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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Apr 27. 2024

오페라의 수도 세비야, 기타의 왕국 스페인 <상>

피델리오, 세빌리아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카르멘


위의 곡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보듯이 모두 오페라입니다. 오페라도 그냥 오페라가 아니라 매우 유명한 오페라입니다. 작곡자의 유명세도 만만치 않습니다. <피델리오>는 작가 부일리의 원작을 토대로 독일인 베토벤이 평생 딱 하나 남긴 오페라로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후 유럽의 질서를 과거로 돌리기 위해 소집된 빈 회의에서 초연되었습니다.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보마르셰가 쓴 원작을 바탕으로 이탈리아인 로시니가 작곡한 오페라이며, 그 줄거리가 이어지는 2부 속편과도 같은 <피가로의 결혼>은 오스트리아인 모차르트가 작곡한 오페라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나온 순서는 2부인 <피가로의 결혼>이 먼저입니다. 모차르트는 1791년에 죽고 로시니는 그 이듬해인 1792년에 태어났으니까요. 당시 <피가로의 결혼>의 프리퀄과도 같이 등장한 <세빌리아의 이발사>였을 것입니다. 역시 모차르트의 작품인 <돈 조반니>는 몰리나의 희곡이 원작으로 카사노바와 함께 서양에서 바람둥이의 쌍벽으로 불리는 인물인 돈 조반니의 연애사를 다룬 오페라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바네라>와 <투우사의 노래>로 유명한 <카르멘>은 메리메의 원작 소설을 프랑스인 비제가 작곡한 오페라입니다. 세상에 나온 순서는 <피가로의 결혼(1786)>, <돈 조반니(1787)>, <피델리오(1814)>, <세빌리아의 이발사(1816)>, <카르멘(1875)> 순입니다.


오페라 이외에 이 곡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스페인의 한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목에서 보이는 세비야입니다. 다소 놀라운 것은 위에서 작곡자들 앞에 내세운 국적에서 보듯이 세비야가 있는 스페인 출신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외국인임에도 그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세비야를 배경으로 위의 곡들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오페라의 원작자인 작가들도 자국인 스페인 출신인 <돈 조반니>의 몰리나를 빼곤 모두 외국인 프랑스인들입니다.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클래식의 거장으로 자리를 굳힌 기라성 같은 음악가들과 당대를 풍미했던 작가들이 그들 작품의 배경으로 모두 외국의 세비야를 낙점한 것입니다. 보듯이 작가들의 원작은 작곡가들의 오페라 유명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비야의 오페라 때문에 수혜를 보고 있는 원작과 원작자들입니다.


세비야를 배경으로 한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한 장면 (출처, 영화 <아마데우스>)


그런데 우리나라 음악계에선 왜 이렇게나 유명한 세비야를 세빌리아로 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그 도시 이름을 중고교의 음악 수업에서 처음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 교과 과정에 세비야가 역사 과목이나 지리 과목에 등장할 정도의 도시는 아니었으니까요. 그땐 세빌리아가 지명인지도 모르고 일단 외웠습니다. 스페인명 세비야(Sevilla)는 영어로도 세빌리아와 관계없는 세빌(Seville)입니다. 그러므로 위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세비야의 이발사>로 정정합니다.


위의 음악가들이 활동했던 18~19세기 오페라는 서양에서 가장 대중적인 종합예술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오랫동안 유행했던 연극을 누르고 인기를 누렸습니다. 연극보다 훨씬 다양하고 화려한 무대를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서민은 서민대로, 지배층인 귀족과 왕족은 그들대로 오페라를 즐겼습니다. 그리고 그 두 계급 사이에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으로 등장한 부르주아지라 불리는 신흥 자본가와 그들도 속한 주권을 가진 시민들도 당연히 오페라를 즐겼습니다. 모차르트가 주연인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보듯이 상하고저를 막론하고 모두가 즐긴 것입니다. 물론 신분에 따라 좌석이나 극장을 달리하긴 했습니다. 그래도 누가 보든 오페라의 줄거리는 변함이 없고 그래야만 했습니다. 관객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은 말이 안 되니까요.


일단 이 글은 오페라에 대한 음악 글이 아닙니다. 제가 그만한 식견과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위의 오페라 공연을 제대로 감상한 것도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위의 오페라와 연관된 오페라 코미크, 오페라 부파, 징슈필 등과 같은 장르나 개별 곡에 대한 설명 등은 이 글에 나오지 않고 나올 수도 없습니다. 단지 세비야를 방문하고 그 도시를 배경으로 한 여러 오페라를 떠올리며 생긴 궁금증에 제 나름대로의 답을 구하고, 내친김에 좀 더 나아가 스페인 음악까지 확장해서 정리한 글입니다. 아마 산으로 가는 글이 될 것입니다.  


세비야 대성당에서 바라본 세비야 시내 전경 (출처, pixabay)



오페라의 수도 세비야


세비야의 오페라, 두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첫째, 왜 위의 유명 음악가들은 오페라의 무대를 세비야로 집중해서 정했을까요? 정확히는, 왜 그들 오페라 작곡가들과 오페라 의뢰자들은 세비야를 배경으로 한 원작에 흥미가 있었을까요? 백작과 이발사가 사는 유럽의 도시는 많고, 집시와 바람둥이는 도시마다 있으며, 군인과 교도소는 과거 웬만한 도시엔 다 있었는데 말입니다.


<카르멘>처럼 투우사를 꼭 등장시키려면 스페인엔 세비야보다 더 큰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란 도시도 있습니다. 아, 그 오페라에 등장하는 담배 공장은 그 시대엔 세비야가 최적지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뒤에서 설명이 됩니다. 그리고 별개로 대개 문학이든 예술이든 작가들은 장르를 막론하고 자신에게 익숙한 고국이나 고향을 소재로 작품을 쓰곤 합니다. 세비야가 그 정도로 외국의 음악가들에게까지 매혹적인 도시였을까요? 위의 오페라들의 시대적 배경이 역사적으로 먼 과거가 아닌 오페라를 쓴 음악가들과 거의 동시대의 이야기이기에 드는 의문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세비야를 소재로 한 오페라는 음악의 문외한인 저와 같은 사람에겐 알려져 있지 않아서 그렇지 무려 153곡(출처, Teatro de la Maestranza Sevilla 홈페이지)이나 있다고 합니다. 위의 유명 오페라를 포함한 숫자일 것입니다. 역사상 많은 음악가가 있고, 그들이 작곡한 더 많은 오페라가 있지만 배경 도시로만 보면 압도적으로 1등인 세비야입니다. 이 정도면 음악계에선 세비야가 역사학계나 도시학계의 세비야보다 훨씬 유명세가 강한 도시라 하겠습니다. 클래식 음악의 수도가 빈이라면 오페라의 수도는 세비야라 할 정도로 말입니다. 대체 세비야란 도시의 무엇이 그렇게나 많은 음악가들을 반하게 해 그들의 오선지 위에 그 도시를 그려내게 했을까요?


세비야를 배경으로 한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의 한 장면 (출처, 영화 <아마데우스>)



오페라 작곡가들은 왜 세비야를 주목했는가?


간단합니다. 스페인의 세비야가 오페라의 무대로 가장 적합한 도시라고 생각되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때 음악가들이 주목한 그 적합성의 기준은 대중성일 것입니다. 보다 많은 관객을 오페라 극장에 오게 하기 위해 세비야를 배경으로 오페라를 만든 것입니다. 음악가들은 오페라 의뢰를 받고 본연의 예술성에 더해 상업적으로 흥행성이 있는 소재를 찾아 나섰을 것입니다. 다수인 일반 대중이 좋아하고 환호할 스토리가 필요했으니까요.


예를 들면 지배층인 귀족과 성직자의 이중성을 경멸하고, 그들을 꼬집는 풍자와 해학이 등장하고, 모두가 열광하는 낭만적인 사랑과 불타는 정열이 나오며, 거기서 더 나아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장면도 나오고, 진실한 사랑도 나오지만 거짓 사랑도 나오며, 행복한 꿈과 모험이 그려지는 반면에 아름답지 못한 배신, 치정, 복수와 살인도 등장하는, 소위 요즘 TV 드라마로 치면 막장 드라마와도 같은 스토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음악가들이 볼 때 이런 요소를 모두 갖춘 곳으로 세비야만한 도시가 없던 것이었습니다.


오페라의 주연도 하층민이나 배드 가이가 그 역할을 꿰차야 했습니다. 위의 세비야를 배경으로 한 오페라에서 이발사나 집시, 남장 여인, 부이사관, 바람둥이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오페라를 흥겹게 보며 지배층이 아닌 관객들은 대리 만족을 얻고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스토리가 펼쳐지는 도시가 전통적으로 기독교가 지배해 온 근엄한 도시인 밀라노나 파리, 빈이나 베를린이었다면 그곳에 사는 뿌리가 깊은 귀족들은 참기 힘든 모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지위를 이용해 탄압을 가했을 것입니다. 그런 도시들에선 아름답고 고상한 교향악이 어울렸고 오페라라도 희극적인 요소가 배제된 성서, 신화, 역사, 영웅 등의 진지한 스토리가 어울렸습니다.


아마 위의 베토벤, 모차르트, 로시니, 비제 등도 세비야를 무대로 한 오페라를 만들며 자유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오페라의 본토인 중부 유럽과 서부 유럽의 묵직한 도시에선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런 면에서 베토벤의 <피델리오>는 결이 다릅니다. 그것은 불의에 항거하는 정의 실현의 이야기이니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모차르트와 같은 장난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베토벤이기에 그의 유일한 오페라도 그의 교향곡들처럼 진지하게 진행됩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세비야란 도시를 주목한 것엔 그가 사는 근방의 유럽 도시들과는 다른 매력과 적합성이 있어서 그곳을 무대로 설정했을 것입니다. <피델리오> 역시 강한 부부애가 나오는 러브 스토리라 할 수 있으니까요.


봄이 시작되고 있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도시 세비야의 골목길 (2024. 3)


이렇듯 세비야는 예나 지금이나 정열의 나라 스페인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이고, 이국적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여러 도시들 중에서 가장 낭만적이고 관능적인 도시입니다. 그래서인가 한여름의 온도도 스페인의 도시들 중 최고를 기록하는 뜨거운 도시 세비야입니다.



유럽의 자유도시 세비야


세비야가 이렇게 예술가나 문학가들에게 유럽의 해방구와도 같은 콘셉트의 도시로 포지셔닝된 데에는 그 도시의 역사성에서 기인할 것입니다. 근세 이후 세비야는 유럽 무역의 중심 항구 도시였습니다. 도심을 흐르는 과달키비르강을 통해 60km 아래 바다인 대서양을 통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는 물론 동양까지 진출했으니까요.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러 갈 때 출항한 곳도 그곳이며, 그 27년 후인 1519년 마젤란이 세계일주를 위해 떠난 곳도 바로 세비야였습니다. 물론 돌아온 곳도 그곳이었습니다. 즉, 당시 세비야는 유럽에서 세계로 나아가고 세계에서 유럽으로 들어오는 도시였습니다. 그땐 오늘날과는 달리 배의 크기가 작고 강의 수심이 깊어서 그 강을 통해서 선단의 항해가 가능했습니다. 직접 가서 본 세비야의 과달키비르강은 그래도 유럽 다른 도시의 강보다는 폭이 넓어서 제법한 강처럼 보였습니다.


세비야 시내를 관통하고 있는 과달키비르강. 우측의 탑은 스페인의 황금시대를 상징하는 황금의 탑 (출처, pixabay)


당시 세비야에 입항하는 배들은 신세계의 진기한 물품들을 잔뜩 싣고 들어왔습니다. 오페라 <카르멘>에서 여주인공 카르멘의 직장이 세비야의 담배 공장인 것은 담배의 원산지가 아메리카 신대륙이었기에 가능한 설정입니다. 가장 먼저 도달한 유럽의 도시인 세비야에서 담뱃잎을 가공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배엔 당시 유럽인들이 처음 보는 신대륙의 동식물과 광물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들도 함께 들어왔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아프리카 흑인, 그리고 아시아의 황인까지 줄줄이 세비야를 통해 유럽에 들어온 것입니다. 물품만 사고파는 것이 무역만 성행한 것이 아니라 인간도 사고파는 노예무역도 성행한 것입니다.


그 땅은 일찍이 711년부터 이슬람의 우마이야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해 이방인인 무슬림도 살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바스 왕조, 나스르 왕조를 거치며 원주민인 기독교도의 국권회복운동인 레콩키스타가 일어날 때까지 그 땅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런 이베리아 반도에 세비야를 기점으로 또 신인류가 몰려들어온 것입니다.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콜럼버스와 그를 맞는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 신대륙에서 끌고 온 원주민과 물품이 보임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에 새겨진 타일 부조)


스페인은 기독교도들에 의해 800년 만인 1492년 완전히 통일되었지만 세비야는 그 244년 전인 1248년에 수복되었습니다. 그 동쪽으로 260km에 위치한 그라나다를 점령하여 통일을 하기까지, 또 그렇게 오랜 세월이 걸린 것입니다. 이슬람이 지배했던 중세기에 무슬림은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도는 물론 어디 가도 환영받지 못했던 유대인도 세비야에 들어와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엔 각 종교의 예배당인 기독교의 성당과, 이슬람의 모스크, 유대교의 시너고그가 함께 존재했습니다. 그것은 스페인의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비야는 물론 제가 방문했던 톨레도, 론다, 그라나다 등 어느 고도를 가든 유대인이 살던 지역인 유대리아가 지금도 남아있으니까요. 그 지구엔 유대인의 상징인 다윗의 별이 새겨진 깃발이 펄럭이고 표식이 벽에 붙어있었습니다.


톨레도 주택가에 유대인이 사는 지구를 나타내는 다윗의 별 표식


이렇듯 근세기 세비야는 다양한 인종, 다양한 민족, 다양한 종교, 다양한 풍속, 다양한 물품, 다양한 시설 등 한마디로 세계에서 가장 다양성이 판을 치는 도시였습니다. 사람들에게 흥미를 끌 새로운 것이 많은 이국적이고 개방적인 도시였던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도가 지배했던 서부와 중부 유럽의 도시들에선 이방인인 이슬람은 발도 못 붙이고, 유대인은 탄압받았으며, 신교도인 위그노나 고이센, 퓨리탄 등은 추방을 당했는데 세비야는 그들을 모두 포용한 것입니다. 그것은 유럽의 떠돌이인 집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비야가 그 시대에 자유로움에 더해 새롭고 다양한 볼거리를 보여주는 오페라의 배경으로 최적지가 될 수밖에 없던 이유입니다.



* 다음 주말엔 그렇다면 왜 스페인엔 오페라가 는지 그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아울러 유럽의 주류와는 다른 스페인의 음악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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