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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앤비 Oct 05. 2020

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고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가수 god가 부른 “길”이라는 노래가 있다.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다.  


“자신 있게 나의 길이라고 말하고 싶고 그렇게 믿고

돌아보지 않고 후회도 하지 않고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아직도 나는 자신이 없네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지금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께 내 삶을 드려야겠다고 작정하고 신학공부를 했다. 그동안 소명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부르심과 인도하심에 순종하려 노력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20여 년 전의 릭 워렌 목사의 The Purpose Driven Life (목적이 이끄는 삶)을 읽을 때는 목적을 찾고 이루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었고, 약 5년 전 출판되었지만 한국에선 최근에 번역된 Encounters with Jesus: Unexpected Answers to Life’s Biggest Questions (팀 켈러의 인생 질문)을 읽으면서는 역시 내가 선택한 길은 옳은 길이라는 걸 확인하게 해 주었다. 그런데 왜 나는 요즘 god의 “길” 노래 가사에 더 공감이 가는 것인가?


모세와 예레미야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거절했다. 그것도 여러 번. 그 길이 자신에게 맞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본래 말재주가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입니다” (출 4:10).

“주 나의 하나님, 저는 말을 잘할 줄 모릅니다” (렘 1:6).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출 4:13).

“저는 아직 너무 어립니다” (렘 1:6).  


모세도 예레미야도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스스로 그 임무에 대해 부적격이라 믿었다. 말의 어눌함과 경험의 부족, 사람을 리드해야 하는 심리적 부담감, 그리고 반대파들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이 거절하려고 했던 합리적인 이유였다. 할 수 없는데 한다고 하는 것보다 능력이 안되고 준비가 안돼서 못하겠다고 하는 게 당연지사 아닌가.


만약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를 걸으며 백성들이 토해내는 끝없는 불평과 불만을 듣고 지쳤을 때, 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던 예언들로 인해 뺨을 맞고 온갖 욕설을 들으면 고통의 눈물을 흘리면 지새운 고요한 밤에 god의 “길”이란 노래를 들었었다면 어떠했을까?  


우리도 때론 하나님이 부르신 길로 걷기 싫은 것이 아니라, 걷고 싶은데, 걷고 있는데도 자신이 없을 때가 있다. 소명에 대한 확신은 있지만, 오늘 내 문제에 대한 해답 없이 내일을 바라보며 다람쥐 쳇바퀴 돌듯 또 하루를 살아 내어야 한다는 생각에 울적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때가 있다. 소망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길을 걸어가지만 현실은 사탄이 쏘아대는 화살을 겨우 피하고 있거나, 때론 몇 대 맞아 피를 흘리기도 한다. 이럴 땐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라는 매우 비신앙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참 힘들다. 


모세와 예레미야가 인생의 성공이나 낙관적인 미래를 위해, 소위 대가를 받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세는 홍해를 건너면 광야가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예레미야는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면 핍박이 있을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세가 이스라엘 60만 명의 남자와 그의 가족을 데리고 홍해를 건넜을 때나, 예레미야가 요시야 왕 때(BC627년)부터 유다가 망할 것임을 예언하기 시작했을 때나, 그들은 모두 자신이 그 어려운 일을 약 40년간이나 하게 되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자신의 길을 완주해 내었다.  


오늘 나는 한 나라의 백성을 살리기 위해 바다를 건너지 않는다. 한 나라의 타락과 불의에 대가로 심판이 있을 것임을 예언하는 것도 아니다. 오늘 난 단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 내게 주어진 공부를 해내고, 밥을 먹기 위해 수저를 세팅하며, 밥을 먹고 나면 설거지를 하고, 끝도 없는 아이들의 빨래를 개고 (조그마한 옷을 개는 것처럼 성취감 없는 일도 없을 것이다), 두 아이들이 두 발 자전거에서 떨어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이리저리 쫓아다니다가 집에 와서는 녹초가 되어 멍을 때린다. 코로나로 집에 발이 묶인 상태로 나만의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자 방구석에 숨어 인터넷을 좀 하다 보면 어느새 누군가 방문을 노크 없이 열고 들어와 나의 집중을 흩트리기도 하며, 거울에 비치는 끝없는 화상 미팅으로 살짝 충혈된 두 눈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의 마지막번째 이빨을 닦는다. 이빨을 닦다가 잠시 멈추며 생각한다.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내가 걸어가는 이 길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나는 모세와 예레미야를 직접 만나 묻고 싶은 게 많다. 왜 그들은 그들이 가기 싫었던 길을 가기로 결심했었는지.  어떻게 그 길을 완주할 수 있었던 것인지. 


그런데 감사한 게 하나 있다. 어떻게 하면 이 길을 완주할 수 있을지에 답은 없지만, 이 길을 걷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오늘 아침에도 하나님 안에 맺어진 가족 같은 분들과 화상으로 기도모임을 하며 짧게나마 삶을 나누었다. 내가 걷는 것처럼 그들도 각자 주어진 길을 걷는다. 다들 사탄의 화살에 맞아 피도 좀 나고 흉터가 좀 지긴 했어도, 내가 아는 누군가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가 부르신 길을 걷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지난 세월 신앙으로 하나 되어 같이 웃고 울고 삶을 나누었던 정든 사람들이 무척 그리운 날이다. 지나온 길을 회상하며 내게 주어진 길 끝의 푯대를 바라본다. 이 땅에서 나의 마지막 날이 내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날이 되고 그가 나를 가장 칭찬할 수 있는 날이 되길 바래본다. 그래서 오늘 하루도 나는 내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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