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클레르부 (David Claerbout, 1969년 출생)는 사진, 비디오, 디지털 기술과 사운드를 기반으로 한 작업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업 전반에는 확장된 시간과 기억의 경험 및 정적과 움직임 사이의 긴장 속에서 부유하는 이미지, 그리고 일시성과 지속성의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시간을 지속적으로 조각낸다고 말한다. 즉 대규모 영상 설치 작업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스크린에 투영된 이미지로 관객, 스크린 및 전시장 간의 관계를 형성하고,한 장면이 다른 장면으로 전개될 수 있는 프로세스를 허용함으로써, 보는 이를 작품의 일부로 수용하는 것이다. 사진 사료나 재구성된 이미지에서부터 작가의 디렉션에 따라 촬영된 영상까지, 다비드 클레르부는 사진과 필름 사이의 경계가 유동적 일 수 있도록 다양한 시각 자료를 디지털화하기 이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해체하며, 그 이미지들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작가 대표작 소개 영상 (출처: Louisiana Channel)
Imagining Future
2009년, 다비드 클레르부는 드퐁 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첫 개인전 The Shape of Time에서 10개의 비디오 설치작을 선보이는데, 이는 그가 예술가로서 확실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된다. 7년 뒤 KINDL 미술관에서 선보인 Future (2016)을 앞두고, 작업 방식에 있어 급격한 변화를 가져온 그는 3D 애니메이션을 답습하게 되는데, 이후 배우 및 실제 영화 속 장면들과의 협업을 중단하고, 이후 모든 작업을 스튜디오에서 진행하며 팀원들과 기존 아카이브를 디지털화하는데 집중한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현실이자, 모든 디테일이 정확히 일치하는 가상현실 (VR)를 만드는 그들의 방식은, 조금이라도 틀어질 경우 작업 속 이미지는 그 즉시 신뢰성을 잃게 된다. 이는 일반적으로 사진을 촬영할 때 장소나 계절, 시간이 미리 정해져 있는 반면, 디지털 이미지 상에는 예술가가 항상 신과 같이 모든 것을 결정할 권한을 갖기 때문이다. 그는 빛, 그늘, 바람과 같은 자연현상을 감지해 무성의 상태로 부드럽게 물, 나무, 건축물의 표면을 움직이며, 그 일련의 변화를 슬로우 모션 작업으로 나타내 왔다.
그중 해당 전시에서 선보였던 신작 Olympia는 1936년 올림픽 당시, 지배계급구조의악화를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히틀러 정권이 집권할 당시 방대한 건축 프로젝트의 일부로 지어진 해당 건물은 외관에서부터 역사적으로 암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디지털 게임 기술을 바탕으로, 향후 25년 간 어떠한 경우에서도 실시간으로 변화를 보여줄 수 있게 작업한 Olympia는, ‘잡초와 덤불로 뒤덮인 반쯤 붕괴된 상태에서 이 경기장은 어떻게 보일지?’라는 상상력에서 출발해 호기심을 자극하면서도, 영상 속 스타디움의 붕괴는 매우 느린 속도로 일어나므로 전시장에서 즉각적으로 이를 관찰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수명조차 매우 짧게 느껴지는데, 그렇다면 Future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Exhibition view: Olympia, KINDL– Centre for Contemporary Art, Berlin, 2016
20m 층고에 달하는 KINDL 현대미술관의 보일러 하우스에서 선보인 Olympia는 시사적인 느림이 특징이다. 정밀한 구성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물리적으로 구체화시키며, 종종 재구성되거나 컴퓨터로 생성된 이미지, 사진 사료, 또는 영상 장면에서 그 소재를 끌어와 다층적인 작품으로 엮어낸다.
클레르부는 해당 영상 작품에서 인간의 상상력을 훨씬 뛰어넘는 차원을 지향한다. 그의 실시간 투영은 천 년간 지속되며,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의 경험을 훨씬 능가한다. 그는 출발점을 1936년 올림픽을 위해 지어진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으로 설정하고, 향후 천 년 동안 해체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를 디지털로 재구축한다. 작품에서는 무엇보다 나치에 의해 채택된 “천년 제국” 개념과 건축가 알버트 스피어의 조야한 사상을 언급하고 있다. 참고로 스피어는 '멸망 가치론'에서 로마의 콜로세움을 대표적인 예로 들며, 천 년 후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클레르부의 해당 프로젝트는 이를 넘어선 시간과 인식에 대한 반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경기장의 느린 붕괴는 우리 시대의 범주에 머무르지 않으며, 이 과정은 KINDL의 보일러 하우스에 있는 기념비적인 스크린에 실시간으로 비춰진다. 작업에 있어 주요 역할을 담당하는 실시간 기상 정보는 클레르부가 디지털화한 경기장의 붕괴 과정 중에 지속적으로 통합되는데, 관람객들이 매 시각, 다양한 계절, 날씨에 따른 영향을 경험할 수 있도록, KINDL 미술관은 약 9개월간 Olympia를 무료로 개방하기로 한다.
The Nature of Art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단체전 《이토록 아름다운》에서는, 수개월, 때로는 수년에 걸쳐 작업한 작가의 비디오 설치작업 Wildfire(meditation on fire)과 Die reine Notwendigkeit/The Pure Necessity이 함께 전시 중이다.
우리 모두가 방황의 시대에 길을 잃지 않고 지속해서 항해할 수 있기를
11명의 작가가 함께하는 해당 전시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무너진 현시기에 예술의 역할과 본질에 대해 질문하며,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동시대인에게 미술의 근본적인 기능인 ‘치유’와 ‘삶의 활력’을 선사한다.
David Claerbout, Wildfire (meditation on fire), 2019-2020, single channel video projection, 24 min.
다비드 클레르부의 2019-2020년 비디오 설치 작품 Wildfire (meditation on fire)속 등장하는 초현실적인 장면들은 마치 현지에서 직접 촬영한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부르주 미술관(Musea Brugge) 커미션 작업을 위해 처음 기획한 싱글 채널 영상 작업은, 24분간의 러닝타임 동안 3D 기술과 간단한 카메라 무빙워크를 통해 인공적으로 렌더링 된 풍경 속에서 장대한 산불을 묘사한다. 매우 느린 속도로 전개되는 매혹적인 숲의 풍경은 서서히 극적이고, 최면 상태에 가까운 파괴적인 불꽃의 정지 화면으로 합쳐진다. 최종적으로 대형 프리스탠딩 스크린에 투영된 작품에 의해 관객들은 지옥과도 같은 풍경으로 압도된다.
드로잉은 종이 위에 아이디어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매체입니다.
작가는 영화 작업 과정 중에 해둔 메모를 기반으로, 프로젝트마다 소수의 드로잉으로 제작해왔다. 세세한 부분까지 주의를 기울인 해당 드로잉 연작은 대개 작업이 완성되기 전에 제작된다. 이는 단순한 도구나 스케치가 아닌, 움직임이나 영상 편집에 대한 묘사를 통해 이미지의 지속 시간이나, 시간을 종이에 옮긴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드로잉의 순기능을 통해 복잡한 작업 전반을 파악하는 클레르부의 의도는 고전주의 화가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기록하기 위해 사용하는 스케치나 사전 리서치와 유사한 쓰임으로 파악된다.
마찬가지로 3D 애니메이션을 사용하기에 앞서서도, 컴퓨터 기술을 비롯해, 드로잉, 회화, 조각, 영화와 같은 전통 예술 분야 또한 섭렵할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클레르부는 '보수적' 유형의 사실주의 회화 작가임이 분명하지만, 여백에 나타나는 그의 정교하고 때로는 격렬한 문장으로 비춰볼 때, 드로잉은 종종그의 탈출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David Claerbout, The Pure Necessity series, 2016-2021
위의 연작은 작가의 컬러 애니메이션 Die reine Notwendigkeit/The Pure Necessity과 연결된다. 이는 작가가 1967년 루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의 정글북을 애니메이션으로 각색한 것으로, 60분 영상 속 전통적인 프레임 바이 프레임 애니메이션 기법을 답습한 뒤, 극히 사실적으로 역사적 인물을 재현한 것이다.
작품은 영화 속 메인 캐릭터로 등장하는 바기라(Bagheera, 팬서), 발루(Baloo, 곰), 카(Kaa, 뱀) 등의 동물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1967년의 정글북에서는 이들이 재치 있는 대화나 춤, 농담을 나누는 동물로 묘사되었지만, 해당 작품에서는 의인화 없이 '현실적' 동물로 여겨지는 점 또한 흥미롭다. 작가는 그들을 대신해 정글에서 방황하고, 샘에서 물을 마시며, 나뭇가지에서 낮잠을 자며 서로를 관찰한다. 각각의 움직임은 정밀하게 지속되며, 관객들은 드로잉을 통해 모든 디테일을 관찰하게 된다. 약 3년이라는 기간에 걸쳐, 원작의 프레임에서 다시 정교한 수작업으로 완성된 클레르부의 신작에는, 기존의 리드미컬한 원작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며, 서사성이 제거된 동물들은 정글을 배회하는 동시에 스스로의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오늘은 다양한 전시와 함께, 시간을 탐구하는 다비드 클레르부에대해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우리들에게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용기를 일깨우는 작품과 함께 편안한 주말 되셨으면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부산시립미술관 전시는 9월 12일까지 진행되니, ART BUSAN 기간(5.13 - 5.17)에 맞춰 저희 갤러리 부스와 함께 방문해보시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