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노고단 여행
오래된 자동차 광고 중 아나운서 백지연의 유명한 광고 카피가 있다.
"여기는 해발 1,507미터 지리산 노고단!
저는 지금 차가 올라올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와있습니다.
그 현장에서 백지연입니다 "
이 광고는 자동차 매출실적이 엄청나게 늘 만큼 화제가 된 광고였다. 나 역시 그 영향으로 지리산 노고단을 가보고 싶다고 늘 노래를 불러 댔다. 하지만, 지리산의 근처도 가보지 못한 채 어느덧 수십 년이 흘러 버렸다.
그러던 어느 봄날, 갑작스레 구례-남원 여행을 계획하다가 우연히 노래를 불러 댔던 지리산 노고단 산행을 감행했다. 그것도 등린이(등산과 어린이를 합친 말) 주제에 일출을 보러 새벽 산행을 도전하겠다며 저질 체력으로 객기를 부려본다.
하지만, 인터넷 맵으로 등산코스를 확인해보니 새벽 산행 한번 해보지 않았던 등린이에게 역시 지리산은 호락호락 자신을 쉽게 내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지리산을 가기로 마음먹었을 당시 만해도 노고단에 대한 설렘 한 가득이었는데, 슬슬 마음속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한다.
새벽 산행을 하려면 광고 카피처럼 노고단 아래 위치한 성삼재 휴게소까지 차량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깜깜한 새벽 초행길인 데다가 비포장도로를 과연 한 시간 정도 운전해서 잘 도착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호기롭게 산행을 하기엔 최근 동네 뒷산조차 올라가 보지 않은 등산 무지렁이 었으니까. 그런 마음을 들킨 건지 때마침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체크인 절차를 진행하면서 말을 꺼내신다.
사장님 "지리산 와본 적 있어요? 일출 보러 가실 건가요?"
나 "처음이에요. 그냥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슬슬 등산해 볼까 하는데… 괜찮겠죠?"
사장님 "글쎄, 초행길이라면 여자 둘이서는 별로 권하고 싶진 않아요.
등산로 초입부터 해서 정상까지 쭉 에스코트해줄 테니
믿고 따라와 봐요. 다른 투숙객들도 신청했으니 같이 가시죠.
가이드도 해주고 보너스로 멋진 사진도 찍어 줄 테니. "
푸근한 인상의 사장님이 자신 있게 픽업 서비스와 새벽 산행 가이드 프로그램을 권하는 바람에 당연한 듯 고개를 끄떡거리고 있었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라기보단 프로 등산러의 포스가 느껴졌다.
게다가 아무런 준비 없이 객기만 장착한 채 구례에 왔던 터라 망설일 필요 없이 그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인당 2 만원의 비용이 들긴 했지만 호갱님이 되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등산 마니아로서 히말라야 트레킹 이후 지리산에 터를 잡고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여행작가였다.
다음날 새벽 성삼재 주차장으로 올라가는 내내 배춧잎 2장이 전혀 아깝지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을 덮쳐버릴 것 같은 어둠 속에 도착했을 때 아무런 준비 없이 무슨 배짱으로 여자 둘이서 새벽 산행을 하려 했던 것인지 너무 당황스러운 현실 자각의 시간이 찾아왔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은 흡사 히말라야의 쉐르파처럼 든든함 그 자체였다. 그가 없었다면 아마 등산로 초입에서 산행을 포기해 버렸을지 모를 일이었다.
심지어 헤드랜턴 하나 없는 상태라 휴대폰의 불빛에 의존해 등산을 시작했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랜턴과 휴대폰 플래시의 시야 확보 차이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한두 발짝 거리의 시야만 보이고 주변은 그냥 어둠 그 자체였다.
휴대폰 플래시는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고, 앞서가는 사장님의 랜턴 빛을 따라 겨우 따라가기 바빴다.
뒤를 돌아다보면 암흑 그 자체였기에 산이 이렇게 무서울 수 있다는 것을 온 감각으로 실감했다. 캄캄한 어둠 어디에선가 지리산 반달곰이라도 튀어나올지도 모를 공포감에 사로잡힐 정도였다.
오르기를 수십 분, 긴장한 상태였어도 점점 몸이 달아오르고 땀이 나기 시작한다. 새벽 날씨가 다소 추웠어도 산행은 산행이라서 땀이 제법 날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노고단 대피소에 이르니 서서히 푸르스름한 빛이 돌기 시작하고 노고 할매가 "어서 와 부러~ 지리산은 처음 이졔?"하며 반갑게 맞이해주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이제 남은 거리는 노고단 대피소에서 노고단 고개까지 약 400미터 정도인데, 산은 역시 마지막까지 쉽게 정상을 내어주지 않는다. 경사가 심한 가파른 돌계단 길이 눈앞에 떡 하니 나타났다.
거친 숨을 몰아 쉬며 겨우 위를 올려다보는데, 일출 전 푸른 실루엣 인생 샷을 찍기 위해 연신 포즈를 취하는 앞서갔던 일행이 눈에 들어온다.
이건 바로 일출 전 약 30분 정도 만날 수 있다는 매직아워 아닌가.
짧은 시간 동안 급변하는 어둠과 빛의 교차 시간을 놓칠 새라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역시 친절한 사장님은 일행 한 팀씩 멋진 푸른 실루엣 샷을 담아 주시는 지리산 매직아워의 마법사였다.
등린이가 지리산에 쏟은 터무니없는 작은 노력에 비해 너무나도 멋진 선물을 선사해주고 있는 것 아닌가.
노고단 정상은 어떤 선물을 더 내어줄지 기대감이 커졌다.
마침내 정상에서 만난 일출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광각 렌즈 카메라가 없어 아쉽지만, 꿩 대신 닭이라고 아이폰 파노라마 기능으로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역시 순간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사진만한 것이 또 어디 있으랴.
이십여 년 만에 드디어 지리산 노고단 산행 소원풀이는 대성공을 거뒀다. 사진동호회 활동 시절에도 번번이 노고단 출사 기회를 놓쳤던 나였기에 감흥이 남달랐다. 막무가내로 준비 없이 왔음에도 안전하게 정상에 올라온 만큼 노고단 돌탑 앞에 서 기도를 올려본다.
“노고 할매! 아따! 겁나게 감사하당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