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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무 Jul 18. 2022

무력감에 대하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6장

 이 장에서 저자는 무력감의 메커니즘을 매우 상세하게 묘사한다. 무력감을 깊이 앓는 사람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면, 그의 정확한 분석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구구절절하게 공감할 것이다. 저자는 이 무력감이 신경증 환자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 계급의 특성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 주장이 크게 와닿지는 않기 때문에, 무력감 자체에 대한 그의 설명과 묘사를 그대로 옮겨 적는 데 이번 글의 대부분을 할애하겠다.



나는 어떤 것에도 영향을 미칠 수 없고 어떤 일도 착수할 수 없으며 내 의지로는 외부 세계나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고, 아무도 나를 대우해주지 않으며 모두가 없는 사람 취급한다.



# 상처를 주고, 호감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확신을 갖는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바로 그런 이유로 공격적인 말을 내뱉고는 다른 사람이 그 때문에 상처받았다는 사실에 놀란다.

    누군가 자신을 사랑하거나 좋아하도록 만들기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다. 남들과 잘 어울리려는 노력도, 타인의 사랑과 호감을 얻기 위해 필요한 행동을 적극적으로 해보려는 노력도 전혀 하지 않는다. 당연한 사랑과 호의를 얻지 못해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그것이 착시라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사랑받기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기에 타고난 성질에 온 관심을 집중한다. 그래서 늘 자신이 타인의 마음을 얻을 만큼 똑똑한지, 예쁜지, 착한지 의문에 사로잡혀 있다. 그 결과는 보통 깊은 열등감이다.



# 구원을 바라지만 자력구제만큼은 배제한다

    무력감은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난 원래 그래. 절대 바꿀 수 없어.”라며 이런저런 성격 때문에 얼마나 괴로운지 한탄하고 푸념하는 것으로 인생을 다 보낸다. 혹은 자신을 바꿀 각오가 되었다며 자랑을 늘어놓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스스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확신에 집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종교나 저런 철학을 좇으며 어떻게 하면 자신을 바꿀 수 있을지 궁리해 매주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엄청난 계획을 가져다줄 애정 관계를 기대하지만,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자력으로 무언갈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즉각 방어하지 못하고 원한을 쌓아 올린다

    무력한 사람은 부당하건 정당하건 자신을 향한 모든 비판을 무조건 수긍하면서 반론을 펼치지 못한다. 자발적으로 모욕을 감수하다가 시간이 지나서야 문득 비난이 부당했고 모욕이 지나쳤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때서야 상대의 비난을 반박할 수 있는 온갖 논리가 떠오르고 상대에게 퍼부을 수 있었던 온갖 거친 말이 떠오른다. 그 상황을 되풀이해 떠올리며 어떻게 해야 좋았을지 세세한 부분까지 상상하지만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속수무책이 된다.



# 무력감을 정당화한다

    무력한 사람들은 무력감을 정당화하여 고통스러운 감정을 극복하려고 한다. 첫 번째는 신체적 결함 탓이다. 일단 아프다고 우긴다. 두 번째는 특정한 인생 경험으로 너무나 큰 상처를 입었기에 모든 활동성과 용기를 빼앗겼다는 확신이다. 마지막으로는 상상으로, 혹은 실제로도 문제를 자꾸만 만들어 상황이 절망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무력감이 어쩔 수 없다고 납득하려고 한다. 자신의 무력감을 타당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불행과 갈등을 상상하거나 실제로 만들어낸다.



# 무력감의 합리화한다

    무기력이 일시적일 뿐이라는 희망을 통해 합리화하려는 시도도 있다. 첫 번째는 기적에 대한 믿음이다. 기적에 대한 믿음은 외부의 사건으로 갑자기 자신의 무기력이 사라지고 모든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상상이다. 새로운 관계, 물건, 사람 또는 신의 개입으로 자신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이(아무것도 할 수 없기도 하고), 갑자기 바라던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시간에 대한 믿음이다. 시간이 가면 모든 것이 절로 해결되리라는 기대이다. 이 역시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고 느낄 뿐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세 번째 형태는 무력감을 억압하고 다른 것으로 보상하는 것이다. 정작 해결해야 할 과제의 근본 특성과 전혀 관련 없는 것으로 분주한 가짜 활동성을 보인다. 또는 무력감을 통제욕으로 대응하기도 한다. 기업의 대표나 한 국가의 독재자가 된 자신을 상상하며 탐닉하는 것이 그 예이다. 가장 흔한 사례로는 유럽 소시민 계급의 남성들이 사회경제적 영역에서는 무기력하면서도 아내나 자식, 강아지에게는 권력을 휘두르고 통제하려는 것이 있다.



# 그 결과 화가 나고 불안하다

    무력감의 가장 중요하고 일반적인 결과는 분노다. 다른 종류의 분노와 달리 훨씬 더 모호하고 불분명하게, 하지만 더 파괴적으로 외부 세계와 자기 자신을 공격한다. 적을 깨부수는 것이 아니라 발버둥치고 눈물 흘리며 발작적인 분노를 표출한다. 그 어떤 명령도 따를 수 없고 사사건건 반대할 수밖에 없으며 매사 불만인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분노의 결과는 불안이다. 자기 분노를 억압하기 위해 ‘내가 남들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남들이 화가 났다’는 감정을 탄생시키며, 그 결과 남들에게 미움과 구박을  받는다는 기분이 든다.



무력하지 않은 사람도 무력한 사람 곁에 오래 있다 보면 같이 무력해지고 만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도 이 사람을 무기력함에서 건져낼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지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의지가 없는 사람만큼은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러면서도 내가 떠나면 이 사람은 자신의 그런 행동 때문에 내가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더 이상 자신에게 얻어낼 것이 없기 때문에, 남의 이간질에 바보 같이 넘어가버려서, 자신에 대한 마음이 애초에 얕았기 때문에, 원래 차갑고 무정한 사람이기 때문에 떠났다고 생각할 것이 뻔하기에 주저한다. 그러다 결국에는 나는 이 사람을 수렁에서 건져주고 싶었는데, 이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을 건져줄 사람이 아니라 함께 수렁에 빠져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말로는 자신도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다고 하지만, 정말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 시민 계급의 무력함

    어른은 그가 진정으로 바라고 노력하기만 한다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렇기에 성공도 실패도 다 그의 책임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에게는 자기 운명을 좌우할 힘이 전혀 없기 때문에 자기 책임이라고 믿을수록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그가 어떤 능력을 개발하지, 어떤 직업을 선택하고 누구와 결혼을 할지는 출생의 우연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시민 계급은 자기 행동을 결정하는 정신적 동인과 시장 경제에서 경제 발전을 결정하는 세력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정체를 알 수 없는 운명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안다고 생각(착각)해도 상황을 바꾸지는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제아무리 노력해도 항상 인간 바깥의 더 큰 권력은 남는다. 그 권력과 마주하면 인간의 활동성은 멈추고 맹목적 복종만이 남는다. 개인의 무력함은 권위주의 철학의 기본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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