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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왁킴 May 26. 2022

자꾸만 사랑하고 싶은, 나의 가족

제 1장 나의 남편


 돋보기 안경을 쓴 예비역 선배와 3학년의 날라리 여학생으로, 나와 남편은 그렇게 처음 만났다. 남편 말에 의하면 당시의 학회장 선배는 순진한 복학생이 염려 되었는지 '김ㅇㅇ 패거리'와는 어울리지 말라는 애정 어린 당부를 일찌감치 건넸다고 한다. 하지만 남편은 애석하게도 김ㅇㅇ이란 여학생과 같은 조가 되어 MT를 다녀오게 되었다. 조장이라는 무거운 직분을 떠안은 남편은 다른 예비역 선배들과 낄낄대며 조를 이탈하기에 바쁜, 제 멋대로인 조원을 추스르고 또 추스르며 2박 3일의 일정을 힘겹게 보내야했다. 애초에 선후배와 살갑게 지낼 생각이 없던 당시의 나는, 조 뒤풀이 모임에도 별 관심이 없었는데, 조장의 끊임없는 참석 권유 문자로 뒤풀이에 참석하는 착실한 모습을 잠시나마 보이게 되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남편은 내 답장을 받기 위해 필요없는 단체 문자를 몇 개나 보냈는지 모른다며, 다른 조원들이 우리 연애의 희생양이었음을 인정했다. 우리 조원들은 뒤풀이의 연장선으로 종종 남편의 집에 모여 공부를 하기도 했었는데, 그러다 어느 날은 남편 집에 샤프 한 자루를 떨어뜨리고 와서 덜렁덜렁 수업에 들어간 날이 있었다.



✉ 선배! 혹시 선배 집에 제꺼 샤프 있어요?


라는 가벼운 문자에,


✉ 글쎄. 찾아봐야겠네. 근데 넌 공부하는 애가 샤프가 한 자루밖에 없어?


라는 질책이 담긴 답장을 보낸 남편은 몇 호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냐고 묻더니, 쉬는 시간에 포장을 뜯지 않은 샤프 여러 자루를 강의실로 가져다주었다. 함께 수업을 듣던 동기들이 저 선배가 너한테 왜 이런 걸 사다주냐며, 저마다 수군대고 키득거리기 바빴다. 당시 내 성격은 정말이지 피곤하고 대단해서, 수군대는 동기들을 향해 뭘 쳐다보냐고 윽박을 질렀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 정도였으나, 발그레한 얼굴로 묵묵히 웃고만 있었던 내 행동으로 비추어 볼 때 나 역시 남편의 친절이 싫지 않았던 것 같다. 며칠 후 싸이월드 쪽지를 통해 내게 수줍은 고백을 한 남편은 결국 망나니 같은 여자친구를 얻는 데에 성공했고, 수줍게 시작한 우리의 연애는 긴 싸움과 짧은 화해를 반복하며 8년이라는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내 연애는 무언가 좀 특별할 거라 기대했으나 남들과 너무도 똑같이 결혼식이란 뻔한 결말에 이르렀고, '미혼'의 자유분방함을 내려놓은 채, '기혼'이란 진부한 여정까지도 함께하게 되었다.  






 남편은 참 다정한 사람이다. 연애 초반부터 지금까지 내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 함께 있을 땐 항상 가방을 들어주는 사람. 가벼운 기침에도 물병의 마개를 돌려주는 사람. 음료의 입구를 본인의 옷섶으로 기꺼이 닦아주는 사람이다. 내 친구들 중엔 남편이 나를 위해 준비한 이벤트에 본인이 나서서 먼저 눈물을 보이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있었을 정도로 남편은 따뜻하다. 그런 남편과 달리 나란 사람은 애초에 사람을 대하는 마인드부터가 냉면처럼 차가운데, 천만다행으로 겨자 몇 방울 정도의 알싸한 매력은 첨가된 모양인지(사실 그런 식이 아니고서는 뭐가 내 매력이라고 해야할지 잘 모르겠고 쑥스럽다), 남편은 내게 여전히 애틋하다.


 얼마 전, 나를 비롯해 타지에서 살고있는 고향친구 셋이 모였다. 유부녀의 모임이니 당연한 듯 우리는 남편과 아이, 시댁과 친정 이야기로 수다를 떨며 알차게 시간을 채웠다. 수다가 길어질수록 속 깊은 이야기들이 테이블에 던져졌는데, 친구들의 말 중에는 한참을 생각해야 그 진의를 알 수 있는 묘한 매력의 발언들도 있었다. 아이의 이야기가 나올 땐 귀엽다거나, 예쁘다며 노골적인 자랑을 서슴지 않았는데, 본인 남편 이야기를 할 때는 보이지 않는 얇은 막이 문장 위를 덮고 있었다. 그래서 난 자랑인 지 아닌 지가 도통 헷갈렸다. 그런 말들은 대개는 어리광 섞인 툴툴거림으로 포장되어 있었는데, 그건 주로 남편의 '언행'에 대한 문제에서 출발했다. 한 친구는 '니가 뭘 하겠다고', '니가 뭘 안다고', '너는 그런 걸 못 배워서'라는 말을 시시때때로 사용하는 남편의 말투를 문제 삼았고, 또 한 친구는 '△△야, 이거 어딨어?', '△△야, 저거 있어?'라고 물으며 끊임없이 본인에게 의지하는 번거로운 남편의 태도가 부담이 된다고 했다. 그게 싫다는 건지, 좋다는 건지, 그래서 상남자 같고 멋지단 건지, 자기가 챙길 수밖에 없는 매력이 있다는 건지 아직도 그 해석은 확실치가 않다. 그러나 해석에 앞서 일단 남편에 대한 그런 말들은 나를 좀 곤란하게 하는 면이 있다. 왠지 탄식하고 맞장구도 치며 호응해주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그럴 만한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는 많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저런 얘기를 남편에게 했었는데, 그 때 남편은 기분이 좋지 않았겠구나.'를 깨닫고 반성하는 일은 아주 아주 많다.


 지지난주에 남편이 인터넷으로 물건을 주문했다. 조미김이 떨어졌다며 내 귀찮음을 덜어주려 본인이 주문을 한 모양인데, 찬장에서 식재료를 꺼내다가 뜯지도 않은 김 세트가 있다는 것을 내가 발견하고 말았다. 그걸 발견한 순간 나는 날이 선 하이에나가 되어 순진한 심바*를 신나게 물어뜯었다. 불쌍한 심바는 좁쌀만한 본인 실수 때문에 돌매를 맞아야했다. 그리고 3일이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내가 잘못 주문한 두 세트의 키친타올이 현관앞에 도착했다. 현관에 쌓인 박스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신중하지 못했던 내 자신을 한심해하며 소리없이 택배를 정리하고 있는데, 남편이 다가와 키가 닿지 않는 찬장에 물건을 넣어주며 말했다.


"우리는 요즘 쌓아놓는 걸 좋아하네? 소모품은 좀 쌓아놔도 되지 뭐. 많으면 든든하고 좋지."






 연애한지 천일이 되던 날이었다.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영등포행 기차에 오르는 나를 배웅하며 남편이 심심할 때 기차에서 읽으라고 손에 책 한 권을 쥐어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에쿠니 가오리'가 쓴 에세이집이었다. 기차에서 한 장 한 장 책을 넘기는데, 책 여기저기에 형광펜이 그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챕터가 끝나는 부분마다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는데, 거기엔 남편이 느낀 간단한 감상이 적혀있었다. 절반을 채 읽지 못하고 목적지에 도착해서 친구들을 만났다. 그 때 만난 친구는 내 손에 들린 책을 떠들어 보고는 감동을 받았는지 눈물을 그렁거렸다.


천일이 되던 어느날 선물받은 책_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_에쿠니 가오리
남편의 이벤트_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_에쿠니 가오리


 10년도 넘은 지금, 기억 속에 내 눈물이 아닌 친구의 눈물이 또렷이 남아있는 이유는, 내가 당시 남편과의 관계에 싫증과 권태로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이 남긴 정성스런 기록은 우리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었으나, 나는 그런 남편의 노력을 지켜보면서도 평생을 이 사람과 살 수 있을지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더 연애를 해도 될지, 더 길어진다면 어쩌면 결혼까지 생각하게 될 수도 있는데 평생을 함께할 만큼 서로에게 확신이 있고, 애정이 있는지를 곱씹고 곱씹던 위기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시간의 힘이란 것은 참으로 무섭고도 온화해서, 이제와 넘겨보는 책장에는 어떤 단어가 있든, 어떤 내용이 있든 그저 풋풋하고 아름다워 보이기만 한다. 남편 역시 시간의 힘에 지배된 모양이다. 얼마 전엔 간만에 이 책을 다시 읽고 싶다며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젠 감성이 좀 메말랐는지, 책 내용이 눈에 안들어온다며 이내 덮고 마는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남편 역시 그 시절을 이따금 떠올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 또 한 번 난, 따뜻해졌다.




 

 

  남편이 이틀 째 드러누워있다. 작년 이맘때쯤엔 내가 몹시 앓았고 이제야 좀 나아가고 있나 싶은데, 이번엔 남편의 허리가 말썽이다. 장거리 운전이 몸에 많은 부담이 된 모양인지, 나아질만 하면 아파오고, 나아질만 하면 또다시 아파오는 통증 때문에 며칠은 운전대를 잡지 않아야겠단다. 쉴 새 없이 일에 몰두해온 남편이 큰 결심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차를 마시고, 드라이브를 한다면 그 휴식이 참 반가울텐데, 집에서 수발만 들며 시간을 보내야 하니 영 답답한 기분이 되어서 나는 툭툭 짜증이 새어나오고 만다. 몸 아픈 사람은 오죽 서러울까 싶어 삐죽삐죽 입 내미는 짜증을 눌러 담다가,  우리의 나이를 떠올리고, 우리의 아이를 떠올리고, 파릇했던 우리의 긴 시간들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덕분에 참 오랜만에 우리가 함께해 온 긴 시간들을 차분히 떠올려 본 것 같다.


 그런 생각들 끝에, 이 남자는 한 번쯤은 오롯이 내 글의 주인공이 되어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  이 사람에겐 그만한 자격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글에 녹여본다. 모니터에 집중한 나를 위해 늦은 밤에도 불끄기를 재촉하지 않는 '남편'이, 오늘만은 내 글의 원탑이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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