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경복궁역 칼국수

조각 0번 1편

by JINX

"삶이라는 건 내게 너무 뾰족한 것이어서 기대기가 두려웠다. 그러니 또 너무 외로워서 삶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을 마구 주웠다. 가리지 않고 주운 것들이라 대부분이 아팠다. 그러나 때때로 발견한 따뜻한 조각들은 나를 살아가게 하기에 충분했다. 삶에 기대기는 어려우니, 작은 조각들이라도 곱게 깔아 걸터앉아라도 보겠다는 결심이다.


삶은 고해다. 끝없는 불행 속 몇 안 되는 행복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그 몇 안 되는 행복을, 몇 안 되는 조각을 남기는 것이다. 나중에 보았을 때 손발이 오그라들 것을 안다. 그럼에도 꿋꿋이 다시 읽고, 연한 미소를 띨 것도 안다.


행복을 기록하겠다. 투박하지만 충분한.


버텨내라는 말은 참 무책임하면서도, 솔직하다. 직설적이긴 하나, 거짓을 고하지는 않는다. 삶은 울적하고, 어두운 망망대해. 우리는 그 한가운데에서 종종 지나가는 청어 떼를 기다리며 동동 떠 있는 안타까운 처지다. 위로라곤 버텨라는 말 한마디뿐인 세상 속에서.

"조금만 버텨 봐. 나중에 또 후회하지 말고."

숨을 깊게 뱉으면 새하얀 구름이 뿜어져 나오는 겨울이었다. 산 지 좀 된 카키색 패딩을 입고, 둔해진 몸으로 어기적 어기적 지하철을 탔다. 식은땀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익숙하나 불쾌한 상태로 스쳐 지나가는 한강을 물끄러미 봤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이름 모를 대중가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깨에 맨 가방에는 학원 교재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무게를 버티는 가방끈은 내 어깨를 눌렀다. 세상에 짓눌리는 기분으로, 언 손을 매만지며 흘러가는 풍경을 관망했다. 하늘은 필요 이상으로 밝았고, 사람들은 조용했다. 핸드폰에 파묻힌 사람들 사이에서 이질감을 느끼며, 덜컹이는 지하철 소리와 함께 동호대교를 지났다.


핸드폰에 잠식된 사람들 속에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검은 유리창에 주기적으로 지나가는 불빛과 함께 나타나고 사라지는 내 얼굴을 바라봤다. 별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경복궁역이었다. 무거운 몸을 힘겹게 일으켜 나갔다. 경복궁역은 유난히 어두컴컴했고, 공기는 묘하게 텁텁했다. 걸어 나가 지하철역의 프랜차이즈 빵집을 지나 3번 출구로 나가면 사거리가 보였다. 숨을 뱉으니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 연기가 하늘 위로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보다가 다시 걸었다.


사실 그날은 좀 우울했다. 내가 특별하지 않음을 깨달은 날이었다. 특별하다는 믿음은 내 마지막 자긍심이기도 했다. 그 믿음이 내려앉은 날이었고, 친구들 앞에서 추하게 눈물을 쏟은 날이었고, 위로 아닌 위로에 상처만 더 남은 날이었다. 눈물은 말랐고, 울컥했던 감정은 가라앉았으나, 차갑게 식은 나의 머리에 자리 잡은 것은 나의 앞날이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도대체 무엇을 잘하나.


물론 우울해서 홧김에 경복궁에 온 것은 아니었다. 천성이 유별나지 못해서 즉흥적인 것들에 미숙했다. 엄마와의 점심이 약속되어있었고, 엄마의 직장은 경복궁역 근처에 있었다. 얼어가는 입에 적응하며 버스정류장 앞 차가운 벤치에 앉으면 빠르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두커니 앉아 녹슨 파란색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고개를 쭉 뻗으면 시린 겨울 공기가 양볼을 마구 때렸다. 볼이 붉게 변해가는 느낌을 기억하며 따뜻한 버스에 올라탔다. 창문은 온통 희뿌옇게 변해서 창 밖을 보려면 옷소매로 닦아야 했다.


경복궁역 근처 거리는 아직 그리움이 남아있다. 올라가는 임대료에도 아등바등 버티는 작은 상점들과, 빗물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녹이 슨 간판들과, 오래된 나무들이 남아있다. 무엇보다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경복궁은 그 무엇보다 다정했으며, 편안했다. 종종 지나다니는 한복을 입은 외국인들은 모두 활짝 웃고 있었다. 새로움과 친숙함이 모두 스며있는 곳이었다.


굵은 도로는 어느새 언덕을 올라가며 가늘게 변했다. 인왕산 부근으로 향하는 버스는 굽어있고 작은 골목들을 지나갔다. 엄마의 회사가 위치한 곳은 인왕산 바로 아래,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작은 미술관 앞에서 내려걸으면 새로 생긴 편의점이 있었고, 그 앞에는 복덕방이 있었고, 그 맞은편에 엄마의 사무실이 있었다. 급하게 지어졌는지, 건물 안 계단의 경사는 매우 가팔랐고, 엄마의 사무실에 다다를 때면 언제나 허벅지 앞쪽이 저렸다.


꽁꽁 얼었다가 잠시 녹은 손가락으로 벨을 눌렀고, 나야 라고 말했고, 띠리릭하는 도어록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따뜻한 거 먹어야지."


남색 스카프를 두르며 엄마가 말했다. 동그랗게 말려들어가는 단발을 하고, 동그란 회색 안경을 쓴 채였다. 그 회색 안경은 매우 가볍고 비싸서 그녀가 매우 아끼는 안경이었다. 베란다에서 이불을 털다가 안경을 창밖으로 날렸을 때 절망한 그녀의 표정을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웃음이 나온다. 물론 안경은 다시 찾았다. 경비아저씨가 나풀나풀 떨어지던 안경을 목격한 덕이었다. 아파트 화단의 수풀을 헤치며 우울해하던 엄마는 폴짝폴짝 뛰며 기뻐했다.


엄마는 회색 안경을 한번 추켜올리며 다시 물었다.


"칼국수는 어때?"


보통 때라면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초밥을 먹자고 졸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은 유난히 지친 날이었고, 모든 의지가 사라진 날이었다.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