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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쇠네스보헨엔데 Jul 09. 2020

페이지 넘기는 손을 마음이 붙잡다

독자와 밀당하는 소설  <가제가 노래하는 곳>

페이지를 세차게 넘기는 손을 붙들고 싶은 심정을 경험했다.

 머리는 다음을 읽고 싶어 손을 재촉하는데 

보석 같은 문장에 좀 더 젖어있고 싶은 마음이 

바쁜 손을 붙들었다. 

델리아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는 

진정한 페이지 터너의 매력을 느끼게 한 책이다. 


무엇이 내 마음을 붙든 걸까.      


독자와 밀당하는 플롯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쓴' 소설이야 말로

진정 잘 쓴 소설이라고 말한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담긴 이야기들 역시

큰 틀에서 보면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이야기들이다. 

불우한 유년,

순수한 첫 사랑,

기댈 곳을 찾다가 만나게 된 나쁜 남자,

그리고 그 불행한 결말.

하지만 이 잘 아는 이야기들이 

살짝씩 엇박자를 탄다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폭력적인 술꾼 아버지가 

어린 카야를 무작정 방기하나 싶어

독자가 슬픔에 빠질 채비를 할 무렵

애비가 갑자기 제대로 된 애비노릇을 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놓을라치면

다시 원래의 꼬락서니가 되어선

어린 딸을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테이트와의 로맨스도 마찬가지다. 

슬픈 유년의 상처를 가진 어린 남녀가 

서로를 돕다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무척이나 익숙한 연애담이 절정을 맞이할 무렵

테이트는 대학을 가 버린다. 


그래도 테이트의 진심을 믿었던 독자는 

아무리 듬직해 보였어도 그 역시 스무살 애송이에 불과했음을 

뒤늦게 깨닫고 

카야 만큼이나 큰 배신감을 맛보게 된다. 


그 뒤로 거듭 헛다리를 짚게 된 독자는

더이상 아는 길이라 성큼성큼 걸어갈 수 없게 된다. 

그 후로는 작은 디테일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마음을 조여가며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농익은 로맨스


로맨스 서술만 놓고 봤을 땐

작가의 나이를 전혀 의식할 수 없었다. 

카야와 테이트의 

정서적 그리고 육체적 밀당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다가 

한순간 화들짝 놀랐다. 


"아니, 이걸 할머니가 썼다고?"


내가 20대였다면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나를 흠뻑 취하게 한 로맨스가 

할머니의 감성에서 나왔다는 걸.


하지만 나이를 먹어보니 알겠다. 

설레고 짜릿했던 사랑의 순간은

바로 그 즈음이 아니더라도 

끊임없이 마음에서 재생되고 재생되어 

어쩌면 바로 그 즈음 보다

더 큰 설렘과 짜릿함으로 

깊이 새겨진다는 것을.


작가 역시 한 시절 사랑의 감정을 

몇 십년간 마음 속에 고이 간직해 두었을 테고 

실제 보다 더 진한 농도와 더 큰 부피로

자신만의 로맨스를 완성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인생의 황혼녘에

풋풋함과 농밀함을 동시에 지닌

참신한 로맨스를 그릴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신비로운 배경   


이 소설의 배경이 뉴욕이나 텍사스였다면,

혹은 미국식 소설 배경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옥수수 농가나 큰 공장지대였다면

그 매력이 반감되었을 것이다. 


한국 독자에겐(아마 세계 다른 나라 독자에게도 상당부분)

생소하기 그지 없는 습지와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들에 대한 묘사,

배를 타고 호소에서 바다로 나가는 

낯선 동선이 

익숙한 이야기에 신비로운 광채를 더했다.  

'습지가 키운' 습지의 딸, 마시걸에게도. 


책을 읽는 일주일 내내

카야의 외모를 상상해보려 애썼다. 

햇빛을 고스란히 받아 피부가 올리브색이 된 백인, 

야윈 몸에 팔 다리가 긴 몸매, 

거리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미인,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숨겨지지 않는  

야생의 몸짓 .


실제 인물 중에서 닮은꼴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워킹데드> 미숀이 떠올랐으나

미숀은 예쁘지가 않다. ㅠㅠ

(영화화 된다고 하나 아직 하마평은 없다. 

설마 리즈 위더스푼이 직접 하진 않겠지.)


습지와 카야의 신비로움이,

그리고 그 신비를 묘사하는 아름다운 문장이 

뻔한듯 뻔하지 않은 플롯과 

가슴을 울리는 로맨스와 어우러져 

독자를 거침없이 빨아들인다. 


아이를 재우고 슬며시 빠져나와 

다시금 책을 들고 앉아있게 한 책.

정작 작가는 이해할 수 없을 지 모르지만

육아맘들이라면 

책에 이보다 더 한 찬사를 바칠 수 없음을 

이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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