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by 란님


언젠가 인터넷에서 정해인 배우의 인성논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매니저가 거대한 우산을 들고 뒤에서 쩔쩔매는데, 정해인 배우는 무심해 보이는 사진이었다. 갑질이라 욕먹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부정적 의견을 순식간에 잠재운 것은 바로 그 매니저가 배우의 친동생이라는 사실이었다. "국가가 인정한 합법적 따까리"부터 "동생한테 우산 들게 시키는 거 가지고 돈까지 주는 거야? 정해인 씨 착한 사람이네" 등의 댓글이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우리 사회의 인식이 그러하다. 나와 언니의 관계도 그러하다.


언니와 나는 겨우 13개월 차이 세상에 태어났다. 엄마는 '첫째를 낳고 보니 너무 예뻐서 둘째도 가졌다'라고 늘 말씀하셨기에, 나의 존재는 언니로 인해 생겨난 것이라는 부채감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가뜩이나 부속품 같은 기분으로 살게 되었는데, 어딜 가든 사람들은 매번 언니에게만 예쁘다는 칭찬을 해주었다. 같이 다니지 않아도 나는 늘 '언니의 동생'으로 인식되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학교가 달라지기 전까지는 늘 그렇게 살았다.


언니는 내가 한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되기까지 늘 내 곁을 지켜주었다. 엄마 아빠가 안 계실 때도 언니는 나와 함께 있었다. 내가 가끔 외할머니 댁에 혼자 가있을 때는 언니도 집에 혼자 있었다. 언니는 내가 없는 세상에서 잠깐이나마 살아보았지만, 나는 언니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우리는 쌍둥이가 아니지만 나는 언니에게 강한 결속을 느낀다. 언니는 나와 유전자 구조가 가장 유사한,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가깝다는 것은 비슷하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아주 다르다. 생김새도 분위기도 취향도 성격도 혈액형도 다 다르다. 지만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비슷할 것이다.


엄마는 가끔 언니와 내게 다른 말씀을 하셨다. 내게 와서는 "엄마는 너를 제일 좋아해"라고 하시고 언니에게도 "엄마는 네가 제일 좋아"라고 하셨다. 분명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10대가 될 즈음부터는 내가 그걸 인지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언니와 내가 경쟁심을 느끼도록 부추기는 모든 상황이 싫었다. 나는 엄마의 사랑을 놓고 언니와 경쟁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날 때부터 승패가 정해져 있는 일이다. 나는 언니와 경쟁할 생각이 1도 없다. 오히려 어찌 보면 계속 함께 살아오고 또 살아갈 언니가 내게는 더 중요하다.


방목된 채 이런저런 공상을 하고 마음대로 자란 나와는 달리, 언니는 엄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라느라 스트레스가 많았다고 한다. 언니는 어려서부터 예쁘고 똑똑했으며 인기도 많았다. 초등학교에서는 전교 부회장을 했고 가족 중 유일하게 바이올린 수업도 들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도 선생님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으나, IMF로 집안사정이 어려워지면서부터는 달랐다. 언니는 더 이상 모범생으로 살지 않겠다 다짐한 것 같았다. 공부도 하지 않았고 어른들의 기대를 거부했다. 엄마는 자신의 걸작품이 망가지는 것에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나는 그런 엄마와 언니를 둘 다 이해할 수 없었다. 가끔은 엄마 편을 들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로 별 관심이 없었다. 나도 사춘기의 격랑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언니는 모범생이든 아니든 간에 나의 하나뿐인 언니였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언니는 내게 많은 걸 알려주었다. 장난감과 가전을 만지는 방법, 그네와 미끄럼틀을 타는 방법, 글씨 쓰는 법, 영어 알파벳, 로션 바르기, 그리고 싸우는 법까지(언니와 싸우면서 자연스레 체득). 나의 모든 생활양식과 지식은 언니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식이 생기기 전까지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언니였고 그 다음은 조카(언니의 아이)였다.


언니는 첫째라서 그런지 조금 이기적인 측면이 있다. 자기가 첫째로서 누려온 것들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별로 감사하지는 않는 것 같다. 동시에 언니는 장녀로서의 책임감이 강한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내 삶에만 집중하고 사는 나와는 달리, 엄마의 입장이라든가 동생(나)의 안위에 대해서도 걱정을 하는 것 같다. 사회적 지위에 대한 고려도 상당한 편이고 말이다.


나는 언니와 언니의 가족들이 늘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세상 모든 해악으로부터 언니네가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아오며 받아온 크고 작은 상처가 있겠지만, 언니의 상처는 대부분 내가 옆에서 지켜보며 함께 짊어진 것들이었다. 더 크고 생생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힘든 일을 겪은 만큼, 앞으로는 최대한 꽃길만 걷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의 어린 시절과 지금을 함께해줘서 고마워.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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