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샤두 지 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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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것이라고는 제목이 전부인 책들이 있다.
어떤 책들은 그조차도 찾아볼 수 없긴 하지만.
50대 변호사 벤치뉴가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열다섯 살부터 현재까지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풀어놓는다. 이 소설은 벤치뉴의 1인칭 시점으로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면서 마치 글을 읽는 자들과 진실의 줄다리기를 하듯 이야기를 아슬아슬하게 이어간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벤치뉴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소설 내에서 그는 관찰자 혹은 염탐하는 자의 위치에 있다. 언뜻 보기에는 연인(후일에는 아내) 카피투, 어머니, 심지어 객식구인 주제 지아스에게 휘둘리는 느낌이지만, 오히려 그럼으로써 자신이 감당해야할 책임에서 자유롭다.
사제가 되는 것도, 사제가 되지 않겠다는 것도, 상파울로에서 법학 공부를 하겠다는 것도, 사제가 되는 길을 모면하는 방법도, 그 방법에 주제 지아스를 끌어들이는 것까지 어느 하나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는다. 사랑에 있어서 역시 카피투가 훨씬 적극적이고 이성적이고 분별력이 잇다. 벤치뉴는 혼자 머릿속에서 시나리오를 상상할 뿐 자신의 의견을 먼저 제시하거나 판단하고 결정하지 않는다.
벤치뉴가 '카즈무후'라고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무뚝뚝해서가 아니라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인 것 같다. 자기의 생각이나 의도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그는 사람들이 보기에 어른들 말씀을 잘 듣는 선량하고 바른 사람같지만 편협하고 이기적이며 때로는 광기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걸 아무도 모르니 얼마나 무섭냐고.)
자신의 행복한 기분을 망쳤다는 이유로 죽은 사람에 대해 몇 시간 후에 죽지 않은 것을 불쾌해 하는 벤치뉴. 시끄럽게 짖어대는 개 세 마리를 죽이기 위해 독약을 묻힌 고깃덩어리를 들고 나가지만 개를 꼬이는 과정에서 개가 꼬리를 흔들며 그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겼다는 생각에 고깃덩어리를 도로 주머니에 넣은 사람.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는 그의 아들 에제키에우. 이외에도 몇 가지 사건은 순간적으로 발현하는 벤치뉴의 광기를 보여준다. 특히 두 부자의 모습은 닮은 데가 있는데, 이는 독자가 진실에 가까워지는데 혼란을 주기도 하고, 또한 소설의 결말을 암시한다. 벤치뉴는 이 '고깃덩어리'를 어떻게 사용했을까.
소설 후반부에 벤치뉴가 동료이자 소울메이트인 에스코로바에 대한 추도사를 찢어버린 장면이 나오는데, 그 추도사에는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추도의 내용 이면에 반의적인 내용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영혼을 지닌 활동가이자 올곧고 우애가 깊은 좋은 친구였고, 헌신적인 아내에게 합당한 사람이었다'라는 내용은 벤치뉴의 꼬일대로 꼬인 성격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본인은 상당히 세련되게 저격했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고.)
벤치뉴의 의심을 정황상 어느 정도는 타당하게 생각할 수 있다. 다수의 독자들도 그의 의심이 사실이라는 쪽에 무게를 둘 수 있다. 그런데 어린시절 살짝 드러난 에제키에우의 모습과 청년이 되어 아버지를 찾아온 아들의 모습에서 혹시... 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열다섯 살 벤치뉴는 신학교로 자신을 데리러 온 주제 지아스로부터 어머니가 와병 중이라는 소식에 놀란 것도 잠시, 어머니가 죽으면 신학교도 끝난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죄의식을 느낀다. 쉰다섯 살의 그는 지팡이 없이 길을 가는 시각장애인에게 자신의 지팡이를 건네주러 되돌아갔다고 타야할 노선의 기차를 놓치고 만다. 벤치뉴는 '이것이 나의 행위이고, 이것이 나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우리, 인간의 본질은 어디에 더 가까울까.
아무튼 이 소설은 벤치뉴의 확신에 대한 진실 여부보다는 한 인간이 갖는 의심과 확인되지 않은 진실을 확신할 때 생기는 파국에 더 중점을 두고 읽어야할 것 같다.
사족
어느날 우연히 관람한 <오셀로>에게서 자신을 보게 되는 벤치뉴는 생각한다. 만약 데스데모나가 실은 의심대로 큰 죄를 저질렸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반대로 벤치뉴가 실은 진짜 오셀로였다면 그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
뻘.
책을 덮고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이 생각났다. 두 남자가 너무 비교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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