하는 날 끝나 버린다. 더 이상 올릴 챌린지가 없을 때, 하고 싶은 말을 다 적어내 이제 더 이상 쓰고 싶은 말이 없을 때, 이제 더는 올릴 것이 없으므로 피드에는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는다. 혹은 자기 복제를 하듯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콘텐츠가 반복되며, 팔로워들은 질려서 하나둘씩 떠나간다.

'아, 여기도 커지더니 변했네. 옛날 감성이 좋았는데.'


지켜야 될 것이 많아져버린 사랑이라는 채널에서는 이전처럼 모험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를 기대할 수 없다. 당연하다. 사랑이 변했다고 생각하는가? 사람이 변했다고 생각하는가? 그저 콘텐츠가 떨어졌을 뿐이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 배우게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배울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되돌아보는 진지한 자기반성이며, 이러한 반성은 삶에 대해 보다 겸허하고 진실한 자세를 갖게 한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어떻게 이별해야 할지 배우게 되면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의 내가 가진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한 사랑의 자세를 갖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곧 죽을 존재라는 것을 기억한다는 것이 슬픈 일이긴 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늘 다른 것들을 값지게 만들어 준다. 로마시대에는 파티를 할 때 해골을 들고 노예가 파티장 곳곳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면 맛있는 것을 먹고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그 해골을 보고 자신이 곧 죽을 존재라는 것 떠올린다. 자신이 필멸자라는 것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포도주가 더 맛있어지고 음식이 더 맛있어진다. 이 모든 감각을 느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모든 경험을 일회적으로 각별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의 결말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공주와 왕자가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사실 그들의 진짜 끝은 이별이었다. 그들에게도 이별의 순간은 찾아온다. 평생 아무리 사이가 좋았어도,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우리에겐 이별도 착실하게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다. 이별은 반드시, 그리고 언제든지 찾아온다.


우리는 이별이 예정된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은 잠시 망각하고 있을 뿐, 혹은 망각하기 위해 애쓸 뿐이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문제는 그 당시 해결해야 할 감정을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방식으로 털어놓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그러니 서로가 없는 곳에서 서로를 원망하거나, 인정하거나, 칭찬하거나,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말자. 사랑이 살아 있을 때 그 하나의 감정이라도 다 털어내고 가자. 그리고 그 후로 선물같이 조금 더 남은 나의 삶에서 나눌 수 있는 모든 것을 사랑의 대상에게 여한 없이 나눠주는 데 쓸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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