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다결 Sep 16. 2023

우울을 이기는 정신과 신체 균형

우울하니까 달려야 합니다 1

Unsplash의Wesley Tingey




   누구에게나 우울한 날이 찾아온다. 우울해질 수밖에 없는 수많은 환경이 도처에 깔려있기에 단 한 번의 우울도 거치지 않고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이때 적당한 우울은 가볍게 잘 지나간다. 건조한 땅에 비가 내려야 꽃나무가 생기를 얻고 다음에 만날 햇볕을 기대하게 되는 것처럼 적당한 우울은 성장을 위한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감정엔 넘치면 곤란한 임계점이 있다. 우울도 오랜 시간 누적되어 만성이 되거나 태과하면 심각한 병이 된다.

   우울이 병이 되면 정신과 신체가 충돌한다. 머릿속은 끊임없이 나를 비난하느라 시끄러운데 몸은 축축 늘어지고 기능이 마비된다. 마치 망한 오케스트라와 같다. 지휘자는 독설을 쏟아내기만 하고, 연주자는 악기를 던지고 파업에 들어가거나 조율되지 않은 악기를 뚱땅거린다. 머리는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몸은 머리가 따라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거대한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당연히 이 싸움을 지켜보는 데 많은 에너지 소모가 따른다. 정신적 에너지 소모가 커질수록 사소한 일도 버거워지고, 급기야 밥을 먹거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상조차도 짐이 된다. 그래서 우울증이 참 무서운 병인 것이다. 일상을 살아가야 할 사람들에게서 현재를 빼앗는 병이기 때문이다. 이런 병적인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신과 신체의 균형을 잘 맞춰야 한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유년기부터 꽤 오래 우울과 동고동락한 사람이다.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면서 영원한 건 없고, 삶이 허망하단 생각을 자주 했다. 일찌감치 체감한 삶의 허망함은 어느새 우울이 됐고, 우울은 갈수록 깊어져서 급기야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씁쓸하게도 그 공격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어른은 곁에 없었다. 정서적으로 의존할 대상이 부재했기에 스스로 지탱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나는 살기 위해서 책을 읽었고, 부단히 글을 썼다. 비록 도피성으로 점철되긴 했으나 이 시기 독서와 글쓰기는 나를 지켜주는 방패가 됐다.

   이렇게 우울과의 전쟁이 쉽게 끝이 났다면 참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독서와 글쓰기로 방패를 만들었으나 우울의 습격은 멈추지 않았다. 어떤 날은 방패가 잘 막아주었지만, 어떤 날은 방패가 뚫리기도 했고, 심지어 완전히 두 동강이 나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새로 방패를 만들었고, 이 미련한 짓을 서른이 다 되어갈 동안 수년간 반복했다. 더 크고 단단한 방패를 만드는 장인이 되어갈 동안에도 나는 우울과의 전쟁에서 지기만 하는 이유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미성숙해서 우울을 이기지 못한다는 잘못된 인식은 독서와 글쓰기에 더 집착하게 만들었다. 오로지 정신에만 무게 추가 실린 삶을 유지한 것이다.

   한쪽으로 치우친 나의 삶은 점점 더 불균형하게 무너졌다. 수년간 정신적인 영역에만 집중한 결과, 신체 기능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기초체력은 진작 박살 났고, 앉아서 책 읽고 글 쓰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코어 힘도 덩달아서 약해졌다. 처음엔 이게 큰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진 못했다. 타고나길 몸이 약한 데다 운동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신체 기능이 우울로부터 나를 지키는 일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믿어서였다. 우울은 뇌가 문제인 거니까 부정적인 사고회로에 더 깊게 빠지지 않도록 심리적인 도움을 주는 게 가장 효과가 좋다고 생각했다. 그 판단이 정말 잘못된 판단이란 건 달리기를 시작하고 나서 인지했다.




   나는 21년 봄에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다. 가벼운 외출에서 걷기, 달리기까지 순서대로 진행하는 동안 많은 것이 달라졌다. 특히, 비정상적이던 정신과 신체의 균형을 맞추게 된 건 달리기가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달리기를 이어가면서 문득 이런 말이 떠올랐다. 세상은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말. 학창시절에 수학 다음으로 체육을 싫어하던 나는 그중에서도 달리기를 끔찍이도 싫어했다. 체력장 시험 때문에 오래달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세상이 다 끝난 표정을 지었고, 이게 걷는 건지 뛰는 건지 알 수 없는 좀비 같은 자태로 비척비척 다리를 끌고 다녔다. 그랬던 내가 스스로 달리기로 마음먹고, 숨이 가쁜 순간도 견뎌내며 땅을 박차고 달릴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동안 내가 우울의 침략에서 승리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폐쇄적으로 방어만 했기 때문이다. 방패만으로 우울을 물리치겠다는 발상 자체가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방패만큼이나 무기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독서와 글쓰기가 정신적인 방패를 만드는 일이라면 운동은 물리적인 무기를 제작하는 일이다. 내가 방패만 들고 있을 땐 우울이 무자비하게 공격만 하지만, 나에게 무기가 있으면 우울도 함부로 덤비지 못한다. 게임 속 유저가 유난히 강화가 잘 된 무기를 들고 있으면 움찔하게 되는 것처럼 우울도 똑같다. 내가 강해 보이면 우울도 겁을 먹는다. 잘 벼른 무기가 있어야 우울이 함부로 나를 집어삼키지 못한다는 걸 달리기를 통해 깨달았다. 정신과 신체. 이 두 가지의 균형을 유지해야 우울이 침략하는 빈도가 줄어들고, 설령 우울이 찾아오더라도 맞서서 싸울 수 있다.






   우울을 떨쳐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거대한 몸집으로 내면을 짓누르는 우울을 마주할 때마다 숨이 막히고, 버거운 건 나 역시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래된 우울의 흔적이 아직도 나를 종종 괴롭히고 있단 증거인 셈이다. 그러나 적어도 예전처럼 우울에 잡아먹혀서 나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보다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훨씬 더 많이 한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꼬인 뇌의 배선을 풀어준 건 달리기의 역할이 컸고, 신체 강화를 통해 우울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친 시간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이 시간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고, 스스로에게도 약속하고 싶었다. 앞으로도 나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밖에 나가는 것조차 불가능한 사람들에게 앞으로 내가 전할 이야기는 가슴에 전혀 와닿지 않는 글일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일상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라면 가까운 정신의학과를 방문해서 약물치료나 상담을 통해 조금씩 에너지 그릇을 키우는 걸 추천한다. 에너지 그릇이 어느 정도 만들어지고 난 뒤에 나에게 맞는 운동을 찾아서 하나씩 해본다면, 그땐 누가 옆에서 도와주지 않아도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 구역 저질 체력의 최강자인 나도 해낸 일을 다른 사람이라고 못해낼 리가 없다. 우울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모든 이들이 건강해져서 부디 조금은 덜 아프게 이 시간을 건너가길 바란다.

이전 10화 스포츠와 인생의 확률게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