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촌

by 란님


엄마는 육 남매 중 늦둥이 겸 막둥이였다. 게다가 엄마의 또래 분들이 대부분 일찍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던 것에 비해 엄마는 그 모든 과정을 조금 늦게 하신 편이었다. 첫 아이를 31세에 낳으셨으니 말이다. 덕분에 큰 외삼촌과 큰 이모의 아이들, 즉 나의 이종사촌들은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사촌들과는 어울려 논 기억이 없고, 사촌들이 우리를 돌봐준 기억만 있다. 언니와 나는 이모나 삼촌의 돌봄을 받은 적은 없지만, 사촌언니 오빠들의 돌봄은 자주 받았다. 때문에 어릴 때는 사촌 언니 오빠들이 아주 가까운 가족처럼 느껴졌다.


시골 부잣집 막내딸로 태어나신 엄마였지만 집에서 받은 것은 별로 없었다. 외할머니는 밖으로 나돌던 남편을 믿지 못하셨기에 집안의 재산을 일찌감치 아들들에게 나누어주셨다. 딸들은 재산 분배에서 소외되었으나 큰딸에게만은 아주 약간의 재산을 남겨주시었다. 하지만 엄마는 시골 사람답지 않게 가톨릭 학교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고 자란 신여성이었고, 대졸에 전문면허를 보유하고 직장까지 좋았다. 때문에 선망을 받은 것인지 몰라도, 조카들과 꽤 가까웠고 자연스레 도움을 받았다(아마 엄마가 도움을 준 부분도 있었겠지만 자신이 조카들에게 무언가를 해주었다는 이야기는 자식들에게 하지 않으신다).


큰 외삼촌의 큰 아들인 사촌오빠는 군대 휴가를 나왔을 때 자신의 집과는 아주 멀었던 우리 집에 놀러 올 정도였고, 나중에는 우리 집에서 잠깐 살기도 했다. 엄마와 새아빠가 차린 사업체에서 일을 맡아하면서는 아예 우리 집이 있는 지역으로 이사를 와서 살았다. 큰 외삼촌의 둘째 딸인 사촌언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의 부탁으로 우리 집에 와있으며 우리를 종종 돌봐주다가, 나중에 엄마가 재혼 후 사업체를 차리시면서는 그곳에서 일하며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살았다. 두 사람은, 외할머니와 큰 이모 외에 내가 가족이라 느낀 유이한 외갓집 식구들이다. 큰 이모의 아들과 작은 이모의 딸도 엄마와는 아주 가까운 사이지만 나와는 연결고리가 별로 없는 반면, 저 두 사촌은 어린 시절 내가 믿고 기댈 수 있는 지주들이었다.


평생 갈 줄 알았던 우리들의 관계는 IMF가 닥쳐오고 우리 집 사업이 망하면서 흩어져 버리게 된다. 이모와 이모부만 믿고 타 지역에서 삶을 꾸려 나가고 있던 두 사촌은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의지할 곳이 없어졌다. 엄마와 새아빠가 다시 재기하시까지의 과정이 꽤나 길고 험난했던 걸 돌이켜 보면, 분명 두 사람을 챙겨줄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재산을 다 날리고 빚만 남은 엄마와 새아빠에게는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인 아이가 일곱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촌은 어쩔 수 없이 원래 자신들의 가족이 있던 지역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을 알기에 그래야 했던 사정이 나도 너무 미안하다. 나이를 먹으며 세상살이에 대해 조금씩 배워나갈수록 얼마나 막막했을지를 알게 되며 미안해진다. 나는 그저 아이였을 뿐인데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 엄마가 그리 느끼시던 것이 내게 이어진 것일까.


두 사촌은 인물도 좋고 영리하고 배려심이 깊었으며 무엇보다 마음이 넓었다.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내가 당시 철부지로 자랄 수 있었던 건 두 사촌 덕분이 아닌가 한다. 큰 언니 오빠처럼 나의 방종을 받아주고 지켜봐 준 사람들이다. 어릴 적 내가 가장 좋아하던 사람들이었다. 관계의 시작 자체가 내가 아닌 엄마와 맺어진 것이고 그 끝이 좋지 않았기에,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저 송구하고 불편하긴 하다. 엄마도 미안했는지, 큰외삼촌이 돌아가시기 직전 외조부로부터 상속된 재산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자 자기 몫을 포기한다고 쿨하게 사인해주셨다고 한다. 그게 두 사촌의 잃어버린 젊은 시절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지는 않겠지만, 마음이 그렇다는 것은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촌들과 그 가족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기를 바라는 이 마음도 함께 말이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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