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원의 고요를 뒤로하고 전화기의 무음을 풀자, 친구의 부음이 뜬다. 순간 오랜 병마에 지쳐있던 그의 얼굴이 눈앞에 스친다.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 집 앞 산책길에 나선다. 가을은 깊어 가고 단풍나무는 노랗고 붉게 물들어 있다. 그 화려한 잎사귀들은 우수수 떨어져 길 위에 흩어진다. 잠시 전까지 나무에 매달려 있던 빛깔들이 어느새 발끝에 밟히며 사라져 간다. 그 순간 나는 깨닫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가장 빨리 사라진다는 사실을….
사람은 떠나도 계절은 남는다. 누군가의 생이 끝났다는 소식은 갑작스럽게 다가오지만, 자연은 묵묵히 제자리를 지킨다. 잎새는 바람에 흩날려 땅에 떨어지지만, 그 자리에 또 다른 새싹이 돋아날 것이다. 사라진 것들은 우리 곁에서 더 이상 손에 잡히지 않지만,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
나는 그 친구와 함께 웃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병마에 시달리던 그의 짠한 모습보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나누던 대화, 여행길에서 찍었던 사진, 사소한 농담에 웃음이 터지던 장면들이 더 선명하다. 사라진 건 육신이지만, 남아있는 것은 기억과 흔적이다.
사라짐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계절이 바뀌고 기억이 희미해지고, 젊음이 서서히 퇴색하는 과정 모두가 ‘사라짐’의 다른 얼굴이다. 우리는 그것을 상실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끊임없는 변화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라고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듯이 모든 것은 흐르고, 모든 것은 변한다. 친구가 별이 된 것은 그 흐름의 한 지점일 뿐, 절대적인 단절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변형이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다. 삶의 일부다. 단풍잎이 떨어져 나가야 새싹이 돋아나고, 기억이 희미해져야 새로운 경험이 자리를 차지한다. 사라진 것은 흔적을 남기며, 그 흔적은 우리의 삶을 형성한다. 우리는 사라짐을 두려워하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가을은 늘 무언가를 잃게 만드는 계절이다. 나무는 잎을 버리고 바람은 따뜻함을 거두어 간다. 그러나 그 빈자리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친구의 부음을 접한 나는 ‘사라짐’이 곧 ‘끝’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또 다른 기억의 시작이고 남은 이들의 삶을 더 깊게 만드는 계기다.
결국 사라진 것들은 우리를 비워내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의미를 채워 넣는다. 나는 친구의 부음을 애도하면서도, 그 사라짐이 내 삶을 더 깊게 만들고 있음을 느낀다. 사라짐은 상실이 아니다. 변화로 통하는 또 다른 시작이다.
단풍나무의 빛깔, 바람의 냄새, 그리고 마음속에 살아있는 친구의 웃음, 그것들이 모여 오늘도 나를 걷게 한다.
(2025. 11. 25. 친구 고 김영식 님을 추모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